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9화
유리엔은 6월 14일 새벽에 아젠카로 귀환했다. 중간에 마탑에 들려 결절에 관해 논하고 대가를 받아내느라 예정보다 귀환이 늦었다.
그는 짧게 휴식을 취하고 나서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 각종 서류들을 처리했다. 집무실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본 그에게 아침을 가져다준 하인은 단장 직속 정보원이었다.
유리엔은 식사를 하며 그로부터 그간 에키네시아의 행적을 대강 들었다. 창천기사단과 아젠카 시내 곳곳에 있는 사용인이나 시민으로 활동하는 정보원들이 목격한 것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테레사 경과 오늘 만난다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이건 전에 명하셨던 ‘쐐기’ 조사의 결과입니다. 첫 장에 긴급하게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 우선 참고해 주십시오.”
“알았다. 돌아가서 쉬도록.”
“아르 세밧티엠.”
정보원은 책자에 가까울 정도로 두꺼운 서류를 놓고 빈 그릇들을 챙겨 물러났다. 쐐기에 의뢰를 할 때부터 시켰던 조직에 대한 조사가 이제 끝난 모양이었다.
유리엔은 그것을 집어 들기 전에 잠시 차를 마시며 멍하니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되는데, 좀 참아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기에?”
[마검의 주인이 의상실에 다녀갔다는 보고 때문에, 그 여자에게 드레스를 맞춰주려는 것 아니냐? 뻔하지.]
“……좋은 생각이다, 랑. 고맙군.”
[뭐? ……이런.]
유리엔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에키네시아가 다녀갔다는 그 의상실에 보내는 편지였다. 이런 촉박한 기간에 드레스를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돈으로 안 되는 건 드문 법이다.
랑기오사는 괜히 말을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 떨떠름해졌다.
[아니, 잠깐만,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
유리엔이 침묵했다. 편지를 마무리 하고 하인을 불러 배달시키는 동안 성검은 대답을 독촉했고, 그는 하인을 내보낸 후에야 작게 대꾸했다.
“별 생각 아니었다.”
[대체 뭔데 내게 숨기느냐.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흘 넘게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당장 찾아가고 싶은 감정과 급한 일부터 처리하라는 이성이 싸웠다. 정확히는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감정을 이성이 간신히 제어하고 있는 꼴이었다.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유리엔은 입을 다물고 정보원이 두고 간 서류를 펼쳤다. 첫 장에 접혀 있는 쪽지가 있었다. 정보원이 말했던 막 들어온 정보인 듯했다. 무심히 그것을 펼쳐보던 그의 눈이 커졌다.
[마검의 주인이 움직였군.]
쐐기 주위에 잠복하던 정보원이 후드 차림의 여자가 방문했다 떠나는 것을 목격했으며, 미행은 실패했으나 정황상 바로 귀환하지 않고 올라바트에 들렀던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임이 거의 확실하다는 소견이었다.
‘에키네시아가 쐐기에 들릴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마검의 출처를 찾고 있는 것일 터다. 왜? 복수하기 위해? 그녀는 어디까지 알아냈을까. 마검이 황실로부터 나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걸 알게 되면, 황족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가 엄습했다.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들의 형제이자 아들이라. 혐오스럽겠군. 게다가 실상은 내가…… 그녀가 선택된 원인이니.’
순간적으로 그녀의 의뢰를 방해하고 싶어졌다. 에키네시아가 그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절대 그녀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그녀가 견딜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밝히고 사죄하려던 마음 위에, 이기심과 욕망이 침범하려 했다.
‘미치다 못해 추해지려는가, 나는.’
유리엔은 마른세수를 하고 그 종이를 구겨버렸다. 그리고 새 명령서를 썼다. 에키네시아가 쐐기에 뭘 의뢰했는지 알아내라는 명이었다. 우선은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쐐기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한 뒤 밀린 서류를 좀 더 처리하고 나니 점심 무렵이었다. 유리엔은 점심 약속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의 상대는 로잘린 디아상트였다.
식사는 기사단 본부에 있는 귀빈용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예전, 에키네시아에게 공녀가 찾아갔을 때 마주친 이후로 근 3주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전채요리와 주요리가 나오는 동안 의례적인 인사만이 오갔다. 그러다 공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본론은 식후에 논하는 게 예의라지만, 궁금해져서 조금 실례할게요. 전, 아니, 유리엔 경, 결정을 내리셨나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유리엔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로잘린 디아상트를 향해 그가 물었다.
“그대가 도착하던 날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한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대가를 준다면 약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었지.”
“……정말 거절하시려고요?”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엿보았던 그 때, 로잘린은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었다. 그래도 그게 정말로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약혼식 날짜가 발표될 거고, 공개적으로 그대는 내 약혼녀가 될 터다. 약혼식 전까지는 예비 약혼녀겠지만. 그러나 실제 약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약혼하는 척만 하겠다고요? 그게 가능할 리가…….”
“황태자 전하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그대만 동의하면 된다.”
로잘린은 얼이 빠졌다. 대체 무슨 수로 황태자를 설득한 건지. 그녀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설득하셨다고 해도, 제 아버지께선 납득하지 못하실 텐데요. 아시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협조를 대가로 무엇을 원하나, 공녀?”
