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02화 (102/211)

검을 든 꽃 102화

다음날 이른 아침에, 에키는 유리엔의 숙소를 찾았다.

스콰이어는 로드가 일어날 시간쯤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기사들마다 스콰이어에게 시키는 일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일단 기본은 그러했다.

사실 에키는 제대로 된 스콰이어 업무는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스콰이어가 된 직후엔 몸이 좋지 않아서 유리엔이 휴식을 주었고, 그 뒤에는 장기 임무를 떠났으며, 돌아온 후에는 유리엔이 제도에 있었으므로.

유리엔은 기사단 내에 마련된 숙소의 단장용 방에서 머물렀다. 숙소 건물 3층에 있는 가장 큰 방이었다.

3층은 넓고 호화로운 특실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부 기오사 오너들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었다. 현재 창천기사단에서 이 3층을 쓰고 있는 건 단장인 유리엔과 테레사 두 명이었다. 바론은 기혼이라 기사단 밖의 저택에서 살며 야근할 때만 부단장용 숙소를 썼다.

테레사의 방 앞에는 처음 보는 생도가 있었다. 테레사는 스콰이어가 없으니 순위에 따라 차례가 된 임시 스콰이어인 모양이었다.

에키는 그를 지나쳐가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생도는 비둘기색 드레스 차림인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가, 뒤늦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챈 낯으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유리엔의 방 앞에 서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과 하녀가 수레를 밀고 나타났다. 수레에는 살짝 데운 세숫물 대야와 세면도구, 물과 커피가 차려진 쟁반이 있었다.

하녀는 테레사의 방에 들어갔고, 하인은 유리엔의 방으로 오다가 문 앞에 있는 에키를 보고 약간 놀라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

“좋은 아침. 내가 할까?”

“아닙니다, 숙소에서는 저희가 기사님들을 모시는 게 원칙이니까요.”

하인이 정중하게 말하고는 유리엔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에키는 열렸다 닫히는 문을 흘깃 보았다.

솔직히 그녀가 해보고 싶었다. 편히 자고 있는 유리엔이나, 막 일어난 유리엔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함께 임무를 하던 때에도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에키는 무의식적으로 흐트러진 유리엔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정신을 차리려고 마구 고개를 저었다.

[뭐 해? 왜 갑자기 머리를 흔들어?]

“아무것도 아냐.”

[재미없어. 아무도 안 죽일 거면 죽는 거라도 봤으면 좋겠다. 살인 사건 같은 거 안 일어날까?]

“아침부터 진짜……. 입 다물어, 발.”

낮게 쏘아붙이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하인이 수레를 밀고 나오고 곧이어 유리엔이 나타났다.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한 제복 차림이었다. 에키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바라하에게 배운 대로 경례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에키네시아.”

유리엔은 멈춰 서서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문 앞에서 이안 펠레트로가 기다리고 있을 때와는 몹시 다른 기분이었다. 그녀를 마주하는 게 기뻤지만, 그녀가 문 밖에서 서서 그를 기다렸다는 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그녀를 마주할 거라면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쪽이 좋겠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랑기오사가 주인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게 정말로 다행이었다.

“로드?”

“……식사는 했나?”

“아직입니다.”

“함께 들지.”

유리엔은 아침을 샌드위치 등으로 대강 때우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일부러 제대로 요리를 차리도록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는 은근히 그녀가 어떤 음식에 주로 손을 대는지 관찰했다.

식후에는 차가 나왔다. 유리엔은 차를 마시며 말을 꺼냈다.

“에키네시아, 축제 이후에 나는 또 다시 임무를 떠날 예정이다. 그대도 동행하겠는가?”

“로드의 스콰이어니 당연히 수행해야지요.”

“그대가 동행하겠다고 한다면, 그대는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로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

에키가 눈을 깜박였다. 창천기사단엔 마스터가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로서 그녀가 행동해야 한다는 건.

“어떤 임무인가요?”

“극히 비밀리에 구출해 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이 임무는 외부로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원래 홀로 다녀오려 했지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아서.”

