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8화
“그게 사실인 걸요.”
테레사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녀는 꾹 입술을 다문 채 에키를 노려보았다. 무형의 기운이 짓눌러 왔다. 에키는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긴 침묵이 흐른 끝에 테레사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짓누르던 기운도 흐트러져 사라졌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군. 하긴, 그 기술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면 그걸 미하일에게 가르쳐주고 내게 써보라고 조언하지는 않았겠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야. 그래도…….”
테레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샘플 책의 펼쳐진 페이지 위에 번호를 쓴 종이를 올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네 덕분에, 그 애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검을 가다듬어야 할지 확실히 알았어. 그 점은 감사한다. 이 일은 언젠가 확실히 보답하지.”
“아뇨, 그러실 필요까지는…….”
에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샘플책과 번호가 쓰인 종이를 흘긋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했다.
‘저, 저, 저게 뭐야. 설마 테레사 경이 입으려고 고른 건 아니겠지?’
“……저, 테레사 경. 그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찾으신 건가요? 의상실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널 찾으러 온 건 아니고……. 태양 축제의 연회 때, 내가 성녀의 샤프롱을 맡게 되어서 드레스를 맞추러 왔다. 그러다 마침 네가 보여서 불렀지. 안 그래도 드레스를 주문한 다음 너를 만나볼 생각이었으니까.”
테레사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성녀의 샤프롱? 샤이의 샤프롱이 테레사라고? 에키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샤, 아니, 성녀님의 샤프롱이 되셨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 소녀가 너를 잘 따른다지. 대신전은 차라리 네게 샤프롱을 맡길 것이지, 왜 내게……. 아, 하긴 샤프롱을 하기에는 네가 너무 어린가.”
테레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키는 대강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했다.
‘성녀’의 샤프롱이다. 아무나 뽑을 순 없고, 그렇다고 여신관에게 샤프롱을 맡길 수도 없으니, 창천기사단에서 신분이 높은 여성 순으로 꼽아 봤겠지. 딱 걸린 것이 기오사 오너이자 남부 앙투아르 왕국 귀족 출신인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였을 것이다.
“나이 이전에 저는 성녀님의 샤프롱이 되기에는 신분이 부족하죠. 고작 스콰이어인 걸요.”
에키는 대강 대꾸하며 눈을 굴려 다시 펼쳐진 샘플책 페이지를 확인했다.
종이에 쓰인 번호, 21번. 샘플책에 보이는 21번 드레스는 프릴이 한가득 달리고 어깨를 한껏 부풀린 귀여운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저……. 테레사 경.”
“응?”
“그……. 고르신다는 드레스가, 경이 입으실 건가요?”
“그렇다만.”
테레사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심각한 얼굴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로일까?”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귀여운 스타일이 안 어울리는 건 둘째치고, 어깨가 넓은 편인 테레사가 부풀린 어깨에 프릴까지 주렁주렁한 저런 드레스를 입었다간 어떤 꼴이 될지 눈에 선했다.
심지어 색도 테레사에게는 절대 안 어울릴 샛노란 개나리색이었다. 이건 아까 파티마가 고른 것보다 더했다.
‘아냐. 저건 절대 아냐. 세상에, 진짜 다 검술 바보들이야…….’
“예쁜 드레스지만, 테레사 경의 분위기와는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그럼 이건?”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말했던 에키는 테레사가 넘겨서 보여준 다른 페이지를 보고 기함했다.
목 주위에 프릴을 가득 두르고 커다란 리본이 달린 꽃무늬 드레스.
드레스 자체는 귀엽고 예뻤다. 입을 사람이 테레사인 게 문제일 뿐이지.
“그, 그것도 조금…….”
에키가 고개를 젓자 테레사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순간 에키는 더는 참지 못했다.
“그건 절대 안 돼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테레사가 깜짝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에키는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 테레사 경. 그간 연회에 참석할 때 치장을 어떻게 하셨어요?”
“제복을 입었는데.”
“……개인 하녀는 없으세요? 기사는 얼마든지 개인 하녀를 둘 수 있잖아요?”
