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04화
에키는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사방이 적이면 버티기 쉬운데, 보이는 게 유리엔뿐이니 자꾸만 긴장이 풀리려 했다. 의지하고 싶어져서.
그녀는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욕을 했다.
‘절대 들키면 안 될 사람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정신 차려, 제발.’
머리를 흔들었다. 아메시스트를 쥐려던 손을 놓고 어깨에 힘을 빼다가 덜컥 몸이 요동쳤다. 입 밖으로 또 다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이번엔 죽은피 외에도 붉은 선혈이 섞여 있었다.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다. 독을 버티려고 계속 대량의 마나가 몸을 휘젓고 있는데, 마스터라기엔 단련이 덜 되어 있는 몸이 그것을 버티지 못했다.
그나마도 그녀의 마나 친화력이 정신 나간 수준이라 다치는 정도지, 어지간한 사람이면 몸이 붕괴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검에게 조종당하며 마검의 마나를 억지로 받아들인 인간들이 얼마간 학살을 벌이다가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듯이.
에키가 입을 틀어막는 사이 유리엔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맹수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사람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침대에 무릎을 대고 앉아 물러선 그녀에게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피범벅이 된 에키의 입가를 닦아내며 그가 속삭였다.
“무리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리면 성녀가 올 테니…….”
“유리……엔.”
반쯤 이성이 나간 에키는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유리엔은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눈가의 피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대의 곁에 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듯 지탱했다. 단단하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에키는 그 손길을 느끼며 무심코 생각했다.
아파. 힘들어. 이 손에 기대어도 될까. 기대고 싶어.
[야, 야!]
마검이 경고하듯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버티고 있던 둑에 빈 틈이 생겼다. 아차 하는 순간 이성이 허물어져 내렸다.
에키네시아는 정신을 잃었다.
힘없이 감겼던 눈이 다시 떠졌을 때, 그 눈은 검게 물들어 일렁이고 있었다.
제니스의 경지에 이른 혼이 억누르고 있던 살의가 새어 나왔다.
검게 물든 눈동자를 보자마자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그녀로부터 물러났다. 에키네시아는 그를 뒤쫓지 않았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 위로 드리운 분홍색 머리카락 끝을 타고 진득한 악의처럼 검은 물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유리엔은 비교적 정확하게 에키네시아의 현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본 적이 있었으니까.
지워진 과거, 그녀가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상인의 저택에서 중독되었을 때.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 몸 상태로 상인의 저택에 있던 용병들 전체를 쓸어버리고 기오사까지 찾아냈었다.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도주하자마자 쓰러져 호되게 앓았다.
유리엔은 홀로 사경을 헤매던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통으로 혼절하며 이성을 완전히 잃자 마검이 그녀를 잠식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딱히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았다. 죽일 인간을 찾아 돌아다니지도 않고, 살의로 검게 물든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었다. 이성을 잃은 이유가 치솟은 분노나 살의 때문이 아니라서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조심해라. 그 당시 마검의 주인은 혼자 있었던 탓에 물들었을 때 주위에 인간이 없었잖느냐. 인간인 너를 향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성검이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거리를 벌린 유리엔은 주의 깊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에키네시아는 여전히 가만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검어졌다. 이제 마검의 악마이던 시절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피부까지 물들지는 않았고, 마검을 들고 있지도 않다는 점.
그는 정안을 떠 보았다. 끓어오른 악의가 혼을 뒤덮고 있긴 한데, 예전처럼 늪에 가깝지는 않았다. 악의 들 사이로 태양처럼 타오르는 빛이 선명했다. 뒤덮은 검은 것들의 움직임은 그 탓인지 부글거리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유리엔은 다시 정안을 감고, 조심스럽게 품에 손을 넣었다. 마탑에서 받아 온 결절 정보에 대한 대가 중의 하나가 그 손에 잡혔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계속 지니고 다녔던 게 다행이었다.
