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6화
미하일은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 검을 세로로 세워 들고 공격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가문 특유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키는 물끄러미 그 방어 자세를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미하일 생도는 왜 먼저 공격하지 않나요?”
“……설마 프랑 알마리의 검술을 몰라? ……요?”
미하일이 기가 찬 듯이 되묻다가 어색하게 존대를 덧붙였다. 에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알아요. 철벽의 프랑 알마리.”
원래는 몰랐었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남부 앙투아르 왕국이라고 하면 철벽의 프랑 알마리가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유명한 검술이었지만, 에키네시아는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프랑 알마리의 검술을 알게 된 건 마검에서 벗어난 후 기오사에 대해 조사하면서였다. 디몽기오사를 조사하려면 필연적으로 가장 최근까지 디몽기오사의 오너였던 테레사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알면서 왜 물어? ……요.”
[쟤 머리 나빠? 말투가 이상해.]
미하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한 말에 마검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흘릴 뻔한 실소를 간신히 삼켰다.
“프랑 알마리의 검술이라고 해서 공격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건 상관 말고 빨리 대련이나 시작해……요.”
미하일이 검을 쥔 손잡이에 꾸욱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한 녹색 눈동자가 불이 붙은 것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가만히 그 자세를 지켜보다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평범하게 상대하면서 조금씩 지도 대련을 해도 되겠지만……. 느리고, 쉽게 바뀌지도 않겠지.’
고인 피웅덩이에 주저앉아 미하일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던 테레사가 떠올랐다.
에키는 미하일을 죽인 순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한 죽음이 아니어서, 라는 건 그녀만의 핑계에 불과했다.
원해서 죽인 게 아니라는 변명 역시 죽음을 맞이한 피해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되살린 것으로 최소한의 사죄는 했지만, 그래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에키는 그렇게 검을 들었다.
오늘 그녀의 드레스는 연한 하늘색에 흰 프릴과 레이스로 장식한 것이었다.
하늘색 치맛자락이 가볍게 팔랑이고, 그 아래에서 레이스 꽃이 달린 구두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몸이 반쯤 회전하며 그녀의 검이 크게 휘돌아 미하일의 검에 닿았다.
미하일의 검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연무장 바닥에 꽂혔다. 신입생 순위전 때의 데자뷰. 미하일은 멍한 얼굴로 날아간 검을 보다가, 천천히 에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메시스트를 허리의 검집에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는 평생 테레사 경의 발끝도 쫓아가지 못할 거예요, 미하일 생도.”
에키가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미하일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돌아서자 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만! ……요!”
이미 대련을 다 끝낸 클럽원들이 대련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려던 에키가 걸음을 멈추고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그러지 말고 그냥 말 놔요. 나이 차이가 나도 같은 1학년이니까.”
“……그런 식이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와, 바로 말 놓는 거 봐. 역시 건방져.]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조잘거려, 망할 마검아. 에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하일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정말 몰라서 물어?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인데?”
“윽…….”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하일은 이를 악물고 소리치듯 대꾸했다.
“그래, 몰라!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
“어깨가 열려 있잖아.”
“……어?”
“방어 자세일 때 어깨가 열려 있어. 그리고 팔이 아니라 손목으로 검을 지지하고 있고. 그러니 바짝 붙어서 가드와 손잡이 사이를 쳐올렸을 때 버티질 못하는 거야.”
이렇게 순순히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미하일이 멍청해졌다. 소년은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 그럼 그 점을 고치면 돼?”
“아니.”
“뭐? 지금 장난쳐?”
미하일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클럽 모임에 오기 전에, 에키는 앨리스로부터 5월 30일에 있었던, 그녀가 참석하지 못한 전체 순위전의 결과를 들었었다. 같은 날 있었던 생도 대표 선거 결과도 들었지만 대표가 된 생도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클럽원들의 순위전 결과는, 전체 생도 수 146명 중 바라하 이슬라프 1위, 앨리스 윈터벨 6위, 파티마 토야 14위, 테오 폰 크라이스 28위였다.
그리고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는 13위를 기록했다.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신입생이 첫 전체 순위전에서 13위면 사실 대단한 결과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이 거둔 성적이라기엔 아무래도 아쉬웠다. 에키가 보기에 미하일은 적어도 앨리스와 비슷한 순위를 기록했어야 했다. 그가 가진 잠재력을 보면 그게 정상이었다.
‘발전하려면 검술 스타일 자체를 바꿔야 해. 하지만 그건 쉽지 않지. 게다가 누나인 테레사를 롤모델로 삼고 있을 테니.’
“그 점을 고치면 넌 훨씬 나아질 거야. 하지만 그게 끝이겠지.”
“무슨 소리야?”
“테레사 경과 자주 대련해? 테레사 경을 상대로 한 번이라도 공격에 성공해 본 적 있어?”
“누, 누님은…….”
미하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울컥하며 소리쳤다.
“누님을 상대로 내가 어떻게 이겨!”
“누가 이겼냐고 물었어?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공격을 성공한 적이 있냐고 묻고 있잖아.”
“윽…….”
“옷자락에 닿아본 적도 없지?”
“애, 애초에 누님은 내게 공격을 막으라고만 하셨거든? 방어가 먼저지, 프랑 알마리는 철벽의 검이니까!”
미하일은 어린 시절에 몸이 약했다. 그래서 테레사는 소년에게 오로지 방어만 가르쳤다. 검술이라기보다는 호신 용도였다.
