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05화
봉인구를 쥐고 있던 유리엔의 손이 마검에서 떨어져 자신의 명치께로 향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마나 코어를 명치 근처에 형성한다.
“랑. 너는 증폭과 파마(破魔)의 검이지.”
[뭐?]
“내가 너에게 마나를 불어넣으면, 너는 그 마나를 증폭하고, 증폭된 마나는 악을 처단하는 정의를 받아 들여 파마의 성질을 띠게 되잖나.”
[이 판국에 갑자기 무슨 소리냐?]
“너를 믿겠다.”
마스터는 마석에 저장된 마나를 흡수하는 게 가능하다. 마법검 같은 물건에 마나를 충전하는 것의 반대로 코어를 운용하면 된다. 유리엔은 그대로 새카맣게 물든 봉인구의 마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정신 나간 주인이……!]
유리엔은 마나 코어로 흡수한 마나를 그대로 오른손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눈가와 목덜미, 어깨, 손을 따라 검은 얼룩이 전염병처럼 돋아났다.
성검 위에 검은 빛이 물감처럼 쏟아져 내렸다. 랑기오사의 황금빛 문양이 눈부시게 빛을 뿜어냈다.
도박이었다.
유리엔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검의 기능을 유도하느라 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랑기오사는 입을 다물고 노도처럼 몰려드는 새카만 마나를 그의 유도에 따라 소화했다.
주인의 마나에 파마의 성질을 담는 성검 랑기오사의 힘이 극한까지 발휘되었다. 황금빛이 맹렬하게 흘렀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흐르고, 성검을 뒤덮었던 검은 빛이 점차 하얗게 변화했다. 그의 몸에 돋아났던 검은 얼룩들도 흐려졌다.
[넘친다!]
랑기오사가 짧은 경고를 날렸다. 그 경고 전에 본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밀쳐내고 일어나 백색 마나가 가득 맺힌 성검을 벽을 향해 뿌렸다.
벽이 터져나가며 폭발이 일었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실내를 채웠다.
밀쳐진 에키네시아가 쿨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침을 따라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먼지 속에서 제복을 입은 팔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를 붙잡았다. 유리엔은 버둥거리는 에키네시아의 오른팔을 움켜쥐고 봉인구를 마검 위에 짓눌렀다.
그가 흡수한 덕에 도로 투명해진 보석들이 차오르면서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에서 일렁이던 검은빛이 함께 빠져나갔다.
그녀가 자유로운 한쪽 손과 양발로 자신을 얽어맨 그를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이성이 없는데다 한계인지 마나도 거의 싣지 못해 그저 짐승 같은 발악이었다.
유리엔은 자잘한 상처를 무시하고 봉인구로 마검의 마나를 흡수하는 데에 집중했다. 투명해졌던 마석들 전부가 다시 검게 물들 때쯤, 에키네시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검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그녀의 손 안으로 사라졌다. 늘어진 머리칼은 엷은 분홍빛이었다.
그는 봉인구를 품에 쑤셔 넣고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흐릿한 보라색 눈망울이 허공을 헤집더니 창백한 눈꺼풀에 덮였다.
돌아왔다.
유리엔은 무너지는 그녀를 받쳐 안으며 주저앉았다. 성검이 녹아들듯 그의 손바닥에 있는 문양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하, 살다 보니 정말 별짓을 다 하게 되는군.]
“고생했다, 랑. 고맙군.”
[인사는 됐으니 좀 쉬어야겠다, 나는.]
랑기오사가 투덜거리더니 조용해졌다. 유리엔은 벌건 생채기가 여기저기 남은 손으로 품 안에 늘어진 에키네시아의 입가를 다시 닦았다.
손에 묻어나는 붉은 피가 졸렸던 목과 곳곳의 상처들보다 아팠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을 그러안았다.
그녀가 흘리는 신음을 고통과 함께 삼켜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폭발이 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깥이 소란해졌다. 유리엔은 한 차례 밭은 기침을 토하고 나서야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성녀는 도착했나? 부단장은?”
