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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97화 (97/211)

검을 든 꽃 97화

파티마가 소개한 의상실은 2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꽤 큰 곳이었다. 1층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적당했고 2층은 좀 더 특별한 손님을 위한 공간인 듯했다.

에키와 앨리스, 파티마는 1층에서 전시된 드레스들을 입어보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연회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열흘은 주문 제작을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기성품을 골라 몸에 맞추거나 장식을 약간 바꾸는 수선만 가능했다.

“앨리스, 이거, 이거 입어봐요.”

“지금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무슨 소리예요, 완전히 달라요! 앨리스는 날씬하고 키가 커서 이런 깔끔한 스타일의 드레스가 어울린단 말이에요.”

앨리스가 한숨을 쉬고는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시중을 들어준 직원이 감탄을 했다.

“어머, 잘 어울리시네요.”

“그렇죠? 음, 하지만 파니에는 없는 쪽이 나을 거 같은데. 저기, 하체 라인을 드러내는 드레스도 있나요?”

“물론이죠. 서부에서 건너온 스타일인데 요즘 유행 중이랍니다. 보시겠어요?”

“네, 가져다줘요. 흰색, 푸른색 쪽의 밝은 계통으로요.”

“그리고 심플한 타입으로 말이죠. 손님, 센스가 있으시네요.”

직원이 윙크를 하고는 드레스를 가지러 갔다. 앨리스는 무어라 항변하려다 확연하게 들떠 있는 에키를 보고 재차 한숨만 쉬었다.

에키는 자기 드레스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앨리스를 입혀보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큰 키에 우아한 분위기의 앨리스는 갈아입히는 보람이 있는 편이었다.

에키가 앨리스의 목에 간신히 닿는 짧은 머리를 이리저리 보며 머리를 어떻게 해야 어울릴지 고민하고 있는데, 막 드레스를 갈아입은 파티마가 지나갔다.

“……선배님, 잠깐만요.”

“응?”

“그 드레스를 고르시려는 건 아니죠?”

“왜? 별로야?”

파티마가 갸우뚱하더니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손바닥보다 더 큰 붉은 꽃무늬가 가득 수놓아진 쨍한 파란 빛 드레스 자락이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과 함께 팔랑팔랑 흔들렸다.

파티마는 귀여웠지만 저건 아니었다. 에키는 차오르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사교계와 동떨어진 삶을 15년이나 살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갓 성년을 맞이하여 한창 들떴던 스무 살 무렵의 유행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의상실에 걸려 있는 드레스들만 한 바퀴 돌아봐도 최신 유행이 감이 잡혔다. 마검과 얽히기 전의 그녀에게는 기본 소양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므로.

“선배님, 그거 말고……. 아, 이거. 이거 한 번 입어보세요.”

“난 화려한 게 좋은데! 자수가 많은 게 좋아.”

“음, 그럼 이건요? 이것도 수가 놓였지만 지금 것보단 훨씬 어울릴 거예요.”

“색이 칙칙하지 않아?”

“입어보시면 아마 다를걸요.”

“흐음…….”

파티마가 눈썹을 모으며 에키가 내민 드레스를 들여다보더니 그것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은 파티마는 곧 활짝 웃으며 튀어나왔다.

“와, 이거 볼 때는 별로였는데, 입으니까 예뻐! 진짜 마음에 들어!”

“원래 옷은 입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죠.”

“근데 에키는 어떻게 알았어?”

“경험과 관심이에요. 검을 알면 다른 사람의 검술이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대단하다……. 난 맨날 하녀가 주는 대로 입었거든. 스스로 고르면 혼났어.”

파티마가 헤실헤실 웃었다. 에키는 편견이 강화되는 걸 느꼈다.

‘확실히 사관생도는 사관생도구나…….’

