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00화 (100/211)

검을 든 꽃 100화

아젠카 대신전 내에는 귀빈들을 위한 별저가 몇 채 있었다. 대신전에서는 그중 한 곳을 손보아 성녀를 위한 저택으로 만들었다.

엄선하여 뽑힌 하녀들이 저택을 관리했고 각 분야에 능한 신관들이 성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수석 신관 아론이 성녀를 직속으로 보좌했다.

6월 14일, 에키네시아는 바로 그 저택에 딸린 테라스에서 샤이와 테레사를 함께 만났다.

다행히 샤이의 드레스는 멀쩡하게 예쁜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행이지 않은 점은 신관들이 성녀에게 춤을 가르칠 선생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이자 성녀라는 신분의 샤이가 춤을 많이 출 일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도회에 참석하면서 전혀 춤을 모르는 건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샤이는 이번 무도회가 데뷔 무도회지 않는가. 보통 영애들의 사교계 데뷔와는 많이 다른 의미긴 해도. 데뷔탕트면 서두에 한 곡 정도를 추는 건 기본이었다.

에키가 그 점을 묻자 아론은 당연히 샤프롱인 테레사가 샤이에게 춤을 가르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테레사는 남성용 스텝밖에 몰랐고 춤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키는 샤이와 테레사를 함께 만나기로 했다. 테레사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겸 샤이에게도 같이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에키는 티테이블에 앉은 샤이를 바라보았다.

깡마르고 초췌했던 솔 족 소녀는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안색이 훨씬 나아졌다. 거미줄 뭉치 같던 회색 머리카락이 레이스 리본으로 곱게 땋아 내려져 있었다.

“샤이는 벌써부터 많은 걸 배울 필요는 없어. 가장 대표적인 중부식 왈츠 스텝 하나만 익히자.”

“네, 언니.”

샤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시작한 소녀는 호기심이 많았고 배움 자체에 열성적이었다. 에키는 눈을 반짝이는 소녀를 향해 웃어주고 테레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테레사 경은 3대 왈츠와 함께 폭스트롯까지 해봐요. 시간이 남으면 제국식 미뉴에트도 하고요.”

“알겠다.”

에키는 꽤 춤을 잘 추는 편이었다. 동체시력이나 동작을 금방 따라하는 것, 본능적으로 신체를 잘 다루는 게 곧 검술 재능과 맞닿아 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테레사 역시 춤을 익히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리듬감은 약간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마스터쯤 되는 기사가 몸치일 리는 없으니 기본 이상을 할 토대는 마련된 셈이다.

테라스에는 하녀들이 준비해 둔 축음기와 음악판 상자가 있었다. 커다란 황동나팔관에 고어로 신을 찬미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신전에서 쓰던 것을 빌려온 모양이었다.

에키는 상자에 가득한 성가 음악판들 사이에서 무도회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왈츠곡을 찾아내 축음기에 올렸다.

바늘이 돌아가며 3박자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악단이 직접 연주하는 것에 비하면 작고 잡음도 섞여 있지만, 춤을 연습하기엔 충분했다.

“우선 왈츠를 보여줄게, 샤이.”

오늘 그녀는 연한 분홍색에 짙은 갈색의 레이스와 흰 프릴을 단 드레스에, 초콜릿색 리본으로 머리카락의 일부를 땋아 올린 차림이었다.

에키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테레사를 향해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테레사 경?”

창천 제복 차림의 테레사가 눈을 깜박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기꺼이.”

테레사가 에키의 손을 잡았다.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악 속에서, 그녀는 테레사와 함께 왈츠를 추었다. 샤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분홍빛 여자와 긴 금발의 여기사가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도는 모습은 동화책 속에서 튀어나온 듯이 예뻤다.

음악이 끝났다. 마주 선 에키와 테레사가 인사를 하자 샤이가 박수를 쳤다. 소녀는 상기된 볼로 재잘거렸다.

“이게 왈츠예요? 너무 예뻐요, 멋지고, 노래도 좋고, 또…… 아무튼 정말 정말 예뻐요!”

“이번엔 샤이도 해보자. 내가 옆에서 가르쳐줄게. 테레사 경, 부탁해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샤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에키를 한 번 돌아보고는 테레사의 손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올렸다.

에키가 음악판을 다시 올렸다. 아까와 같은 왈츠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무도회에 참석하면 늘 남성의 역할을 했던 테레사는 익숙하게 샤이를 리드했다.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중간 중간 에키가 음악을 멈추고 샤이에게 자세와 스텝을 알려주었다. 중부식 왈츠는 가장 기본적인 춤인 만큼 간단하고 쉬워서 샤이는 금세 왈츠에 익숙해졌다.

왈츠를 어느 정도 익힌 샤이는 다른 것도 배워보고 싶어 했지만, 데뷔를 앞둔 성녀의 일정은 빡빡했다. 특히 글을 익히는 게 급했다. 결국 다음에 다른 춤도 배우기로 하고, 샤이는 글자 수업을 위해 떠났다.

테레사는 남아서 에키의 도움으로 중부식 왈츠 외의 왈츠들과 폭스트롯을 익혔다. 역시나 테레사는 빠르게 배웠다. 남성용 스텝을 아는 상태라 더 쉬웠다.

시간이 남아서 제국식 미뉴에트를 하려던 에키는 약간 난감해졌다. 앙투아르 출신인 테레사는 제국식 미뉴에트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원래 미뉴에트는 손을 잡는 것 외에는 파트너끼리 접촉이 거의 없지만요, 제국식 미뉴에트는 조금 달라요. 떨어졌다가 맞잡을 때의 자세가 특징이거든요.”

