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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01화 (101/211)

검을 든 꽃 101화

테레사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열려는 걸 디트리히가 얼른 막았다. 그는 눈을 치켜뜨는 테레사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자, 자, 시범을 봤으니까 테레사 경은 저랑 연습해 보죠.”

“네놈, 아까는 춤을 잘 모른다고 했잖아.”

“모르니까 같이 연습하자고, 연습.”

“은근슬쩍 말 놓지 마라,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

“제가 언제 말 놨습니까, 테레사 경? 저한테서 공손함 빼면 남는 게 없는데요.”

디트리히가 빙글빙글 웃으며 테레사를 끌고 테라스 안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나가며 열렸던 테라스의 문이 달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에키가 붙들린 손을 빼내려 했다. 유리엔은 장갑에 감싸인 그 손을 그제야 놓아 주었다.

파드득 멀어진 에키가 호흡을 골랐다. 어느 정도 차분해진 낯으로 그녀가 말했다.

“로드, 아젠카에는 언제 도착하신 건가요?”

“……오늘 새벽에 돌아왔다. 스콰이어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에키네시아.”

돌아서려는 그녀를 이번에는 그의 부름이 붙들었다. 에키는 그에게 잡혔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색이 없는 그에게서 그녀를 향한 눈만이 쨍하도록 파랬다.

“분명 나는 그대에게 내 마음에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

“그러나…… 한 가지만 답해 줄 수 있겠나?”

“……말씀하세요, 로드.”

유리엔이 고개를 기울였다. 담담하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며 눈매가 내려앉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기다려도 되겠는가?”

“기다린다니, 무엇을…….”

“그대가 내게 대답을 주든, 주지 않든, 나는 기다리고 싶다. 그리해도 되겠는가?”

에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언어에서 드러난 마음의 깊이가 그녀의 생각보다 너무 깊어서. 그녀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제가 기다려도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유리엔이 희미하게 웃었다. 테라스에 가득한 햇살 아래에서 웃고 있는 하얀 남자는 부서질 것처럼 투명해 보였다.

“기다리고 있겠지. 그대가 거부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다만 그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뒷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에키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다시 물었다.

“로드께선 디아상트 공녀와 약혼하셔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절 기다릴 수 있나요?”

유리엔은 여기로 오기 전에 로잘린 디아상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이 순간 위장 약혼에 대해 에키네시아에게 알릴지 말지를 결정했다.

“에키네시아, 그대가 아는지 모르겠으나, 나와 디아상트 공녀 사이의 약혼에는 많은 문제가 얽혀있다.”

“대충은 알아요, 그러니…….”

“그래서 나는 위장 약혼을 할 생각이다.”

“네?”

“축제 마지막 날의 연회에서, 공녀와의 약혼식 날짜를 공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실제 약혼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제도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왔다.”

“그게 무슨…….”

“그러니 아무것도 고려하지 말고 그저 그대의 마음만 알려다오.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위장 약혼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약혼을 제안한 황태자가 그것에 동의했다고? 디아상트 공녀 본인은? 공작가는? 위장이든 뭐든 약혼이긴 하니, 유리엔은 황태자를 지지하는 것이 되나?

‘만약, 마검을 가져다 둔 게 황태자라면…….’

퍼뜩 떠오른 소름끼치는 가정은 일단 한구석에 묻어두었다. 그건 쐐기의 조사 결과를 본 후에 고민할 문제였다.

에키는 니콜로부터 들었던 유리엔을 둘러싼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그 숨 막히는 상황에서, 가짜로 약혼한다고? 대체 어떻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냥 약혼을 하는 쪽이 훨씬 나을 텐데.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까지? 설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왜 위장 약혼을 하기로 하셨죠? 아젠카를 위해서? 창천기사단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니면 로드의 입지 문제라거나, 디아상트 공작가 측과 마찰이…….”

“하기 싫었다.”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는 에키의 말을 그가 짧게 끊어냈다. 에키는 황망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아상트 공녀가 싫으셨나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럼 어째서…….”

“그대가 아니니까.”

반사적으로 대답한 유리엔은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에키는 바로 알아들어 버렸다. 백작 부부가 보낸 전보를 받았을 때 그녀가 한 생각과 비슷했다. 다만 그녀는 그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여겼고, 그는 지금…….

[쟤 지금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너 아니면 결혼 안 한다는 건 그 소리잖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마검이 참지 못하고 핵심을 꿰뚫어 버렸다. 에키는 딸꾹질을 할 뻔했다.

[인간들은 청혼 거창하게 한다던데, 쟤 이상하게 하네. 되게 별로다. 그치? 그냥 죽여버리고, 어, 아니다, 취소, 취소! 나 죽이자고 안 했어! 주인아, 못 들었지? 안 때릴 거지?]

머리가 백지가 되어버린 에키는 떠들어대는 마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물론 유리엔에게 이미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긴 했었다. 그래도 그건 결혼하고 싶다는 말과는 좀 다르지 않는가.