“네, 두 분 다 막 도착하셨습니다!”
“우선 둘만 들어와라.”
에키네시아를 안고 몸을 일으키던 그는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제 목덜미를 보았다. 목을 졸린 손자국이 뚜렷했다. 유리엔은 옷깃을 올려 그것을 가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 * *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흐른 후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기숙사의 방이 아니었다. 넋을 놓고 천장의 무늬를 보던 그녀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에서 비스듬히 들어온 노을빛이 흰 시트 위에 주홍빛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각형의 끝에, 반짝이는 은빛 실이 흐트러져 있다.
잠시 동안 에키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몇 번 눈을 깜박인 후에야 그녀는 그게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는 것과, 그 머리카락의 주인이 그녀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연달아 깨달았다.
“유…….”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던 이름을 삼켰다. 에키는 침대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데,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였던 것처럼 전신에 힘이 없었다. 그녀는 한쪽 팔을 침대에 짚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유리엔은 낮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얇은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제복이 아닌 그는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키는 몽롱한 머리로 그를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늘어진 은실에 손이 닿기 직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긴 속눈썹이 올라가며 그가 눈을 떴다. 하늘색 눈동자에 주홍빛 노을이 스며 창밖의 하늘과 비슷한 색깔을 띠었다.
상체를 일으킨 유리엔은 제 손아귀에 잡힌 가느다란 손목과,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에키네시아를 번갈아 확인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고 제 얼굴을 문질렀다.
“……로드.”
에키는 그를 불러놓고 헛기침을 했다.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그것을 본 유리엔이 침대 옆의 협탁에 있던 물잔을 집어 내밀었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마셨다.
미지근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어지럽던 머리가 비로소 조금쯤 선명해졌다.
“몸은, 괜찮은가?”
유리엔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 물음에 정신을 잃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에 시선을 두었다. 하얀 비단 장갑이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옷은 가벼운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혀진 상태였다.
누가 갈아입힌 거지. 장갑까지 바뀌었다. 그럼 손바닥의 문양은? 한순간에 혈관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대의 옷은 니콜 시즈튼이 갈아입혔다. 그 마법사는 지금 공녀의 물건 전체를 점검중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유리엔이 빠르게 말했다. 그녀가 뭘 신경 쓰는지 아는 것처럼. 에키는 황망히 그를 돌아보았다.
“니콜, 언니가요?”
“그녀가 자신이 갈아입히겠다고 해서 맡겼다.”
니콜이라면 그녀에게 마검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들켰으리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기절한 그녀를 보고 마검을 들킬까 봐 일부러 나섰을지도 모른다. 유리엔이 저리 태연하게 있는 걸 보면 마검의 문양은 니콜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듯했다.
안도감의 한편에 이질감이 돋았다. 납득 가능한 상황이지만, 너무나 적당해서 묘했다. 그녀가 유리엔을 떠볼 때마다 그가 내어놓는 대답들과 비슷했다. 에키는 장갑을 낀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로드, 제가, 그러니까, 음…….”
“찻잎에 푸누스라 불리는 독이 섞여 있었다. 그대는 그것을 마신 거다. 성녀가 엘기오사로 치료했으니 후유증은 없겠지만, 한동안 정양하는 게 좋겠다.”
유리엔이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음성은 담담했으나 내리깐 눈에는 서늘한 불길이 어렸다. 푸누스는 먹으면 걸음을 떼기도 전에 숨이 끊어진다고 해서 발자국 없는 독이라는 별명이 있는 희귀한 맹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에키네시아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유리엔은 알고 있다. 그녀가 제니스의 경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그의 앞에는 시체가 있었을 거다.
그녀의, 주검이.
그는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공포를 얼음 밑에서 익어가는 분노로 바꾸었다.
독과 마도구의 출처를 알아내고 근위기사들 사이에 숨어 있는 끄나풀을 끌어내기 위해 창천 전체에 비상 사태가 걸렸다. 디아상트 공녀에 대한 경호는 두 배로 엄중해졌다.