“왈츠처럼?”

“아뇨, 왈츠와도 달라요. 음, 한 번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상대가 없어서…….”

“상대라면 여기 있지. 난 춤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우리 단장님은 다르니까.”

넉살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트리히 사루아가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엔이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잡아 끌려 나왔다. 디트리히를 본 테레사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디트리히, 네놈 또…….”

“찌푸리면 고운 얼굴 망가져, 테레사.”

“예를 지켜라,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

“알겠습니다, 테레사 경. 아르 세밧티엠.”

디트리히가 빙글거리며 장난스럽게 아젠카식 경례를 했다. 테레사는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에키는 유리엔을 보자마자 굳어버렸다.

제도에서 언제 돌아온 거지? 아직, 그를 다시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서랍 구석에 처박아놓은 전보와 기사단 본부에 머무는 디아상트 공녀,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채 자신을 내려다보던 유리엔의 얼굴이 빠르게 뇌리를 점령했다. 에키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리엔은 바짝 긴장한 에키를 바라보았다. 임무 동안에 꽤 익숙해져서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다시 그를 피하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공녀와의 식사 이후 남은 일을 처리하다가, 잠시 휴식을 위해 산책을 나왔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대신전을 향해 걸었다. 오늘 에키네시아가 테레사와 함께 성녀를 방문한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느냐는 성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대신전으로 가던 그는 비슷한 목적의 디트리히와 마주쳤다. 바로 자리를 피하려던 유리엔은 디트리히에게 질질 끌려 여기까지 왔다.

디트리히는 결절 사건 때 유리엔의 마음을 눈치챈 상태였다. 그래서 테라스로 다가가는 와중에 에키네시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끼어들며 유리엔을 밀어 넣었다.

유리엔이 은근히 노려보자 디트리히가 그의 옆구리를 한 대 치며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 피하면 등신이다, 율.”

디트리히는 그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친구의 약혼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도 안중에 없었다.

‘그런 건 어차피 율 저 뻣뻣한 새끼가 알아서 죽어라고 고민하고 있겠지.’

그러니 디트리히가 저 신중한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앞뒤 안 가리고 떠밀어 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유리엔은 잠깐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떨리는 속내를 숨기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예전처럼 그를 불편해하는 듯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것은, 그녀가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과…….

“제국식 미뉴에트라면 잘 알고 있다. 상대가 필요한가?”

유리엔 자신의 마음가짐이 바뀌었다는 것.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틀어놓은 축음기에서 나오는 우아한 미뉴에트의 멜로디가 허공을 채우고 있었다.

에키는 멍하니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그의 손을 응시했다. 언젠가 꿨던 꿈이 언뜻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색이 가득한 연회장에서 누군가와 춤을 추는 꿈. 흐릿해서 구별이 잘 가지 않았으나 그 상대방은 온통 희었다. 무의식적으로 품었던 소망.

귓가에 파고드는 피아노의 선율, 그 위에 얹어진 현악기의 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플루트의 소리, 그리고 테라스의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도움 감사합니다, 로드.”

제국식 미뉴에트는 남성의 손 위에 여성의 손을 손가락만 겹칠 정도로 살짝 얹은 채 나란히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박자에 맞추어 서서히 서로에게서 멀어지며, 멀어지는 와중에도 파트너를 바라보아야 한다.

음악의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원을 따라 밟듯이 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그 움직임에 의해 천천히 휘돌았다. 그의 흘러내린 은발이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원칙. 보라색 눈동자와 하늘색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서로를 향해 걷는 것처럼 보여도, 원을 그리고 있기에 바로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원은 사실 나선이므로 스텝을 밟을수록 조금씩 가까워진다.

가까워져도 닿지 않는다. 첫 접촉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다시 멀어졌다가, 다시 원을 그리며 가까워져서, 두 번째 접촉에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꽉 잡아서는 안 된다. 그런 무례를 범했다간 파트너가 달아나 버릴지도 모르므로.

손가락을 살짝 얽고, 초대하듯이 잡아당기며 맞잡아서, 그녀는 그의 어깨에, 그는 그녀의 허리에 다른 한 손을 얹었다.

두 번의 원을 그린 후에야 닿은 남녀는 4분의 3박자의 음에 맞추어 함께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느리고 반복적인 미뉴에트의 음이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축음기라 매끄럽지 않은 게 되레 더 혼란스러운 감정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에 닿은 그녀의 손끝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옷감의 실이 올올이 느껴질 것처럼. 그가 손을 대고 있는 그녀의 허리가 긴장했다. 코르셋과 드레스 위로 이루어진 접촉인데도 그 아래의 피부가 팽팽해졌다.

입 밖으로 흐트러진 숨과 함께 심장이 튀어나오려 해서 에키는 시선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제국식 미뉴에트에서는 떨어졌다 붙는 것을 반복할지라도 눈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똑바로 내려다보는 피할 수 없는 푸른 눈동자. 철문 너머에서 바라보던 것처럼. 그리고 닿아 있는 손.

지금까지는 정석 그대로의 우아한 제국식 미뉴에트였다. 원래라면 다시 조금씩 멀어진 후에 춤이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에키는 결국 시선을 돌려버렸다. 제국식 미뉴에트의 기본을 어기고 그녀는 정원 쪽으로 시선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자, 잠시만 쉬었다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정원으로 향하려는 그녀의 손이 붙잡혔다. 예의 바르게 얽혀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멀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은 채, 유리엔은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었다.

고개를 튼 그녀의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림자를 드리운 피부가 눈부시게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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