그것은 손가락 두께 정도의 금속 사슬이었다. 사슬 사이사이에 투명한 보석이 얽혀 있었고, 빽빽한 마법진이 보석과 사슬 전체에 가득했다.
과거, 마검의 악마였던 그녀를 지하감옥에 가둘 때 썼던 봉인구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마스터급 기사, 혹은 마법사를 벌할 때 쓰는 봉인구는 대상의 마나 코어를 억눌러 마나를 쓰지 못하게 만든다.
유리엔이 마탑에서 받아낸 봉인구는 보통 봉인구와 다른 기능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것. 사슬에 얽혀 있는 투명한 보석들이 마나를 빨아들여 저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침대에서 멀어졌던 그가 도로 침대가로 다가오는데도 에키네시아는 미동도 않고 허공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봉인구를 쥐고 침대에 올라 섰다.
침대가 움푹 파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짐승처럼 소리 없는 움직임.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검은 눈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피에 젖은 드레스에 감싸인 몸이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그 몸이 튀어 오르려 했다.
“……!”
유리엔은 빠른 속도로 반응했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침대에 메다 꽂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목을 그러쥐어 억눌렀다. 바로 그 목에 사슬을 채우려던 그는 일순 굳었다.
지금 그녀는 마나로 독을 억누르고 있다. 이 상태에서 마나를 봉인해 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언뜻 상상한 결과에 공포가 차오르며 피가 식었다.
[뭐 하는 거냐!]
성검이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 억눌린 채로 버둥거리던 그녀가 손에서 마검을 뽑아냈다.
유리엔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마검을 피해 그녀의 위에서 비켜섰다. 물러난 그는 봉인구를 도로 집어넣고 랑기오사를 뽑아 들었다.
[왜 봉인구를 채우지 않…….]
“마나로 독을 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마나를 봉인할 순 없다.”
유리엔은 거칠게 말하고는 성검을 그녀를 향해 겨누었다. 새카만 마검의 마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구체화되어 일렁였다.
저 검은 마나만 따로 봉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봉인구는 일괄적으로 마나의 움직임을 억제할 뿐 그럴 수는 없었다.
곧, 마검을 쥔 검은 머리의 여자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사람 같지 않은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데자뷰. 악몽 같은 기억이 뇌리에 떠올랐다.
동시에 초조한 걱정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의 입가와 목덜미에 아직 남은 핏자국이 보였다. 중독된 몸 상태가 어떨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걱정이 되어 숨이 막힌다.
[그렇다고 네가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느냐!]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일단 해보겠다.”
[뭐, 전에 마탑에서 내게 말했던 그것? 그건 그냥 추측일 뿐이다. 실패하면 어쩌려고? 저 여자를 살리려다 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냥 봉인구를 써라, 제발!]
랑기오사의 제지는 소용이 없었다. 가만히 유리엔을 바라보던 에키네시아가 돌연 움직였다.
그는 새카만 마나를 휘감고 찔러오는 마검을 검기를 덧씌운 성검으로 막았다.
그 순간 성검은 마검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원래 각성한 기오사끼리 닿으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므로.
[망할, 이럴 줄 알았다. 자아가 없어. 살의덩어리 껍데기군.]
성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에키네시아가 이성을 잃었으니 그녀와 혼이 연결되어 있는 마검의 자아도 가라앉은 상태일 게 뻔했다. 마검은 늘 각성상태인 성검과 달리 주인에게 의존하니까.
예상했던 결과라 유리엔은 말없이 검을 받아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난폭한 검격이 몇 차례 오갔다. 여파로 테이블과 화장대가 박살이 나고 벽과 바닥에 금이 갔다. 찢어진 천조각과 쿠션에서 터진 깃털이 허공에 눈처럼 날렸다.
그 와중에 유리엔은 그녀의 검이 각오한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어지간한 마스터를 압도할 실력인 건 여전했지만 제니스다운 실력은 아니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깨를 베어 오는 바르데르기오사를 막는 순간, 에키네시아가 움찔 몸을 떨더니 컥, 하고 또 피를 토해냈다.