찻잔을 들던 에키의 손이 멈칫 굳었다. 그녀는 그대로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제가 당신의 스콰이어라서인가요?”

“스콰이어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하지만 그 외에도, 그대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도 있다.”

그리고 그녀와 되도록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말하기 부끄러운 이유도 있었다. 에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해라니요?”

“디아상트 공녀와의 약혼에 관련된 임무니까. 기다리겠다는 내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앞으로 공표될 약혼이 무슨 의미인지를 그대가 알아 주었으면 한다.”

에키는 유리엔이 위장 약혼이라고 했을 때부터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장 약혼과 관련된 임무에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이 기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말문이 막힌 그녀를 향해 유리엔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대가 임무에 동행하지 않겠다고 해도, 나는 이 임무에 대해 그대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동행하겠습니다, 로드.”

“……고맙다.”

에키가 빠르게 답하자 유리엔이 수줍게 웃었다. 기쁜 듯 눈동자가 반짝이고, 입매가 깊게 파이며, 설렘을 담고 눈꺼풀을 내리까는 그 웃음은 수줍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저 남자는 어째 갈수록 더 예쁘게 웃는 것 같다. 좋아하기 때문에 점점 더 예뻐 보이는 걸까.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에키는 떨림을 감추려 찻잔을 비웠다.

“그럼, 이것을 가지고 로잘린 디아상트 공녀에게 찾아가도록.”

유리엔이 편지 봉투를 꺼내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공녀가 그대에게 임무의 내용을 알려줄 것이다. 오늘 그대의 업무는 공녀로부터 임무를 위한 상세한 정보를 듣고 정리해 오는 것이다. 그대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임무의 계획을 세울 예정이니.”

“알겠습니다, 로드.”

에키가 봉투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유리엔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의 기다림이 길지 않도록 하겠다.”

일어나던 에키의 움직임이 우뚝 굳었다.

어제 그를 기다리겠다고 한 말은 충동의 결과물이었다. 그의 고백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결심은 그와 마주함으로써 지나칠 정도로 간단하게 무너져 버렸다.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가 슬퍼 보이는 얼굴을 했다는 이유로.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새벽까지 뒤척거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은.

“……저도, 대답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감정과 욕심과 희망이 모든 것을 마비시켜 간다. 그 뒤로 떨어지지 않는 공포가 따라붙는다. 에키는 울 것처럼 웃고는 돌아섰다.

* * *

로잘린 디아상트가 머무는 방은 엄중한 경비하에 놓여 있었다.

기사단 본부 건물의 오른쪽 날개 끝에 있는 탑의 6층에 그녀의 방이 있었다. 방으로 가는 복도는 제도에서부터 따라왔던 근위기사 두 명과 창천의 준기사 두 명이 교대로 지켰다.

복도 입구의 방들에는 로잘린의 개인 하녀들과 다른 근위기사들의 숙소가 있었다.

바로 아래층의 방에 머무는 니콜은 공녀의 방 창과 발코니마다 경보 마법을 걸어놓았다. 니콜은 매일 아침마다 마법을 갱신했다.

“특급 범죄자의 감옥 수준이죠. 안 그런가요?”

로잘린은 에키가 방문하자 바로 하녀를 모두 물리고 단둘이 남아 직접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키는 티테이블에 앉은 채 상아로 만든 자그만 티 캐디들을 뒤적거리는 로잘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빨간 머리에 녹색 눈동자는 니콜과 비슷했지만, 같은 색이라 하기엔 미안할 정도로 로잘린 쪽이 강렬했다.

“……좀 많이 엄중하긴 하네요.”

“그런데 엄중할 만하더라고요. 벌써 잡힌 게 여섯 명이래요.”

“암살자가요?”

“암살자도 있고, 첩자도 있었대요. 창천기사단 내부인데 이 정도니 밖에 나가면 아주 짜릿하겠죠? 굉장한 인기인이 된 기분이네요.”

로잘린이 픽 웃더니 안쪽에 있던 티 캐디를 꺼내 들어 올렸다.

“레팡산 홍차, 어떠세요?”