아젠카의 사관생도는 전 대륙에서 모인 천재들 중에서도 걸러진 검의 천재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생도가 검 말고는 여러모로 어설펐다. 같은 귀족 출신 여성이라 해도 에키가 예전에 어울리던 영애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에 필요한 건 검사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사교계에 관심이 많던 백작 영애인 예전의 자신이라는 판단이 섰을 뿐이었다. 그건 에키에게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던 파티마가 에키를 휙 돌아보았다. 크고 둥근 눈이 초롱초롱했다.

“에키, 나 구두랑 장신구도 맞춰서 살 건데,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에요. 앨리스도 같이 가죠.”

“네? 드레스만 사는 게 아니었습니까?”

“앨리스는 구두가 없잖아요. 설마 드레스에 가죽신발을 신을 생각이었어요?”

“…….”

아까 나갔던 직원이 서부풍 드레스가 가득 걸린 옷걸이를 끌고 다가왔다. 그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더니 에키의 머리카락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 맞으시죠?”

“네, 저예요.”

“2층에서 찾으시는 분이 계세요.”

“저를요?”

“지나가다가 보시고, 저 분홍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맞느냐고 하셔서. 찾으시는 분은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경이십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아……. 네.”

에키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테레사가 왜 여기에? 게다가 그녀를 찾는다고? 무슨 일로? 퍼뜩 생각나는 건 미하일에게 조언을 준 일이었다. 미하일이 테레사와 대련을 했나? 그게 아니면 뭘까.

어쨌든 기오사 오너가 부르는데 사관생도가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테레사 경이라는 말에 앨리스가 동경하는 눈이 되어 그녀를 배웅했다.

에키는 파티마와 앨리스를 두고 혼자서 직원을 따라 2층으로 향했다.

특별한 고객을 위해 꾸며서인지 2층은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좀 더 호화로웠고 조용했으며 응접실이 여럿 있어서 고객끼리 마주칠 일이 없어보였다. 직원은 그중 한 응접실로 에키를 안내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상냥하게 웃은 직원이 물러났다. 감각을 넓혀보자 응접실 안에 있는 사람이 테레사 혼자라는 게 느껴졌다. 에키는 문 앞에 서서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파티마, 앨리스와 함께 외출한 거라 모자도 쓰지 않았고 망사도 달지 않았다. 보석 핀만 간단하게 꽂은 상태여서 얼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괜찮아, 테레사는 기억이 없어.’

기억이 있었다면 흰 까마귀 협곡에서 유리엔이 스펙터를 저지할 때 테레사도 있었을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과 달리 긴장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테레사와는 여러 번 마주치거나 스쳐 가거나 했으나, 단둘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독대하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에키는 복도에 걸린 거울을 통해 다시 한 번 겉모습을 점검한 다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여성 치고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테레사는 길고 구불구불한 금발을 아무렇게나 질끈 묶어 늘어뜨리고 제복을 입은 채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두꺼운 드레스 샘플책을 넘겨보며 맞은편의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일단 앉아라.”

“안녕하세요,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경. 저는…….”

“소개는 됐다, 알고 있으니까.”

에키는 조심스럽게 테레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고개를 든 테레사가 초록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테레사는 앨리스보다도 큰 키에, 단련되어 탄탄한 몸의 여자였다. 남동생인 미하일이 천사처럼 선이 가느다란 미소년인데 비해 그녀는 눈매가 뚜렷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닮아 있어서 남매라는 티가 났다.

“제대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

에키를 가만히 훑어보던 테레사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에키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제 미하일이 나를 찾아왔다. 그 아이와 오랜만에 대련을 했지.”

역시 미하일 관련이었구나. 에키는 내심 안도하면서 동시에 약간 긴장했다. 미하일은 자존심이 강해 보여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련하면서 그녀가 조언했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로아즈 가문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잠깐 찾아봤더니 기사를 배출한 적이 거의 없는 가문이더군. 우리 가문과 교류한 적이 있지도 않고. 애초에 다른 나라이기도 하고.”