황태자의 장인이자 로잘린의 아비인 디아상트 공작은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작은 2황자보다도 유리엔을 더 경계했다.
지독히 경계하고 있기에 그는 유리엔에게 로잘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공작은 로잘린이 결혼을 하더라도 유리엔의 목줄이자 감시자 역할을 철저히 해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딸이라서 믿는 게 아니었다. 디아상트 공작은 로잘린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로잘린은 길게 침묵했다. 정말로 3황자가, 창천기사단장이 그녀에게 약혼을 거절할 테니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희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제 아버지께는 알리지 않은 건가요?”
“그대와의 협상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럼, 경이 위장 약혼을 하려 한다는 건 황태자 전하께서만 알고 있나요?”
“그렇다. 알려지면 효과가 없는 일이니까. 위장 약혼이라는 건……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게 될 것이다.”
말 사이에 있었던 간격은 에키네시아였다. 그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이 약혼이 가짜임을 가장 알리고 싶은 것이 그녀다.
그러나 진실이 어찌됐든 겉으로는 약혼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런 말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황제를 갈아치울 계획이라는 건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계획의 핵심이 마검 사건이므로.
어디까지 말할지도 문제였고, 그녀가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 빠르게 모든 걸 해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유리엔은 아직 이 문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침묵하던 로잘린이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가득 차 있던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도수가 낮은 식사용이라지만, 지금은 약간이라도 술기운이 필요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는 알리지 마세요.”
“왜지?”
“유리엔 경. 경의 모든 계획에 협조하겠어요. 위장 약혼이든, 뭐든. 그러니 대가로 저를 도와주세요.”
“……무슨 도움을 원하나?”
“경은 성검의 주인이죠. 그러니 믿고 말하겠어요.”
테이블 아래에서 로잘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엔의 낯은 고요했다. 그녀는 그 담담한 얼굴에 의지하여 하얗게 질린 채 말했다.
“경제게는 딸과 남편이 있어요.”
[……저게 무슨 소리냐?]
성검이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유리엔 역시 상당히 놀랐다. 로잘린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 남편은 제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예요. 평민이죠. 저는 그와 예전부터 사랑하던 사이였고,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아버지는 격노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냈어요.”
“디아상트 공작이 그대가 평민과 결혼하는 걸 허락했다고?”
“정확히는 허락이라기보다 포기였죠.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와 함께 수도를 떠났고, 은밀히 식을 올리고 조용히 살았어요.”
말이야 간단하지만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쓰게 웃었다.
“그때는…… 행복했죠, 정말로. 그와 저 사이에서 딸도 태어났어요. 그 행복은 1년도 가지 못했지만요. 처음부터 아버지는 절 놓아주실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제가 초라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리라고 여기신 거죠.”
“하지만 그대는 돌아가지 않았군.”
“네, 아버지의 오산이었죠. 저는 제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거든요.”
비록 공작의 딸로서 호화롭게 살던 때의 생활에 미치지 못해도, 그녀는 충분히 잘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착실하게 세웠었다. 이제 와서는 전부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결국 전 아버지의 기사들에게 끌려왔고, 제 남편과 돌도 되지 않은 딸은 지금도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어요. 그게 작년의 일이에요. 외부에는 제가 그저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을 떠났다 돌아온 걸로 알려졌죠.”
로잘린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끌려온 후에야 왜 아버지가 절 필요로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유리엔 경, 당신에게 보낼 여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내게 보낼 여자가 그대여야만 할 필요가 있었던 건가?”
“제가 최선이었죠. 당신과 결혼하면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여자. 언제든 당신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고, 아버지를 절대 배신할 수 없는 여자. 그렇잖아요? 제겐 인질이 있으니까.”
“설마, 그대와 그대의 남편을 일단 놓아주었던 것도 공작의 안배였나?”
“글쎄요. 그 정도까지 비정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로잘린이 입매를 비틀었다.
“다만 확실한 건, 황태자 전하께선 경을 믿을지라도, 아버지는 경을 절대 믿지 못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를 당신의 목줄로 고른 거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성검이 머릿속에서 기가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유리엔의 맞은편에서 로잘린의 얼굴이 울컥 차오르는 것을 삼키듯 일그러졌다.
“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한, 딸과 남편은 무사할 거라고 했으니까. 말을 잘 들으면 딸아이나 그이를, 가끔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그녀는 가볍게 헐떡인 다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녀가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경, 뭐든 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게 남편과 딸을 돌려주세요.”
유리엔은 신음을 삼켰다. 어째서 약혼녀로서 보내진 로잘린 디아상트가 처음부터 약혼을 깨었으면 좋겠다는 투로 말을 하고, 대가를 요구하겠다고 했었는지 알겠다.
조용히 기다리면서도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에 대해 알아보며 유리엔을 떠보고, 그러면서도 굳이 에키네시아를 만나려 들지는 않은 이유도.
공녀는 희망을 찾고 있었던 거다. 유리엔이 약혼을 거부함으로써 그녀의 가족을 되찾을 가능성을.
유리엔은 확고한 목소리로 공녀에게 답해 주었다.
“그대의 남편과 딸을 구해내고,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창천기사단장이자 아젠카의 군주로서 맹세하지.”
로잘린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울음기가 묻어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유리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