주르륵 떨어지는 피가 대부분 선홍색이었다. 독을 무시하고 마나를 줄줄이 뽑아내며 싸워댄 결과였다.
이대로 그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격리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마검에 물든 상태인 그녀를 성녀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에키네시아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치료할 수가 없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던 유리엔은 새빨간 피를 보는 순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녀의 체력이 버텨냈지만, 지금 이대로 두었다간 그녀의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상태라면…… 치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숙주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그녀가 멈칫했다. 역시 그녀의 피를 보고 얼어붙었던 유리엔이 조금 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굳어 있는 그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올라타 마검을 성검으로 짓눌렀다. 에키네시아가 아래에서 발버둥 치더니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큭…….”
마스터는 손아귀 힘으로 인간의 목을 으스러뜨릴 수도 있다. 제니스는 맨손으로 검기를 만들어 아예 베어 버릴 수도 있었다.
유리엔은 목을 죄는 손을 쳐내는 대신 마나로 목을 감싸고 버티며 빈 손을 품에 넣었다. 아까 집어넣었던 봉인구를 도로 꺼내 보석이 있는 부분을 마검에 가져다 댔다.
[그래, 다시 네 추측을 정리해 보자. 바르데르기오사의 살의는 마나로 변환되어 누적된다. 그 마나를 이용해 마검이 주인을 조종하는 거고.]
성검이 초조한 듯 중얼거렸다. 투명하던 보석은 금세 마검의 마나를 흡수하며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 누적된 마나를 뽑아내면, 살의가 누적되어 영향을 미치는 일을 완화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냐는 네 의견도, 일리가 있긴 하다.]
봉인구의 보석들이 급속도로 검게 물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하던 보석들의 반 이상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빛깔이 되었다.
[하지만 마검에 누적된 마나라는 게 고작 그 몇 개의 마석(魔石)으로 흡수가 다 될 리가 없잖느냐. 그것으로 마검의 주인이 정신을 차린다는 보장도 없다! 거기다 살의 어린 마나를 받아들인 그 마석은 어떻게 처리할 작정이냐?]
목을 조르는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의 손을 쳐내는 대신 숨을 멈추고 더 힘주어 마검을 짓눌렀다.
[인간이 그 마나를 받아들였다간 살의에 물든다. 그것을 제어하는 게 쉬웠다면 마검의 주인이 몸을 되찾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필요가 없었겠지! 마검의 마나를 담은 마석이라니, 저주덩어리나 다름없는 것을 어떻게 하려고!]
에키네시아가 몸부림쳤다. 유리엔의 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손톱을 세워 피부를 긁어내렸다.
[마검의 주인이 살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네 손엔 살인마를 만들어내는 마석들만 남는 셈이란 말이다! 그냥 봉인구를 달아라, 독에 안 죽을 수도 있잖나! 듣고 있느냐? 젠장!]
봉인구의 보석들이 거의 다 검게 물들었다. 마지막 보석이 차오를 무렵 에키네시아의 머리카락에서 검은 빛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능성이 보였다.
[주인, 마석을 봐라!]
잔소리를 쏘아대던 성검이 급하게 소리쳤다. 점차 분홍색이 드러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주시하고 있던 유리엔이 눈을 돌려 봉인구를 확인했다.
새카맣게 차오른 보석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나를 저장할 공간은 꽉 찼는데, 봉인구에 새겨진 마나를 흡수하는 마법진은 계속해서 돌아가는 탓이었다.
쩌적, 소리가 나며 보석 하나에 금이 갔다. 유리엔은 호흡을 멈춘 채 금이 간 보석과, 분홍색이 약간 드러난 에키네시아의 머리칼과, 검은 마나를 여전히 줄줄 뽑아대고 있는 마검과, 마검을 짓누른 성검을 번갈아 보았다.
떠돌던 푸른 눈이 에키네시아의 얼굴에 멎었다.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웃던 순간을 상기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