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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07화 (107/211)

검을 든 꽃 107화

유리엔이 겨우 겨우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웃음기가 남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렇게 웃어본 적이 드물다, 에키네시아.”

그 말에 더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유리엔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대의 재능은 탐이 난다. 신이 검의 경지가 무엇인지 인간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대를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나는 솔직히,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다른 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대로 인해 검의 역사가 다시 쓰일 테니까.”

이런 직접적인 찬사를 코앞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숭배에 가까운 말들을, 기사의 정점에 오른 남자로부터 들을 줄은 몰랐다.

회귀 이전에 그녀의 재능은 저주였고, 악몽이었다. 회귀 이후에는 숨기느라 급급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는 말을 대놓고 하긴 했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노골적으로 검의 재능을 인정받는 건 굉장히 다른 느낌이었다.

검도, 자신이 타고난 재능도,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에키로서도 그건 결코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을 더 깊게 처박았다. 그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 재능으로 인해 나는 그대를 알게 되었으며, 그 재능이 그대와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대의 재능 때문이 아니다.”

유리엔은 그녀의 재능에 감사했다.

에키네시아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수많은 마검의 희생자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제국에 의해 토벌되어 그와 그녀는 만나지도 못했을 터다. 그녀가 음모에 말려들고 희생된 이유가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다.

그녀를 살린 건 그녀의 재능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재능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면, 파국으로 치달은 결말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누구도 막지 못할 재앙이 되어 죽음만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회도 두 번째 삶도 없었으리라.

그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기에, 이 모든 순간이 있다.

“그대로 인해 겪게 된 감정들이 내게는 모두 낯설어서,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늪 속에서 홀로 발버둥치는 빛을 보았을 때부터, 그 빛이 눈부신 태양이 된 지금까지.

성검 앞에서 울부짖고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시간을 되돌려 모든 것이 끝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가 나를 움직인다. 내 감정도, 내 욕망도, 내 목표도,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그대로 인해 움직였다.”

그의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가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에키네시아. 그것이 내게 그대의 의미이다.”

에키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 삶을 그녀에게 쥐어 주는 듯한 말을 태연히 읊은 남자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웃는다. 반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흐무러지는 웃음을. 녹아 떨어질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조금 전에 가슴 안쪽에 파고들었던 묵직한 것이 목으로 치받아 올랐다. 말문이 막혔다. 목을 막은 열기는 머리로 전이되어 홧홧하게 타올랐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놓은 적 없던 그녀의 죄악감을.

그것을 꺼내놓아도 저 눈동자는 금이 가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를 보고 있는 지금,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가 직접 지워버린 시간 속에, 오직 유리엔만이 그녀의 승리를 기다려주던 그 시절에, 그녀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속에 쌓으며 버렸었다.

비극을 맞으며 결국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 쥘 수 없는 성검을 바라볼 때마다 그 위로 새로운 말들이 쌓였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며 또 새로운 말들이 쌓였다.

죄책감에 짓눌려 있던 그 말들이 허물어진 공포를 뚫고 솟구쳐 올랐다.

“로드, 저는…….”

그녀가 홀린 듯이 입을 떼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공간을 부수듯 들려왔다.

“스콰이어 바라하 이슬라프입니다. 로드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허물어졌던 것들이 그 소리에 되돌아왔다. 정신이 들었다.

에키는 당황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엔은 잠깐 침묵하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했다.

“잠시 기다려라, 바라하.”

그는 협탁에 놓았던 쟁반을 들어 에키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그녀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직 따뜻한 수프와 폭신한 빵, 약간의 과일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쉬도록. 여기가 불편하다면 기숙사로 돌아가도 된다. 아무리 치료를 받았다지만 몸이 많이 지쳐 있을 테니, 적어도 2~3일은 무리하지 마라.”

딱딱한 말투임에도 한없이 다정하게 들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움직였다.

유리엔이 문 밖으로 나간 후에야 에키는 삐걱거리며 시선을 쟁반으로 돌렸다.

“……어떡하지.”

[왜?]

“믿고 싶어져.”

방금 자신은 그에게 전부 털어놓을 뻔했다.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고 나서, 내게 당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답하고 싶어져서.

정말 그래도 될까. 결코 쥘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들이 손 안에 놓인 기분이었다. 움켜쥐기만 하면 될 것처럼.

늘 따라붙던 공포가 희미해져 간다. 복잡한 상황들과 남은 의문들마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느껴졌다.

에키는 어지러운 눈으로 수프를 내려다보다가 스푼을 들었다.

수프는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했다.

9막. 좋아하는 것과 부정할 수 없는 것.

여름 태양 축제가 다가왔다.

아젠카는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간 이어지는 축제를 기다리며 한껏 달아올랐다.

여관들이 미어터지고 거리에 사람들이 확연히 늘었다. 싱싱한 여름 꽃을 엮은 화환이 태양을 수놓은 색색의 천과 함께 가게마다 내걸렸다.

디아상트 공녀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기사단 내부는 뒤집어졌지만,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축제와 성녀 데뷔는 순조롭게 준비되었다. 각국의 귀빈들이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속속들이 창천기사단에 도착했다.

앨리스와 파티마의 드레스는 일찍이 배달되었다. 같은 의상실에서 같이 주문을 했는데 에키네시아의 드레스만 빠져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가 도착한 건 6월 19일 오후의 일이었다.

“에키, 의상실에서 드레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상자가 두 개로군요.”