테레사가 다시 샘플책에 시선을 두고 페이지를 넘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깃펜을 들고 샘플 책 옆에 있던 종이에 드레스 번호를 썼다.

“그러니 네가 프랑 알마리의 검술을 접할 기회는 아예 없었거나……. 혹 있었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지.”

몇 개의 번호를 쓴 테레사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에키네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너는 프랑 알마리의 비기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대답해 봐, 에키네시아 로아즈.”

“……비기라니요?”

“모르는 척하지 마라. 미하일에게 다 들었으니. 너는 처음 그 애를 상대할 때부터 바로 그 기술을 썼다지?”

그녀를 바라보는 테레사의 시선이 몹시 서늘했다. 경계와 탐색의 기색. 그리고 에키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비기? 가문의 비기라고? 설마 검을 쳐낸 그게?’

이게 무슨 소린지. 그녀는 그저 본능적으로 프랑 알마리의 방어 자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알아채고 어떻게 공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지 판단한 다음 그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어, 비기면 뭔가 대단한 비밀 같은 거 아냐? 그걸 주인이 알아낸 거면 이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야? 우와, 싸우면 죽여야겠네!]

드레스를 고르고 있을 때는 지루한지 졸다시피 하고 있던 마검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에키는 속으로 마검에게 욕을 하며 급히 변명했다.

“테레사 경, 혹시 제가 미하일 생도에게 알려준 공격법을 말하시는 거라면, 그건 그저 제가 대련 중에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으로…….”

“프랑 알마리의 검술은.”

테레사가 에키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글씨를 꾹꾹 눌러쓰듯 딱 떨어지는 발음으로 설명했다.

“방어를 기반으로 한 반격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방어 위주로 돌아간다. 프랑 알마리의 후예는 가장 먼저 철벽이 되는 법을 배우지. 그리고 철벽을 완성했을 때.”

테레사가 깃펜을 검처럼 쥐었다. 후욱 하고 깔끔하게 허공을 가르는 깃펜의 움직임은 에키가 미하일에게 알려주었던 바로 그 궤적이었다. 그녀는 깃펜을 에키에게 겨눈 채 말했다.

“그 철벽이 단칼에 부수어지는 경험을 한다. 선배들로부터, 네가 미하일에게 알려준 그 기술을 당함으로써.”

“…….”

“완전히 부서진 다음, 진짜 철벽을 만들어내게 되지. 이번에는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철벽을 만든다. 프랑 알마리의 비기를 받아칠 수 있도록. 같은 토대 위에서 각자 다른 철벽을 세우고, 우리는 그렇게 기사가 된다.”

테레사는 천천히 깃펜을 내려놓았다. 깃펜 대신 날카로운 기운이 형체를 이룰 것처럼 짙고 뚜렷하게 에키를 겨누었다.

에키는 자동적으로 반응하려는 마나를 간신히 억눌렀다.

“프랑 알마리의 비기는 가장 강한 기술이 아니라, 각자에게 맞는 검술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는 통과의례다. 프랑 알마리의 방어를 익히기 시작한 자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도록 가다듬어진 기술이란 말이다. 너는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지? 누구에게 배웠어?”

[어떻게 알긴, 보이니까 그냥 한 거지. 내 주인한텐 별거 아닌 일이라고. 흐흥.]

마검이 우쭐해서는 종알거렸다. 에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억울해졌다.

프랑 알마리의 완성판이라고 할 만한 테레사를 죽여본 경험이 있기에 좀 더 쉽게 알아채긴 했지만, 어쨌든 그냥 방어 자세를 보고 깨달았을 뿐이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테레사 경, 경이 말했다시피 전 프랑 알마리와 관계가 없어요. 그냥 보였어요. 그래서 공격했을 뿐이에요.”

“그냥 보였다, 고. 프랑 알마리의 방어 자세를 보자마자?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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