“숙소에 사용인들이 있는데, 굳이 개인 하녀를 들일 필요를 못 느꼈다.”
“……아젠카에 오기 전에는 드레스를 입어보셨죠?”
“어릴 때는 입었지만……. 본격적으로 검을 잡게 되면서는 잘 입지 않았지.”
“사교장에 나가본 적은요? 티파티라든가, 무도회라든가.”
“검을 익히기에도 바빠서.”
“저,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요, 춤은 출 줄 아시죠?”
“……남성용 스텝이라면.”
앨리스 윈터벨이었다. 아니, 앨리스에게 비교하기도 실례였다. 적어도 앨리스는 아젠카에 오기 전에 티파티나 무도회는 다녀봤다고 했었다. 춤도 여성용으로 익혔고.
에키는 두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대신전 일처리는 대체 왜 이따위인가. 샤이한테 어린애에 대해 잘 모르는 신관을 보내더니 샤프롱으로는 남성용 춤밖에 모르는 여기사라니.
하나같이 직위가 높고 엘리트인 사람들이니 나름 신경 쓴 인사이긴 한데, 아주 일관적으로 센스가 없었다.
테레사는 에키가 뒷목을 잡는 사이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테레사도 사관학교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마물 토벌 때 직접 봤고 기사단 내에서 지나가다 본 적도 있었다.
에키네시아에 대해서, 사관생도가 드레스 차림이라며 무어라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안 어울린다는 사람은 없었다. 테레사가 보기에도 에키네시아는 볼 때마다 화사하게 예뻤다.
테레사 주위에 있는 여기사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드레스니 사교계니 하는 쪽에는 약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마나 친화력이 평균적으로 높았지만, 그래도 신체적 불리함을 딛고 창천의 기사가 될 정도면 검술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물론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풍토 탓도 있었다. 기사의 세계는 남성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었으므로.
그러니까 결국, 테레사에게는 이런 문제를 상담할 사람이 주위에 딱히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에키네시아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에키네시아 생도, 혹시 내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추천해 줄 수 있나? 도와준다면 내가…….”
“할게요. 아니, 하게 해주세요.”
에키가 단박에 대답했다. 그녀는 절대로 테레사가 저런 드레스를 입고 샤이의 샤프롱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말해 놓고 보니 샤이의 드레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극도로 불안해졌다. 낮에 제례를 올릴 때야 성장(聖裝)을 할 테니 상관없지만, 연회는 곧 무도회니 드레스를 입을 텐데.
‘이건 나중에 신관님한테 확인해 보고…….’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몇 가지 춤들의 여성용 스텝도 알려 드릴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무도회잖아요. 춤 한 번 추지 않으시려고요?”
“남성용 스텝은 알고 있다.”
“드레스를 입고 남성용 스텝을 밟으면 안 어울려요. 간단해요, 테레사 경이라면 아마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익힐 수 있을 걸요.”
에키는 테레사의 앞에 있던 샘플책을 자신 쪽으로 당겨 오며 말을 덧붙였다.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춘다고 해서 기사가 아니게 되진 않잖아요. 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지만, 싫지 않다면 얼마든지 꾸미고 즐겨도 된다고 생각해요.”
테레사는 약간 멍해진 얼굴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그녀를 보지 않고 샘플책을 넘기며 테레사에게 어울릴 듯한 드레스 샘플들을 골라 냈다.
“예쁘게 차려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전 좋아하거든요. 테레사 경은 어떠세요?”
“……잘 모르겠군. 굳이 따지자면 싫어하지는 않는다만.”
“그럼 즐겨야죠. 드문 기회잖아요. 즐기라고 열리는 게 무도회 아니었나요?”
에키가 살짝 웃고는 번호를 체크한 종이와 샘플책을 테레사 쪽으로 밀어주었다. 테레사는 낯선 것을 보듯 에키를 눈에 담고는, 옅게 마주 웃었다.
“그래, 이왕 이리 된 것, 한 번쯤 즐겨보는 것도 좋을지도.”
