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95화 (95/211)

검을 든 꽃 95화

에키네시아는 오랜만에 클럽 모임에 참석했다. 첫 모임 이후 장기 임무를 다녀오는 바람에 그녀에게는 두 번째 클럽 모임이었다. 그사이 클럽에는 못 보던 생도가 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키네시아 생도. 1학년 테오 폰 크라이스입니다.”

밤색 머리의 생도가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에키는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뒤쪽에 서 있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명화에 그려진 천사처럼 고운 소년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툭 말했다.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

“아, 음, 반가워요, 둘 다.”

테레사의 남동생과 그의 룸메이트라. 미하일이 신청서를 냈던 건 봤었지만 정말 클럽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순위전 때 상대하면서 생각했던 대로 그의 검술에 조언을 주어야겠다. 죽였던 순간은 기억하지 못해도 미하일 역시 그녀의 손에 죽었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보상이 되겠지. 테레사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에키는 소년을 향해 웃었다. 그녀가 웃자 미하일이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쟤, 너 싫어해? 저번에 너 때문에 1차전에서 떨어져서 저러는 거야? 너한테 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야. 건방지다!]

싫어할 수도 있지. 건방진 일도 아니고.

비슷한 또래에서 뛰어난 실력이란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게 마련이었다. 따라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게 압도해버리면 질투하지 못할 텐데, 자신이 사관학교 순위전에서 보여준 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차원이 아니라 몇 발짝 앞서 있는 정도였을 테니까.

물론 그건 에키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관생도의 기준을 높게 잡는 경향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관생도의 평균이 앨리스 윈터벨 수준이었으므로.

마나 친화력을 제외하고 신체만 따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불리한 게 현실인 상황에서, 기술과 숙련도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생도들까지 이기고 신입생 2위를 차지한 앨리스는 절대 사관생도의 평균이 아니었다.

그런 앨리스조차 에키를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 여겼다. 파티마도 마찬가지였다. 위즈덤의 클럽원 중에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생도는 에키네시아 본인뿐이었다.

신입 클럽원과 인사가 오가고 나자 파티마가 에키에게 다가왔다.

“사실 클럽에 새로 가입한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바빠서 오늘 모임에는 못 왔어. 너도 아는 사람이야.”

“누구예요?”

반문하며 에키는 설마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녀가 사관학교에서 아는 사람이라 해봤자 몇 되지 않으니까.

파티마가 생긋 웃었다.

“바라하 이슬라프 선배님. 아마 축제가 끝나야 제대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

“……네.”

“바라하 선배님까지 해서 여섯 명. 당분간은 이 정도로 운영할 거야. 자, 오늘 대련 순번은 여기. 그럼 시작하자!”

설마가 맞았다. 에키는 묘한 기분으로 아메시스트를 챙겨 들었다. 사관학교 내에서 그녀가 안면이 있는 몇 안 되는 생도가 전부 같은 클럽원이라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에키, 그 검……. 마법검이었습니까?”

첫 대련 상대인 앨리스가 에키의 검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룸메이트인지라 그녀의 검이 바뀌었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자세히 살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 네. 날의 강도와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늘 질 나쁜 검을 쓰기에 약간 걱정했는데, 잘된 일입니다. 기사라면 손에 익은 애검이 있는 편이 낫지요. 당신의 상징이 되어도 될 만큼 잘 어울려 보입니다.”

[……저딴 게 네 상징이 될 만큼 어울린다고? 야, 대련 중에 실수한 척 쟤 죽이면 안 돼?]

에키는 말없이 오른손에 마나를 흘렸다. 마검이 따갑다며 징징거리는 소리 너머로 앨리스의 말이 들려왔다.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앨리스는 건네받은 아메시스트를 쥐고 허공을 베며 가늠해 보더니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나갔다.

“엄청난……. 아니, 훌륭한…… 검이군요. 맞춤 제작인 것 같은데, 이게 완성되길 기다리느라 그동안 아무 검이나 썼던 겁니까?”

“아뇨, 선물받은 거예요.”

“선물이요? 이걸 선물로 받았다고요?”

아메시스트를 돌려주는 앨리스의 안색이 창백했다. 에키는 검을 받아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드께서 스콰이어가 된 기념으로 주셨어요. 뭔가 이상한가요?”

“……에키, 저는 검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물론 전문가 수준은 아닙니다만. 스콰이어 기념이면 두 달도 안 될 시간인데, 그 시간에 그 정도 검을 마법까지 새겨 넣어 만들었다면……. 제작비가 대략…….”

창백하던 앨리스의 안색이 속으로 무언가 셈하면서 되레 침착해졌다. 경악의 한계를 넘은 모양이었다.

“제국 수도에서 고급 저택을 여덟 채는 살 수 있겠군요.”

“네?”

