검을 든 꽃 108화
란셀리드 로아즈는 축제 첫날인 6월 20일 아침에 아젠카 역에 도착했다. 로아즈 가문의 기사 두 명과 하인 한 명이 그와 동행했다.
마나 열차가 덜컹거리며 역으로 들어섰다. 연한 갈색 머리칼의 소년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아젠카 역은 제국 수도의 역보다 화려하진 않았다. 대신 오랜 세월과 웅장함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아젠카를 찾던 수많은 순례자와 기사들이 모여 신과 검에 대해 논하던 거대한 홀을 개축하여 역으로 만든 탓이었다.
까마득한 천장에 신과 대장장이와 기오사 시리즈의 전설이 그려져 있었다. 아치형 대리석 기둥에는 신을 찬미하거나 검에 대해 말하는 문구들이 고어로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검을 찬 사람들이나 흰 제복이 언뜻언뜻 보였다.
기사의 성지, 아젠카.
전설이 살아 숨 쉬며 최강이라 불리는 기사들과 검의 천재들이 모여드는 땅. 한때 기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소년에게는 제국의 수도보다 더 두근거리는 도시였다.
“란셀!”
꿈꾸는 듯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소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봐도 한눈에 띄는 엷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사람들을 헤치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활짝 웃었다.
“누님!”
“어서와. 닉도 왔구나.”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란셀리드의 전속 하인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호위기사 둘과도 인사를 나눈 에키가 란셀리드를 살펴 보았다.
지워버린 과거에는 그녀의 손에 죽어 1629년의 태양 축제를 보지 못했던 동생이 건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키는 일순 일렁이는 감정이 치솟는 것을 삼키고 미소 지었다.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그런데 누님은…….”
누나를 빼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에키를 아래위로 훑더니 표정이 확 찌푸려졌다.
“……잘 못 지낸 것 같네요. 왜 이렇게 말랐어요? 한창 몸매 관리할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은데. 손목 봐, 잡으면 뚝 부러지겠네.”
소년이 대놓고 혀를 차더니 에키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보다 세 살 어리다지만 란셀리드는 에키보다 키도 손도 컸다.
[잡으면 뚝 부러지는 건 주인 손목이 아니라 쟤 손목일 텐데. 그치?]
마검이 종알거렸다. 에키는 자신보다 큰 동생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쉽사리 빼냈다.
“숙녀의 손목을 함부로 잡으면 안 되지, 란셀.”
“저한테 누님은 숙녀 아닌데요. 헛소리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사관학교에 적응 못 했죠?”
“적응 잘했거든?”
“잘한 얼굴이 아니잖아요. 살이 쏙 빠져서는. 부모님이 보셨다간 당장 집으로 끌고 갈걸요.”
“며칠 전에 좀 고생을 해서 그래. 부모님한텐 말하지 마.”
“무슨 고생을 했……. 우와.”
란셀리드의 입이 헤 벌어졌다. 인파 사이에서 나타난 앨리스 윈터벨 때문이었다.
검푸른 생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사관생도의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웠다. 큰 키와 우아한 분위기가 그런 인상을 더했다.
란셀리드와 에키를 발견한 앨리스가 반갑게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남동생을 찾은 모양이군요.”
“네, 란셀리드 로아즈예요. 인사해, 내 룸메이트인 앨리스 윈터벨 생도야.”
“어, 아, 안녕하세요! 로아즈의 란셀리드입니다.”
란셀리드가 꾸벅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앨리스는 가볍게 아젠카식 경례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앨리스 윈터벨입니다, 란셀리드 로아즈 군.”
“와, 와. 우와.”
소년은 절도 있는 경례를 넋이 나간 눈으로 보더니, 옆에 있던 에키를 돌아보았다. 레이스가 장식된 드레스 차림의 누나는 제가 봐도 꽤나 미인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사관생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앨리스와 비교하니 특히나 더. 란셀리드는 한숨을 쉬었다.
“누님이 신세를 지고 있군요. 여러모로 부족하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신세를 지고 있는 건 제 쪽입니다, 로아즈 군.”
앨리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란셀리드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말을 덧붙이는 대신 에키를 향해 말했다.
“에키, 제 가족들은 다음 열차로 올 듯하니, 먼저 돌아가세요.”
“다음 열차라 해봤자 한 시간 남짓인데,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요.”