자신이 아니라면 약혼도 하기 싫다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굉장히 어지러웠다.

“그, 그건, 그러니까…….”

잔뜩 당황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야 유리엔은 자신이 한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돌려 말한 청혼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생각도 해본 적 없을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는 황급히 말했다.

“에키네시아, 그저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퍽이나 신경이 안 쓰이겠구나.]

성검이 중얼거렸으나 유리엔은 에키네시아의 반응을 살피느라 들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황망히 물었다.

“그, 저기, 로드, 로드께선 그러니까, 저와의 결혼까지 생각하셨던 건가요?”

유리엔의 얼굴이 삽시간에 탈 듯이 붉어졌다. 그는 그 물음을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위장 약혼을 계획한 게, 정말 저 때문인가요? 저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요?”

“……그대에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다.”

그녀는 붉어진 그를 보았다. 표정은 제법 담담했으나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용이 없었다.

“그 정도로 절……. 왜 그렇게까지…….”

에키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기에 그가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감정을 믿기가 어려웠다.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려워도 위장 약혼으로 인해 분명히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겼을 것이다. 그가 감수해야 할 것도 많을 터다.

차라리 그녀가 그에게 대답을 해주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확신조차 없이 저 모든 부담을 지는 것이다.

‘거절을, 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거절하자. 받아줄 생각도 아니면서 유리엔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하게 거절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결혼을 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쓰린 판단이 섰다.

막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에키를 향해 유리엔이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다가왔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멈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런 것들을 묻는다는 건, 기다려도 된다는 허락인가? 내가…… 그대를 기다려도 되겠는가?”

내리깐 속눈썹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달아오른 열기가 남은 얼굴이었다.

그녀보다 훌쩍 큰 키. 훨씬 넓은 어깨.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거의 그녀를 뒤덮을 정도인데, 그녀에겐 그가 어째서 이토록 연약하게 보이는 건지. 거부의 말을 내뱉었다간 이대로 부서져 버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에키는 입을 떼었다가 다물었다. 기다리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거절의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칼이 되어 그를 벨 것 같아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떤 대답이 저 얼굴에 미소를 깃들게 할지 알고 있다. 그 대답이 곧 그녀의 진심인데도, 그것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따라붙을 것들이 두려워서.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지러워진 속에서 말이 저절로 솟았다.

“로드, 왜 저를 좋아하세요?”

유리엔이 움찔 굳었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으므로.

에키는 솟구치는 의문들을 쏟아냈다.

“언제 저를 좋아하게 되신 건가요? 저와 로드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탄신 연회 때부터 제 재능을 알아차렸다고 하셨죠. 그럼 로드께서 절 좋아하시는 건 검에 대한 저의 재능 때문인가요?”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요?”

“…….”

“대체 제가 로드께 무슨 의미이기에…… 고작 기다리고 싶다는 이유로 그런, 복잡하고 위태로운 짓까지 감수하면서…….”

말끝이 흐트러졌다. 에키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울고 싶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잘 모르겠다. 두근거릴 정도로 기쁘면서 화가 나고 동시에 아릿하게 슬펐다.

“……설명하기가 어렵군. 이미 이렇게 되어버려서.”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키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리엔은 아득하고 눈부신 것을 보듯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솜털을 어루만지듯 가벼운 접촉. 에키는 잠깐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대는 내게…….”

뺨을 쓸고 내려간 손끝에 그녀의 입술이 스쳤다. 그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유리엔은 흠칫 놀라며 손을 떼었다. 허공에 멈춘 손이 천천히 말리며 멀어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에키는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복잡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와 알 수 없는 과거가 그 숨에 밀려나 어딘가에 처박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도 기다릴게요.”

“……?”

“당신에게 제가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가 진심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만약에, 그녀가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의 마음이 깊다면.

“저를 납득시켜 주세요. 그럼 저도…… 대답을 드릴 테니까.”

유리엔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이 또렷했다. 에키네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럼, 내일 아침부터 스콰이어로서 뵙겠습니다, 로드.”

그녀가 돌아서서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유리엔은 그 자리에 서서 연둣빛 정원수들 사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뺨을 만졌던 손을 홀린 듯이 내려다보다가, 그 손을 입가에 얹었다.

“설명이라…….”

그가 얼마나 미쳐 있는지 그녀는 짐작이나 할까. 필사적으로 누르는데도 무심코 손이 움직여 버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그가 무슨 욕망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그녀가 알까.

기다리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얻고 싶어서 자꾸만 옳지 않은 생각이 이성을 침범하는 것을, 그가 아비와 친형을 치고 이복형을 황제로 만들려 하는 이유가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그를 어떻게 볼까.

나직한 한숨이 손끝에 닿았다. 유리엔은 손을 떼고 돌아서서 테라스를 벗어났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계속 돌아가고 있는 미뉴에트 음만이 빈 테라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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