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03화
로잘린은 데운 찻잔에 우려낸 홍차를 따랐다. 진귀한 차에서는 산뜻하면서도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났다.
“아버지는 아무도 믿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급격히 지쳐 보였다.
남편과 딸을 빼앗기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상대가 반기지 않을 것을 뻔히 아는 약혼을 위해 유부녀임을 숨긴 채,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아젠카로 온 사람이었다.
거짓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티 내지 않으며 지냈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간 알게 모르게 공녀를 향했던 질투가 부끄러워졌다. 무어라 말을 얹고 싶어도, 어설픈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에키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공녀가 따라준 레팡산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차라리 빠르게 구출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지금 따님과 남편…… 분……은.”
삼킨 찻물이 목을 타고 내려간 직후, 온몸의 감각이 올올이 곤두섰다.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경지에 오른 혼이 반응했다. 말끝이 허물어져 내렸다.
눈앞에서 로잘린이 찻잔을 들어 올려 입에 대고 있었다. 에키는 빙글 도는 시야와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비릿한 것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 그 찻잔을 쳐냈다.
로잘린의 찻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에키의 장갑에 불그레한 찻물이 핏방울처럼 점점이 튀었다.
로잘린이 어안이 벙벙한 낯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죠?”
“마시지, 마세요, 독이…….”
말하는 순간 입 밖으로 벌건 피가 한 움큼 흘러나왔다. 에키는 입을 틀어막고 마나 코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찻물이 튄 장갑이 새빨갛게 젖어 들어갔다.
[야, 미친, 극독 아니야? 주인아, 괜찮아?]
“으, 아, 꺄아아악!”
피를 토하는 그녀를 본 로잘린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마검이 기겁해서 묻는 말을 덮어버릴 정도로 큰 비명이었다. 우당탕 하는 소음과 함께 문 밖을 지키던 기사들이 뛰어들어 왔다.
“공녀님?”
“무슨 일입니까!”
달려온 기사들을 보자마자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뽑았다. 그리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로잘린을 잡아 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건 직감적인 대응이었다.
코어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마나가 내장을 녹이려 드는 독을 상대로 몸을 보호하며 버티고 있었다. 통증이 상당했지만 참을 만했다. 되레 그 통증이 오직 혼자였던 시절을 되살렸다. 오랜만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에키는 상황을 판단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만한 극독. 어디에? 차. 레팡산 홍차.
공녀가 넣었다기엔 너무 태연히 그녀도 마시려 했다. 차를 타는 와중에 독을 탔을 리는 없다. 에키는 그런 수상한 동작을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찻잔에 독을 바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범인은 디아상트 공녀가 아니다. 오히려 공녀를 노린 독일 것이다.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공녀로서도 잘 먹지 않을 정도로 진귀한 차이니, 이왕이면 그 손님으로 유리엔까지 걸리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꺼낼 때 뉘앙스를 보니 제국에서부터 가져온 느낌이었다. 그러므로 오래 전부터 준비해 둔 덫. 2황자 측일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그 정도로 준비를 한 작자들이 과연 디아상트 공녀에게 딸려 보낸 근위기사들을 가만 내버려뒀을까? 꼭 독을 준비한 자가 아니라도, 기사들 중 다른 자에게 매수되어 계속 틈을 노리던 자가 있다면, 지금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딱 적당한 틈이 아닐까?
과한 의심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의심을 거듭해도 손해가 아니었다.
에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직감을 따라 검을 겨누었다. 독의 여파로 흐릿한 시야에 몰려들어 온 네 명의 기사가 비쳤다.
근위기사 둘과 함께 입구를 지키다 들어온 창천의 준기사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다. 공녀를 잡아당기며 검을 뽑아 든 에키네시아의 모습은 인질을 잡으려는 것처럼 수상했지만, 그녀는 단장의 스콰이어인 데다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면 근위기사 둘 중 하나의 대응은 신속했다. 그 근위기사는 방 안의 풍경을 보자마자 검을 쥐고 에키네시아를 향해 돌진했다.
대비하고 있던 에키는 곧바로 잡고 있던 로잘린을 등 뒤로 돌리며 테이블을 걷어찼다. 근위기사가 날아오는 테이블에 놀라 몸을 틀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근위기사에게 접근하여 그가 몸을 바로잡기 전에 검면으로 목을 후려쳤다.
“커억……!”
폭풍 속에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현기증이 이는 상태였으나 그녀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했다. 다만 힘이 약간 부족했다. 불로 속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솟아서 힘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목을 얻어맞은 근위기사는 기절하지 않고 휘청거리더니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에키는 황급히 그 손목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제압해!”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울컥 피가 토해졌다. 어정쩡하게 굳어 있던 기사들 중 창천의 준기사들이 강한 명령조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하나가 옆에 서 있던 근위기사를 찍어 눌러 제압했고 다른 하나는 에키가 붙든 자를 향해 달려왔다.
피를 토하면서 에키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근위기사가 손목을 잡아 뺐다. 그 손에 얇은 유리판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갈 크기에 반짝이는 붉은 문양이 빽빽했다. 남자는 그것을 공녀 쪽을 향해 냅다 던졌다.
[어, 저거 마도구……!]
에키는 마검이 말하기 전에 이미 깨달았다. 얇은 수정을 갈아 마법진을 새긴 저 물건은 깨지는 순간 새겨진 마법이 발동하는 마도구였다.