소년은 자라면서 건강해졌지만, 테레사는 연약하던 동생의 재능을 아직 제대로 인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에키는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건 미하일의 검이 극도로 방어적이라는 것과, 그게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다음에 테레사 경과 대련하게 되면, 선공하겠다고 하고 내가 했던대로 공격해 봐.”
“……네가 했던 대로? 공격을, 하라고? 그게 효과가 있어?”
미하일이 얼떨떨하게 되묻자 에키가 픽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효과는 무슨. 기오사 오너이자 탁월한 마스터인 테레사 경이 너처럼 검을 놓칠 것 같아?”
“망할, 그럼 뭐 하러 내가 그래야 해?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를……!”
“왜, 못 하겠어서 그래? 설마 두 번이나 보여준 공격을 못 따라하겠다는 건 아니지?”
“……너.”
미하일이 으득 이를 갈더니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거친 걸음으로 연무장에 꽂혀버린 제 검으로 다가가 그것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 발을 크게 내디디며 에키를 향해 그 검을 휘둘렀다.
반원을 그리며 솟구친 검은 그녀의 코앞을 스쳐 지나가 허공에서 멈췄다. 에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이 일으킨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가라앉았다.
금발의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내가 이 정도도 못 할 것 같아?”
그가 보인 동작은 에키가 했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겨우 두 번 본 검의 궤적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예상대로 빠르고 움직임이 많은 쪽이 어울린다. 그쪽을 더 쉽고 자연스럽게 익힐 테고.
그리고 아마 테레사 역시, 보자마자 알게 될 거다. 미하일에게는 그녀보다 테레사가 말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에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돼. 해봐. 많은 것이 달라질 거야.”
소년의 얼굴이 멍해졌다. 에키는 그를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다른 클럽원들에게 합류했다.
미하일은 굳은 채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아, 자꾸 왜 이래. 미쳤나.”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에서 소년의 낯에 옅은 홍조가 올랐다.
* * *
클럽 모임으로부터 이틀 뒤, 에키는 파티마, 앨리스와 함께 쇼핑을 나갔다. 앨리스가 나오기까지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저도 꼭 가야 합니까?”
“앨리스, 태양 축제 마지막 날 연회에 입고 갈 옷 있어요?”
“생도복을…….”
“앨리스는 전에 저한테 사관학교에 어울리는 옷을 입으라고 했었죠. 그럼 연회에 어울리는 옷은 뭐라고 생각해요?”
“하, 하지만 에키가 옷차림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걸 제게 알려 줬잖습니까!”
“제가 언제요? 전 제 옷차림에 참견하지 말아달라고 했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 적은 없어요.”
앨리스는 할 말을 잃고 에키를 내려다보았다. 에키는 연보랏빛 드레스 차림으로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상황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마음대로 입으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만, 사관학교에서 제 드레스는 좀 안 어울리기는 해도 폐를 끼치지는 않잖아요?”
“…….”
“훈련복이나 생도복은 싫단 말이에요. 안 예쁘잖아요. 규정상 금지된 것도 아니고 전 드레스 안 불편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분명히 위장으로 시작했는데, 익숙해지면서 점차 즐거워졌다.
부드러운 실크, 화려한 레이스, 살랑거리는 프릴과 반짝거리는 장신구들. 그녀는 그런 것들이 좋았고, 그것들을 걸치고 치장하는 건 마검을 쥐기 전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취미였다.
워낙 오랜 시간 억누르며 고행하듯 살았더니 즐길 수 있는 지금은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행복해지려고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 그녀의 말은 거진 진심이었다. 앨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연회에 생도복을 입고 가는 것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앨리스는 드레스를 싫어하나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상황에 안 맞는 옷으로 가려는 거예요? 왜요?”
“드레스는 기사답지 못한…….”
반사적으로 말하던 앨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앞에 드레스를 입은 탁월한 실력의 스콰이어가 서 있었다.
에키네시아의 로드는 기사 중의 기사인 창천기사단장이었고, 그녀는 최근에 로드와 함께 성녀를 구해냈다. 기사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일이었다.
검술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검소함은……. 앨리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에키의 허리에 달린 아메시스트를 향했다. 고급 저택 여덟 채짜리 마법검. 기사 중의 기사인 창천기사단장이 선물한.
어쩐지 모든 게 의미 없이 느껴졌다. 드레스 한 벌쯤 사 입는다고 기사답지 않다면 창천기사단장부터 기사를 그만둬야 했다.
그래, 소득 수준을 넘어서는 허영만 아니면 되지. 앨리스는 체념했다.
“……아닙니다, 가죠.”
“고마워요, 앨리스.”
에키가 활짝 웃으며 앨리스의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앨리스는 그녀에게 이끌려 방을 나서며 물었다.
“이게 고마운 일입니까, 에키?”
“앨리스랑 같이 쇼핑하고 싶었거든요. 같이 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사실은 앨리스가 꾸민 모습도 보고 싶어요.”
“그런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습니까.”
에키가 우뚝 멈춰서더니 앨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만 말해도 함께 갔을 거라고요?”
“네.”
“……친구라서요?”
“……아닙니까?”
“아뇨, 아뇨! 마, 맞아요.”
에키는 허둥지둥 대답하더니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앨리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귓불이 붉어진 에키와 쿡쿡 웃고 있는 앨리스가 함께 나오자 기숙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티마가 갸웃거렸다.
“너희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선배님.”
에키가 급하게 독촉했다. 파티마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에키와 앨리스를 번갈아 보고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앞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