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06화
에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밀쳐 내며 뒤로 물러났다. 덮여 있던 얄팍한 이불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턱턱 막히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없다, 기억이 없다. 머릿속이 새카맣다. 설마, 정말로, 살의가 넘쳐서, 또, 그런, 누군가를 죽였다거나, 그를, 공격했다거나, 저 목의 부상이. 어떻게, 된, 나는. 새빨갛고 검고 더러운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속을 헤집었다.
“에키네시아? 왜 그러지?”
유리엔이 당황한 듯 그녀를 불렀다. 에키는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토해내듯 물었다.
“로드, 그 목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아.”
그는 잊고 있었다는 듯 짧게 탄식하더니 옷깃을 잡아당겼다.
에키네시아를 제압하며 입은 대부분의 상처는 신관의 치료를 받았다.
성녀라면 전신의 상처를 한 번에 낫게 할 수 있지만 에키네시아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탈진해 버려서 부탁할 수가 없었다. 중상도 아니고 자잘한 상처라 부탁할 정도도 아니었다.
신관들은 대체로 뛰어난 약초사이거나 치료마법을 중점적으로 익힌 마법사다. 그들도 생채기쯤은 금방 치료할 수 있었다. 상처를 보이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폭발로 인해 날아든 파편에 입은 부상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으니까.
성검에 넘치는 마나를 내던지는 바람에 일어난 두 번째 폭발은 근위기사가 숨겨둔 마도구에 의한 것이라고 꾸며냈었다. 침실에 남았던 검기의 여파도 폭발로 인해 거의 사라져서 전투가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유리엔은 그 정도는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다.
다만 누가 보아도 목이 졸린 게 확실한, 손자국 형태로 남은 시커먼 멍은 변명할 길이 없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창천기사단장의 목을 졸랐느냐는 물음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래서 제복 아래에 감추고 아예 보이질 않았다.
사태가 대강 정리된 뒤, 그는 일부러 기사단 밖에 있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사택으로 에키네시아를 데려왔다. 봉인구와 성검을 이용해 어떻게 가라앉혔다지만, 혹시나 또 살의에 물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녀를 격리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명목은 중상자인 에키네시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사실 성녀가 엘기오사를 사용했기에 부상은 완전히 나았고, 안정을 위해서라면 병동에 개인실도 있고 본부나 기숙사에 빈 방이 많았으니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그럼에도 독이 든 차와 두 번의 폭발, 근위기사의 암살 시도로 난장판인 와중에 스콰이어를 로드가 데려가는 일을, 그것도 그 로드가 성검의 주인인 기사단장인 상황에서 굳이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쌓인 신뢰와 존경은 이럴 때 유용했다.
오자마자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내내 에키네시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녀의 치료를 받았으니 괜찮다는 건 알면서도 걱정이 되어서, 그리고 혹여 살의가 샐까 긴장하느라 하루를 꼬박 새었다.
마검에 물든 그녀를 되돌리기 위해 마나 코어를 있는 대로 혹사한 상태로 그렇게 계속 버텼더니 그로서도 한계가 와서 깜박 졸았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임시로 멍을 가려둔 붕대가 눈에 띌 거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유리엔은 옷깃으로 붕대를 가리며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두 번째 폭발 때 파편이 튀었다.”
“두 번째라니요?”
“그 근위기사가 남겨둔 마도구가 있었다. 그게 공녀의 침실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별것 아니다. 신관의 치료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니.”
거칠어졌던 에키의 호흡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불을 움켜쥔 채, 나직이 그를 불렀다.
“로드.”
유리엔이 대답 대신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부드럽고, 젖어 있는 시선. 원망이나, 증오나, 의혹이나, 경계, 그런 부정적인 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상냥하고 여리고 애틋한, 그런 눈이다.
마검의 주인을 향할 리가 없는 시선.
“제가…… 기절했던 것 같은데, 혹시, 그 뒤에…….”
“그대는 사경을 넘겼다.”
그가 더듬거리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단호하게, 아무것도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잇는다.
“위중한 상태였지. 성녀가 오기까지 나는, 혹 잘못될까 봐 내내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를 계속 보고 계셨다고요?”
“그래. 그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녀가 그대를 치료한 후에도. 그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기절해 있었다. 에키네시아, 오늘은 6월 16일이다.”
말을 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겠군. 잠시만 기다려라.”
유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에키는 하얀 뒷모습이 밖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곤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발. 깨어 있어?”
[어어, 좀 전에 일어났어.]
바르데르기오사가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외면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끄집어내듯이 물었다.
“살의, 넘쳤지?”
[그게, 어, 야, 잘 모르겠다?]
“똑바로 말해.”
[아니, 진짜 애매하단 말이야! 분명히 넘칠 거 같았는데, 야, 네가 정신을 잃으면 나도 잠들잖아. 그래서 확신을 못 하겠어.]
“확신할 방법이 있잖아.”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누적된 살의의 양.”
[……솔직히 그게 너무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분명히 살의가 줄었거든? 대충, 한 열 명쯤 죽인 것처럼. 근데 있잖아, 별로 기분이 안 좋아. 인간을 그 정도 죽였으면 잠들어 있었어도 여파가 남아서 상쾌해야 하는데, 피 맛을 본 느낌이 안 들어. 되게 이상해.]