쉽게 깨지도록 가공이 되어 있어 전용 케이스에 보관해야 하는 물건. 어딘가에 닿자마자 부서지며 담고 있는 마법을 토해낼 터다. 긍정적인 마법은 결코 아닐 것이다.
행동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작은 유리판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하얀 칼날이 휘둘러지며 마도구를 밀어냈다. 힘 조절에 조금만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부서져버릴 것을, 짧은 찰나에 집중력을 발휘해 밀어 치며 방향을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을 쳐내자마자 에키는 핏기가 가신 채 얼어 있는 로잘린을 밀쳐 넘어뜨리고 그 위를 덮어 눌렀다. 로잘린의 붉은 드레스 위를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칼과 비둘기 색 드레스 자락이 뒤덮었다.
마도구가 쳐내진 방향에 발코니가 있었다. 발코니의 유리창에 닿으며 그것이 깨어졌다. 조각난 마법진에 붉은 마나가 휘몰아쳤다.
콰아앙!
발코니에서 시뻘건 불길이 폭발했다. 엎드린 그들 위로 부서진 유리창과 불티, 파편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사방으로 튕겼다. 기겁한 준기사들이 파편들을 피해 소파 뒤로 몸을 날렸다.
로잘린의 위를 누르고 있던 에키는 그 와중에 눈을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마도구를 던졌던 근위기사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마도구가 하나일까?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마침 옆에 청동으로 된 발코니 손잡이 파편이 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움켜쥐고 그자를 향해 집어 던졌다.
“윽……!”
묵직한 발코니 손잡이는 정확하게 근위기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비틀거리던 근위기사가 쓰러졌다.
몇 분 되지 않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근위기사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에키는 바닥을 짚은 상태로 참았던 피를 토해냈다. 왈칵 쏟아지는 피가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마나 코어가 몸을 지탱하고 독을 버티기 위해 미친 듯이 마나를 뿜어냈다. 근육이 견딜 수 있도록 마나의 양을 조절할 여유가 없어 온몸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어, 야, 주인아, 알지? 지금 정신 놓으면 너…….]
마검이 웅얼거리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죽은피를 토한다는 건 몸 상태가 최악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에키의 아래에 있던 로잘린은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제 드레스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피를 보더니 새파랗게 질려 더듬거렸다.
“로, 로, 로아즈 양, 피, 피, 피가……!”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에키는 입을 다물고 로잘린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발코니에서 일어난 폭발로 방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준기사들이 기절한 근위기사와 넋이 나간 다른 한 명의 근위기사를 붙들어 제압했다.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폭발 덕에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눈치채고 오는 듯했다.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검집에 넣으려다 헛손질을 한 번 했다. 시야가 검게 점멸하고 손에 떨림이 왔다. 간신히 집어넣는데 문을 거의 박살 내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에키네시아!”
흐린 눈에 백색이 들어찼다.
아, 그다. 유리엔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그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그가 왔으니 이제 괜찮겠지. 곤두서서 집중하던 신경에 한 가닥의 안도가 스몄다.
예전보다 단련이 덜 되어 있는 육체는 안도감이 느껴지자 더는 버티지 못했다. 휘청 무너지는 몸을 유리엔이 급히 받아주었다.
[야, 야, 주인아? 기절하면 안 된다? 어, 뭐, 살의 쏟아내면 나야 시원하겠지만, 너 화내는 건 무서우니까…….]
마검의 말이 귓전에서 웅웅대는 소리로만 들렸다. 눈이 가물거려서 에키는 그의 품에 기댄 채로 볼 안쪽 살을 힘껏 깨물었다.
‘이 상태로 정신을 잃어선 안 돼. 살의가…….’
에키네시아의 입가와 앞섶을 흠뻑 적신 피를 본 유리엔의 낯이 이지러졌다.
부상이나 병은 아니다. 그럼 피를 토해낼 만한 일은, 독을 마셨을 경우뿐. 그녀는 중독된 상태인 게 틀림없었다.
“이, 건…….”
누가? 어떻게? 왜? 입안에서 말이 조각났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혀를 깨물더니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성녀를 데려와라! 신관과 의사들도!”
유리엔과 함께 몰려왔던 자들 중 몇이 명령에 반응하여 튀어나갔다. 이어 유리엔은 근위기사들을 제압한 준기사와 희게 질려 있는 로잘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그것들을 지하에 처박아놓고 부단장을 찾아 상황을 보고해라. 그리고 넌, 공녀의 곁에서 떠나지 마라. 공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단장에게 전부 말해 두도록.”
명을 받은 준기사들이 급하게 경례를 붙였다. 로잘린이 덜덜 떨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엔은 가늘게 신음을 흘리는 에키네시아를 안아 올렸다. 급한 대로 가까운 곳에 있는 공녀의 침실로 향하며 그가 말했다.
“모두 나가라. 그리고 성녀가 도착하면, 그녀만 들여보내라.”
소름 끼치도록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자들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놀란 탓에 제대로 걷지 못하던 로잘린까지 준기사에게 이끌려 나가고 나자 박살이 난 방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유리엔은 공녀의 침실 문을 발로 걷어차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안고 있던 그녀를 커다란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옷깃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옷자락을 틀어쥔 그녀의 손 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고통이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유리엔은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신음처럼 이름을 불렀다.
“에키네시아.”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에키는 그의 옷깃을 놓고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음을 흘리며 웅크려 있었던 여자가 순식간에 정련된 자세로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간다.
그는 공중에 손을 띄운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유리엔은 그 색부터 확인했다.
아직 보랏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