“막 도착한 로아즈 군을 그렇게 기다리게 할 순 없잖습니까. 먼저 가서 그에게 창천을 소개해 주세요.”
“으음…….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앨리스!”
에키는 앨리스에게 인사를 한 뒤 란셀리드를 데리고 역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마차를 잡아타고 미리 예약해 둔 여관으로 향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창천기사단 내부를 안내해 줄게. 축제 기간엔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되는 곳이 많으니까.”
에키의 말에 란셀리드뿐만 아니라 호위로 따라온 로아즈의 기사 두 명도 확연히 기대되는 낯이 되었다. 기사들에게 창천기사단 본부란 죽기 전에 한 번쯤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은 장소였으므로.
란셀리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안 믿겨요. 누님이 그 창천의 사관생도라니…….”
“사실 저희도 아직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가씨께선 검을 쥐어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에키가 어릴 때부터 죽 가문의 기사였던 한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란셀리드도 그의 전속 하인인 닉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에키는 뻔뻔한 낯으로 답했다.
“란셀이 검술 훈련 받을 때, 옆에서 많이 지켜봤잖아. 기억해 놨다가 혼자서 몰래 따라했었어.”
“아니, 겨우 그걸로 될 리가…….”
“해보니까 되더라고.”
“허…….”
가만히 듣고 있던 란셀리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누님, 근데 누님은 기사 같은 덴 관심 없었잖아요. 누님이 검을 몰래 연습했다는 헛소리는 그렇다 쳐도, 난데없이 사관생도 선발시험에 지원한 이유는 뭐예요?”
“헛소리라니, 누님한테 말버릇하곤. 전보 못 봤어? 말했잖아. 사실 검이건 기사건 관심 많았어. 없는 척한 거지.”
“누님을 평생 봤는데 제가 그걸 믿을 것 같아요? 부모님도 안 믿으시는데.”
“……안 믿으셔?”
“누님 같으면 믿겠어요? 덜컥 아젠카에 눌러앉아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체념하신 거죠. 솔직히 말해 봐요, 진짜 왜 기사가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냥…… 멋져 보여서.”
“에이, 거짓말. 뭐 다른 목적이 있는 거죠?”
[목적 있지. 날 버리려는 목적! 야, 꼬맹아, 니네 누나 되게 무정한 주인이다? 맨날 닥치라고 하고, 나 들키면 안 된다고 허여멀건 검이나 쓰고……. 난 그냥 가끔 인간 좀 죽이고 싶어 할 뿐인 착한 검인데!]
에키는 마검이 푸념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가족은 날카로웠다. 변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란셀리드를 피해 눈을 돌리는데 마침 예약해 둔 여관이 보였다.
“아, 다 왔네. 올라가서 짐 풀고 내려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흐으음……. 뭐, 알겠어요. 참, 누님, 이거 받아요.”
가느스름한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던 란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리본으로 묶인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게 뭐야?”
“전보로 미리 듣지 않았어요? 베른스트 백작 영식 초상화랑, 소개 편지예요.”
가볍게 말한 란셀리드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짐을 든 하인과 기사들이 여관 안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던 소년이 씨익 웃는 얼굴로 에키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거 전하라면서, 어머니께서 저한테 따로 내린 지령이 있어요, 누님.”
“……무슨 지령?”
“감이 수상하다고, 누님이 혹시 맘에 둔 사람이 있는 게 아닌지 자알 살펴보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놈팡인지 사윗감인지도 꼭 알아내라고.”
“뭐?”
두루마리를 들고 굳어 있던 에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란셀리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짓궂게 말했다.
“초상화 받는 누님 표정을 보니 역시 어머니 감이 맞나 봐요. 몰래 연애하고 있었죠? 상대 신사분은 그럼 놈팡이예요, 사윗감이에요?”
“뭐라는 거야, 새파랗게 어린 게!”
소년이 능청을 떠는 꼴이 어릴 때와 똑같았다. 아주 익숙한 느낌. 에키는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집어 던졌다.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란셀리드는 이미 여관 안으로 도망친 후였다.