마검이 하소연을 하듯 투덜거렸다. 열 명쯤 죽인 것 같다는 말에 얼어붙었던 에키는 뒷말을 들으며 간신히 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안 죽인 것 같단 소리지?”
[응. 치이, 왠지 손해 본 느낌이야. 억울해! 이게 얼마만의 기회였는데! 어, 음, 물론 넌 싫었겠지만…….]
“알면 좀 닥쳐, 망할 마검아.”
마검이 살인과 관련된 문제로 오판을 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긴, 정말로 그녀가 열 명쯤 죽여 버렸다면 이렇게 평화롭게 깨어났을 리가 없었다.
‘죽인 것 같지 않은데 누적된 살의가 줄었다고?’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물들었던 건가? 물들지 않았던 건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에키는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래, ‘강조’ 했다.
그녀는 유리엔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주었던 대답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마스터임을 들켰을 때 그의 대응도 떠올려 보았다.
납득할 만한 대답. 아니, ‘납득하고 싶은’ 대답. 그녀가 믿고 싶은 쪽의 대답. 들킬 만한 상황들에서도 절묘하게 들키지 않은 것 같은 설명들. 그대로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되는 말들.
마치,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손아귀에 잡힌 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에키는 시트 위로 흐트러져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믿고 싶은 쪽으로 주어지는 대답들을 그대로 믿은 가장 큰 이유는, 유리엔이 그녀를 증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 점을 밝히고 그녀를 증오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지 않으니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제를 수정해 본다. 만약, 만약에,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가 마검의 주인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다 알면서도, 그녀를 사모한다고 고백까지 한 거라면.
‘말도 안 돼.’
이쪽이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이쪽이야말로 그녀에게 너무 좋은, ‘믿고 싶은’ 설명이 아닌가.
유리엔이 정말로 그녀가 악마였다는 걸 알고도 그녀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좋아하기까지 한다고? 그게 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여겨서 제외했던 가정이다. 최초로, 에키는 그 가정을 전제로 두고 지금까지 유리엔의 행동과 말들을 돌아보았다.
“윽…….”
가슴 안쪽으로 무겁고 뜨거운 것이 쑤욱 들어오는 기분. 뺨과 귀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처음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두근거리던 감정보다 더 깊은 것. 묵직한 무언가가 마음 깊은 곳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에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당신을 죽였잖아.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모조리 파괴했잖아. 그런데도?
웅웅 울리는 머릿속에서 의문들을 되뇌었다.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물음들. 지금까지 항상 같은 대답이 돌아왔었던 물음들.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나를 증오하겠지. 그 변할 수 없던 판단이 바뀐다.
그런 짓을 저지른 나를, 그는 싫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좋아할 수도 있다.
어지럽다. 미친 것 같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머리와 가슴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울고만 싶었다.
문이 열리고, 유리엔이 돌아왔다.
에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소리 없이 우아하게 걷는다. 대신 그릇과 스푼이 쟁반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침대 옆의 낮은 의자에 앉았다. 그릇의 뚜껑을 여는 소리.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직하고 딱딱한, 그럼에도 다정한 부름.
“에키네시아.”
그 발음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한 방울 솟았다.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그 눈물은 흘러 떨어지는 대신 무릎을 덮은 시트 위에 스며들며 번졌다. 에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쟁반을 들고 있던 유리엔이 움찔 놀랐다. 담담하던 얼굴에 당황과 걱정이 퍼져나간다. 그가 급히 물었다.
“아픈 곳이 있나? 어딘가 안 좋으면 참지 말고 말해 다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괜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잠겨 있던 음성에 흠뻑 물기가 묻었다. 유리엔이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더니 허둥지둥 손을 뻗는다.
이마에 차가운 손이 와 닿았다. 열을 재고, 조심스럽게 살피고, 언뜻 시선이 그녀의 오른손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마검의 문양을 얄팍한 장갑으로 덮어 가려둔 곳을, 그가 확인했다.
아. 정말로.
정말 당신은 알고 있나? 그러면서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있나?
왜?
내가, 숨기고 싶어 해서?
결절 안에서 마스터인 것을 들켰을 때 그가 달아나려던 그녀를 붙잡고 했던 말이 이 순간 떠올랐다.
〈숨기고 싶다면, 숨겨주겠다. 원한다면 나 역시 잊어버리도록 노력하마.〉
정말 그 이유로? 그 정도로? 왜 증오하지 않아? 왜 당신은 나를 좋아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기에.
에키는 그의 목을 가린 붕대를 보았다. 그것을 풀어헤치고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손끝이 움찔거렸다. 파편에 긁힌 상처가 아니라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는 대신, 그녀는 시트를 움켜쥐었다.
“로드.”
유리엔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노을이 저물고 어스름이 주위를 점령했다. 어둑한 방 안에서도 그는 은은히 희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빛나는 것처럼 선명했다.
“절 정말로 좋아하세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리엔의 얼굴이 붉어진다. 당황한 듯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고,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느리게 대답한다.
“그래, 진심으로.”
“제가 로드께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라도?”
“내가 그대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기에?”
유리엔이 조금 웃으며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문에 에키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입이 저절로 움직여서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탐나는 천재?”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제가 무슨 대답을 한 건지 깨달은 에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고개를 무릎에 도로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