* * *
테레사의 드레스 주문을 돕고, 춤을 가르쳐줄 약속을 잡고, 파티마와 앨리스의 구두와 악세사리 구매에 조언을 준 다음, 에키 자신의 것까지 몇 개 사고 돌아오니 이미 해가 다 진 저녁이었다.
앨리스는 녹초가 되어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지만 에키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것을 실컷 보고 즐겼더니 기분 좋은 피로감만 있었다.
[난 하나도 재미없었는데. 그런 게 재밌어?]
“예쁘잖아. 보기만 해도 재밌어. 사기까지 하면 더 재밌고.”
에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온 것들을 정리해 넣었다. 오늘 산 드레스도 며칠만 있으면 수선을 거쳐 도착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기분 좋게 장신구함을 닫아 넣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101호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님, 전보입니다.”
“아, 고마워.”
기숙사의 하녀가 그녀에게 마나 전보를 전해주고 물러났다. 집에서 온 전보였다. 며칠 전에 그녀가 보냈던 전보의 답장인 모양이었다.
별 생각 없이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어보던 에키의 얼굴이 일순 흐트러졌다.
“에키, 욕실 쓰십시오……. 무슨 일 입니까?”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온 앨리스가 그녀의 낯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에키는 약간 창백해진 채 대꾸했다.
“마침 축제 기간이고 하니,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할 겸 남동생이 아젠카로 온다네요.”
“아젠카의 태양 축제는 일부러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대부분이 무렵에 사관생도의 가족들이 많이 온다더군요.”
“앨리스의 가족분들도 오시나요?”
“오라버니와 부친께서는 바빠서 못 오시고, 모친께서 여동생과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
“어머, 잘됐네요. 앨리스의 여동생이라니 보고 싶어요!”
“저도 에키의 남동생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혹시 사이가 나쁩니까?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요.”
“아뇨, 사이 좋아요. 오면 소개해 줄게요.”
에키는 앨리스로부터 돌아서서 어두운 얼굴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전보의 마지막에 덧붙여진 부모님의 전언을 다시 읽었다.
-란셀리드 편에 베른스트 백작 영식의 초상화를 보낸다. 네 결혼 상대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니, 너도 고려해 보렴.
거의 잊고 있었다. 그녀 또래의 귀족영애면 슬슬 결혼을 한다는 것을. 빠른 경우엔 미성년 시절에 약혼을 하고,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을 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부모님이 정해주신 혼처였다.
사관생도들이나 여기사들은 늦게 결혼을 하는 편이지만, 에키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저 보통의 영애였다. 그녀의 부모님 입장에서는 딸이 사관생도가 된 현실 자체에 아직 적응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아즈 백작 부부는 딸에게 결혼을 강요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이가 찬 딸을 위해 혼처를 알아보는, 부모로서 당연한 의무였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이 사람은 싫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올 거고, 만약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딸을 데려갈 만한 남자인지 가늠해 본 후에 허락할 분들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백작 부부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지.’
회귀 이전의 에키네시아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을 것이고 별 거부감도 들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 내용을 보자마자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결혼 전에 잠시 여행을 떠난다는 핑계로 아젠카로 와놓고서는 말이다.
유리엔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유리엔이 그녀에게 고백했기 때문에.
‘없던 일로 하기로 결심했었잖아.’
디아상트 공녀는 여전히 기사단 본부에 머물고 있다. 약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제 약혼이 선포될지 모른다.
‘아마도 유리엔은, 내가 그를 받아 들인다고 하면…….’
그런 고백을 해놓고, 그녀가 수락하는데 그가 공녀와 약혼을 할 리는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더라도 말이다. 로아즈가 위험해지는 것도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그러니 결국 유리엔은 디아상트 공녀와 약혼을 하게 되겠지. 가슴 안쪽이 녹아내리는 듯 쓰렸다. 에키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아니라면,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어.’
누구든 상관없다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전보가 구겨졌다. 에키는 그 전보를 아무렇게나 접어 서랍에 처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