에키는 닫힌 문에 부딪혀 떨어지는 두루마리를 보고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했다. 예전에 장난치는 란셀리드에게 손에 잡히던 것을 쥐어 던지던 것과 똑같았다. 마검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스무 살 때로 돌아왔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두 번째 삶. 악몽 같은 과거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멍하니 바닥에서 구르는 두루마리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날, 사택에서 기숙사로 돌아온 이후 유리엔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휴식이 필요했고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문득 문득 유리엔이 떠오른다. 전혀 관계없는 것들에서도 그를 연상한다. 그럴 때마다 속에 쌓여 있는 말들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차올랐다.
그녀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세워둔 장벽이, 그로인해 자꾸 무너지려 했다.
믿고 싶어져서. 믿어도 될 것 같아서.
테라스에서 그녀는 그에게 대답을 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초상화 두루마리는 그녀에게 의미가 없었다. 펼쳐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에키는 봉해진 그대로 그것을 찢어 버리려다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초상화를 찢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에서 나온 란셀리드가 빈손인 그녀를 보고 눈을 굴렸다.
“초상화는 어쨌어요, 누님?”
“저기에. 볼 생각 없으니 도로 가져가.”
에키가 마차 안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구석에 처박힌 두루마리를 발견한 란셀리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여간 누님은……. 부모님한텐 뭐라고 말해요?”
“아직 결혼할 생각 없다고 전해드려.”
“놈팡이 때문에요?”
“놈팡이 아니거든?”
“와, 있긴 있다는 소리네요? 누구예요? 어떤 사람인데요?”
순간적으로 울컥한 에키의 말에 란셀리드가 초롱초롱한 눈이 되어 캐물었다. 에키는 아차 싶어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사람 없어. 가자.”
그녀는 란셀리드가 더 떠들기 전에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달리는 내내 은근히 에키를 찔러보던 란셀리드는 아젠카 내성으로 접어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물리적으로는 입을 벌렸고 말은 멈췄다.
아젠카는 신력의 시작보다도 오래된 도시였다. 창천기사단의 역사 또한 신검 카이로스기오사가 박힌 땅 주위에 모여든 사도들로부터 셈하면 신력 이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지금과 같은 ‘기오사를 수호하는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형태가 자리 잡은 건 그 정도까지 오래되진 않았으나, 그래도 제국의 역사보다는 길었다.
그 긴 역사와 현재의 위상이 뒤섞인 아젠카 내성 안의 풍경은 독특했다.
수백 년은 묵었을 것 같은 건물과 천 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은 돌길 사이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하얀 대리석 건물과 잘 닦인 도로가 뒤섞여 있었다.
땀에 젖은 허술한 차림의 기사들과 발끝까지 내려오는 신관복을 단정히 걸친 대신전의 신관들이 그 속에서 함께 오갔다.
스쳐 지나가는 연무장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기를 쓰는 기사가 보였다.
“누가 검술 대련 와중에 마나를 쓰라고 했나? 경은 마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나?”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그 검기를 쓴 마스터는 금발의 여기사 앞에서 빠르게 고개를 처박았다.
검기에 놀라 마차의 창에 달라붙다시피 했던 로아즈의 기사들이 마스터가 머리를 박는 것을 보고 아연해졌다. 검기 자체를 난생 처음 본 란셀리드는 아예 넋이 나갔다.
금발의 여기사는 마스터를 일으켜 세우더니 검으로 두들겼다. 분명 대련인데 검으로 두들긴다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는 광경이었다.
소년은 마차가 연무장을 완전히 지나쳐 간 후에야 에키를 돌아보았다.
“누, 누님, 아까 그, 그, 그분은 설마…….”
“기오사 오너,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경이셔.”
“지, 진짜 기오사 오너라고요? 우와, 맙소사, 진짜 기오사 오너를 봤어…….”
란셀리드가 몽롱한 눈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로아즈의 기사들도 반응이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기오사 오너가 보통 사람들한테는 저런 느낌이었지. 전설에서 튀어나온 영웅 같은 느낌.’
에키는 새삼 그것을 자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 둘째 날, 그러니까 내일 오전에 사열식이 있어. 거기서 기오사도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저도 들었어요, 그거! 창천기사단 사열식! 마스터가 수십에, 기, 기, 기오사까지! 제대로 보려면 두 달 전에 광장 근처 여관을 예약해야 한다던데!”
“사관생도 가족은 손님들을 위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누님, 사랑해요!”
[쟤 네가 내 주인인 거 알면 기절하겠네.]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기절할지도 모르지. 기오사는 기오사인데 하필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라니. 에키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