앨리스는 훈련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달 중이던 하인과 마주쳐 상자를 받아 왔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며 하는 말에 결절에 대한 책을 쌓아놓고 보고 있던 에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잘못 온 거 아니에요?”

“둘 다 확실히 에키 겁니다.”

앨리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커다란 상자들을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에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아뇨. 당신은 무리하면 안 됩니다.”

그녀는 에키가 상자를 빼앗지 못하도록 높이 들어올렸다. 에키는 기가 막혀서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진작 다 나았다고요. 몇 번을 말해요?”

앨리스는 스콰이어 업무를 하러 나가선 돌아오지 않는 룸메이트를 기다리다가 니콜 시즈튼의 방문을 받았었다.

기숙사를 찾아온 니콜은 에키의 옷장에서 장갑과 옷을 챙기고 에키가 입고 나갔었던 드레스를 두고 갔다. 마음이 급했던 그녀는 에키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덧붙이고 사라졌다.

아침에 보았던 비둘기색 드레스가 주인 없이 피범벅으로 돌아왔다.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도 앨리스는 피가 식는 경험을 했다.

앨리스는 다음날 낮에서야 기사단 본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암살 미수 사건에서 에키네시아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 자리에 있던 준기사들에 의해 기사단 내부에 은근히 소문이 퍼졌다. 독을 먹고 피를 토하면서도 근위기사를 제압한 다음에야 쓰러졌다는 이야기까지.

뒤늦게 기숙사로 돌아온 에키는 창백한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고는 하루 종일 잤다.

그렇게 이틀을 푹 쉰 후엔 멀쩡해졌지만, 그 뒤부터 앨리스는 에키를 유리 조각상 대하듯 하고 있었다.

“당신은 자기 몸을 너무 험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을 뻔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요. 몸을 아끼는 것도 기사의 기본입니다.”

“샤, 아니, 성녀님이 다 치료해 주셨다니까요. 그 뒤로 클럽 모임도 안 나가고 쉬었으니 이젠 괜찮아요.”

앨리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자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을 끼친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피투성이 드레스만 돌아온 것을 본 게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환자 취급을 벗어나지 못할 듯했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자각하는 건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에키는 앨리스와 함께 상자의 포장을 벗겼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상자에는 그녀가 수선을 요청했던 드레스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 보다 큰 상자에는 처음 보는 드레스가 있었다.

“이건…….”

은실과 새끼손톱보다 작은 투명한 보석으로 수를 놓은 연한 보라색의 천 위로 나비 날개처럼 얇은 레이스가 겹겹이 덮여 있었다.

보랏빛은 내려갈수록 짙어져 검푸른 색이 되었다. 그 덕에 반투명한 재질로 풍성하게 주름이 잡힌 드레스의 끝단이 밤바다의 물결처럼 보였다.

은은하고 화려했다.

처음 그 아름다움에 놀라 멍해졌던 에키는, 곧 다른 것에 경악했다. 그녀는 검의 가격보다 드레스의 가격을 더 잘 안다.

천의 재질을 빼놓고도, 수를 놓는 데에 다이아몬드를 사용하고 장인의 작품임에 틀림없는 수제 레이스를 아낌없이 드리운 드레스라니.

[야, 되게 비싸 보인다.]

뭘 모르는 마검도 알아볼 정도였다. 에키는 이 드레스 하나로 로아즈 가문 소속 기사 네 명 정도는 연봉을 챙겨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옆에서 상자를 들여다본 앨리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는 에키와 반대로 검은 알아도 드레스의 가격은 잘 몰랐다.

“굉장하군요…….”

“그, 그러게요……. 여러모로…….”

“에키, 아래에 무언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드레스 아래에 드레스에 맞춘 듯한 검푸른 구두와 레이스 장갑이 있었다. 에키가 그것을 확인하려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데 진주색 봉투가 하나 툭 떨어졌다. 앨리스가 봉투를 주워주었다.

봉투의 겉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열어보니 카드 한 장이 나왔다. 반 듯한 필체로 쓰인 짧은 편지였다.

-에키네시아.

그대가 의상실에 들렀다는 걸 알게 되어, 내 욕심에 주문을 했다. 부디 받아 주었으면 한다.

그 아래에 유리엔의 서명이 있었다. 드레스를 보자마자 어쩐지 그를 떠올리긴 했지만, 정말로 그가 보낸 것일 줄이야.

다른 누군가가 보냈다면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을 텐데, 유리엔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니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보낸 거라면, 갖고 싶었다.

자신이 보낸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보면, 그는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할까. 저절로 떠오른 상상에 뺨이 옅게 달아올랐다.

[뭐야, 네가 의상실에 들린 걸 걔가 어떻게 알아? 수상하다. 너 감시하고 있는 거 아냐? 기분 나쁘니까 가서, 아야! 아!]

“테레사가 나랑 만났다고 말했겠지.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너무해! 아직 죽이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어, 물론 죽이라고 하려던 게 맞긴 하지만…….]

마검이 궁시렁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앨리스가 의아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에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거…… 로드께서 보낸 거네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앨리스는 그녀의 허리에 걸린 아메시스트에 시선을 주었다가, 설핏 웃었다.

“그냥요. 에키, 한번 입어보세요. 돕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그녀는 앨리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사이즈를 재었던 의상실에서 온 덕인지 딱 맞았고,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풍성한 외양과 달리 구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드레스였다. 살랑이는 옷자락을 따라 속에 쌓여 있던, 유리엔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자꾸만 덜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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