물론 굳이 출처를 조사하지 않아도, 유리엔은 그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약혼으로 이루어지는 황태자와 그의 결탁을 두고 볼 수 없는 자들. 2황자 아니면 황제겠지.
다만 독을 준비한 건 의외로 디아상트 공작일 수도 있었다. 그자가 제 딸을 유리엔의 목줄로 예비한 과정을 짚어보면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잘 숨겼다 해도 한 번 결혼한 전적이 있는 여자를 유리엔과 결혼하게 두기는 불안할 터다. 길게 끌었다가 들키면 모든 게 어그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해 들은 디아상트 공작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소용이 다할 때 로잘린을 치울 방안을 마련해 놨을 게 틀림없었다.
독 역시 그 중 한 방안일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귀한 홍차를 같이 마신 유리엔도 치울 수도 있고, 유리엔이 죽지 않아도 로잘린이 죽는다면 그녀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리엔을 추궁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로잘린이 죽지 않으면 목줄로 이용하다가 다른 수단으로 치우면 그만이고, 독이 들켜봤자 다들 2황자 측을 의심할 테니 공작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인 미끼였다.
혹 공녀가 독을 넣었다는 의심을 사도 공작에게는 인질이 있으니 입을 다문 공녀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되겠지. 로잘린의 아비이자 황태자의 장인인 디아상트 공작이 이런 짓을 꾸며서 얻는 이득이 겉으로는 없어 보이니 공작을 의심할 사람도 없을 터였다. 유리엔 역시 로잘린 디아상트의 사연을 듣지 않았다면 공작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독과 달리 확실하게 공녀를 죽일 작정으로 달려든 근위기사의 경우 2황자 측일 확률이 높았다. 근위기사단 자체가 황제 직속이나 다름없는 집단이므로.
어쨌든 아직까지는 전부 가정이다. 어느 쪽이든 뿌리가 명백히 드러나면, 그는 움직일 것이다. 이미 움직일 작정이었으나 이유가 더 늘었다.
유리엔은 형형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키네시아를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물처럼 풀어졌다.
“그대 덕분에 암살 시도를 막았다. 디아상트 공녀가 감사를 표하더군. 창천에서도 공식적인 포상이 있을 거다.”
“아,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할 일이다. 그리고…… 그대의 잘못은 아니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던 유리엔의 말끝이 늘어졌다.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에키가 움찔 굳었다.
“다치거나, 아프거나, 괴로운 모습은.”
그의 손이 그녀의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이 똑바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에키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물기가 어린 눈동자였다. 거리가 가까워져서, 느리게 말을 뱉는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까지 보였다.
“보고 싶지 않다. 정말로, 지금까지도…….”
나는 너무 많이 보았다. 그대의 고통을. 그런데도 내게 얼마나 더 그대의 고통을 보여주려는 건가. 유리엔은 말할 수 없는 뒷말을 숨기고 다른 말을 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조심해 주었으면 한다.”
잦아드는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렸다. 노을을 반쯤 걸친 그가 애원하는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내가 그대의 곁에 있다.〉
불현듯 통증 속에서 와 닿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감싸고 지탱하던 손의 감촉.
뭔가, 물을 것이 많았는데. 지금 무언가 잊고 있는 기분인데. 하지만 다른 모든 것보다 지금 그녀 앞에서 젖은 눈으로 말하는 그에게 답해 주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노을이 물감처럼 번져 덮어버렸다.
“네, 조, 조심할게요, 로…….”
더듬더듬 답하던 에키가 말을 뚝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느슨하고 얇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서, 그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이제야 발견했다.
붕대라니. 목을 다쳤나? 창천기사단장의 목을 다치게 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삐걱거리는 뇌리에 정신을 잃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검이 뭐라고 했더라. 지금 기절하면 살의를 쏟아내게 될 거라고 했던 것 같다. 그녀 역시 그렇게 판단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히 기절했다. 유리엔에게 의지하고 싶어져서, 일순 그런 나약한 마음이 들어서, 통제를 잃어버렸다.
그럼, 그 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