“귀한 차를 가지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특별한 손님을 위해 챙겨 왔거든요. 오늘 처음 여는 거예요.”

“어머, 영광이에요.”

에키는 차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레이디의 교양상 유명하고 비싼 차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로잘린이 언급한 홍차도 그중 하나였다.

로잘린은 물을 끓이고 찻잔과 티포트를 데워놓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에키가 건네준 봉투를 뜯어 짧은 편지를 읽었다. 그녀는 곧 묘한 얼굴이 되어 에키를 바라보았다.

“유리엔 경이 이걸 주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공녀님이 제게 임무의 내용을 알려줄 테니, 공녀님으로부터 임무를 위한 상세 정보를 듣고 정리해 오라고 하셨어요.”

“유리엔 경이 당신을 신뢰하는 건, 순수한 신뢰인가요?”

“네?”

“그분은 당신한테 미쳐 있잖아요. 그러니 그분이야 당연히 당신을 믿겠지만……. 제가 로아즈 양을 믿어도 될까요? 이건 저한테 무척 중요한 문제거든요.”

로잘린 디아상트, 유리엔과 약혼할 예정인 공녀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에키는 허둥지둥 말했다.

“미쳐 있다니요, 그런…….”

“설마 몰랐어요? 그렇게 티가 나는데. 그 분을 앓는 영애들이 봤다간 질투심으로 돌아버릴 정도라고요.”

“아, 아뇨, 몰랐다는 게 아니라, 그, 그 정도는 아닐 거라는 뜻이에요.”

유리엔이 성검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는 걸 코앞에서 들었던 로잘린은 에키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에키를 관찰했다. 에키는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어쨌든…… 저는 유리엔 단장님의 스콰이어예요. 로드를 따르기로 서약했으니, 믿으셔도 돼요.”

로잘린은 스콰이어와 로드가 주고 받는 서약이나 관계에 대해 잘 몰랐다. 그녀는 잘 모르는 그것 대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걸 믿었다.

만약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유리엔에 대해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마음이 있다면, 위장 약혼에 협조할 수밖에 없겠지.

로아즈 가문은 정계와 별로 관련이 없으니 다른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제국 최고의 명문가인 디아상트 공작가 입장에서는 좋게 말해 무해한 가문이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별다른 가치도 야망도 없는 흔해빠진 지방 영주였다.

계산을 끝낸 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로아즈 양, 당신을 믿어 보겠어요.”

“감사합니다, 디아상트 공녀.”

“우선 유리엔 경이 말한 임무란…… 제 남편과 딸을 구해내는 거예요.”

“……네?”

예상조차 못 했던 이야기에 에키는 얼이 빠진 채 되물었다. 로잘린은 유리엔에게 말했던 그녀의 사정을 담담하게 읊었다. 들을수록 에키의 낯이 점차 서늘해졌다.

어느새 물이 끓었다. 로잘린은 티포트에 새로 뜯은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홍차를 우렸다. 그녀가 데운 찻잔을 에키의 앞에 내려놓자 에키가 말을 꺼냈다.

“……디아상트 공작 각하께선, 꽤나…… 비정하신 분이군요.”

[나쁜 놈이네! 아주 아주 나쁜 놈! 이제 그놈 죽이러 가는 거지? 신난다!]

에키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심호흡을 했다.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자제했다.

시간을 되돌렸으니 남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가 아는 건 정말 적을지도 모르겠다. 로잘린 디아상트에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황태자가 황제가 된 뒤에 황후의 가문을 숙청했다고 했었지. 제위에 오르는 데에 도움은 다 받아놓고 이제 쓸모가 없어지니 아내까지 처리한다고 수군거리던 소문을 들었었는데. 공표된 죄목이 뭐였지?’

지워진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좀 관심을 가지고 알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에키는 기오사를 모으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한 귀로 듣고 흘렸었다. 황후의 가문이라고만 들었어서 그게 디아상트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어쨌든 디아상트 공작은 황제가 된 크루엔 황태자에게 숙청되었었다. 황후의 가문을 그냥 폐할 수는 없었을 테니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에키는 그 점만 기억해 두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