에키는 기겁해서 아메시스트를 내려다보았다. 제작비가 꽤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검을 잘 몰라서, 기오사도 아니고 고작 칼 하나가 그 정도 가격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격을 듣고 나니 쥐고 휘두르는 게 아니라 모셔놔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검 하나에 수도의 고급 저택이 여덟 채? 미쳤어,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줬다고? 유리엔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나한테…….’

〈그대를 사모하고 있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에 습기가 어린 푸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머리가 멍해지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에키는 순간적으로 아메시스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앨리스는 코앞에서 에키가 어떻게 쥐어야 될지 모르겠다는 낯으로 아메시스트를 보다가, 얼굴이 옅게 달아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에키는 굉장히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거리더니 급하게 말했다.

“그, 어, 얼른 시작하죠, 앨리스. 다음 대련도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앨리스는 제국식 기사의 예법대로 인사를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에키와 앨리스는 처음 대련을 했던 전나무 숲속의 제9연무장에서 대련하곤 했다. 가끔 훈련을 함께 하기도 해서 앨리스는 에키가 어떤 식으로 훈련하는지 볼 수 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검술 훈련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주로 체력 단련을 위한 훈련을 했다. 똑같이 검을 들고 휘두르더라도 검로(劍路)를 익히기 위한 것과 근육을 기르기 위한 것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따로 검술 서적을 찾아보거나 다른 생도들을 찾아다니며 대련을 하지도 않는다. 스승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독학으로 검을 익혔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럼에도 대련을 할 때마다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가 조금 더 발전하면 그것보다 딱 몇 발짝을 더 앞서 나간 상태로 검을 받아준다. 그 덕분에 앨리스의 검술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에키가 임무를 떠난 동안에도 앨리스는 그녀의 잔상을 그리며 검을 다루었다.

‘대륙 전체를 뒤져도, 이 시대에 그녀보다 뛰어난 천재는 없을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그래서 에키네시아가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가 된 이유를 그 압도적인 재능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유리엔 단장도 기록을 몇 개나 갈아치운 천재니, 천재끼리 무언가 알아본 게 있을 거라고.

‘하지만, 저 정도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로 줄 정도면……. 게다가 형태가 묘하게 단장님의 성검과 닮았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다른 감정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재능이 먼저인지 감정이 먼저일지는 몰라도.

아직도 약간 달아오른 상태로 멍해 보이는 에키의 모습이 그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앨리스는 슬쩍 웃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에키.”

“네, 앨리스.”

검을 쓸 때는 잡념을 지워야 했다. 앨리스는 방금 떠올린 추측을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 넣고 스텝을 밟았다.

깔끔하게 찔러들어 오는 검을 받아치며 에키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앨리스와의 대련이었다.

그녀가 임무를 떠났던 사이 앨리스는 또 실력이 훌쩍 늘어 있었다. 그게 어쩐지 뿌듯하면서 기뻐서, 에키는 기분 좋게 검을 맞대었다.

ㄹ리스의 다음 차례는 파티마였다.

앨리스가 간결하고 빠른 편이라면 파티마는 정교하고 화려한 검술을 썼다. 앨리스를 상대로는 직선적이던 에키의 검술이 파티마를 상대할 때는 변칙적으로 바뀌었다. 교묘하고 작은 변화였지만, 파티마는 알아 채고 있었다.

‘상대와 비슷하면서 좀 더 강한 검술을, 상대에 맞춰 구사하다니……. 재능 수준이 아니야, 이건.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파티마는 속으로만 감탄했다. 자신이 눈썰미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한눈에 신입생 중에 뛰어난 생도를 찾아낸 것처럼, 파티마는 검술을 파악하는 안목이 검술 재능보다 뛰어난 편이었다.

‘아마 보통은 에키랑 대련할수록 자신의 실력이 늘어나는 이유도 모르겠지. 에키가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니.’

선배로서 자존심이 상하기에는 너무 차원이 달랐다. 배우는 것도 많았다. 파티마는 자신의 허점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와 목덜미를 겨누는 에키의 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클럽에 스승 따윈 필요 없겠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 정도로 교묘하게 잘 가르친단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티내는 건 싫어하는 거 같으니까…….’

“수고했어, 에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늘 고마워.”

파티마의 인사에 에키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고마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파티마는 푸슬푸슬 웃고는 발돋움하여 에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배님?”

“그냥 고마워서. 참, 오늘 드레스도 잘 어울려! 새로 산 거야?”

“아뇨, 여름용이에요. 오늘은 좀 더워서.”

“그러고 보니 슬슬 여름옷을 마련해야겠네. 곧 축제이기도 하니까……. 에키, 나중에 같이 맞추러 갈래? 나 무도회용 드레스 맞추고 싶어! 맨날 훈련복만 입고 다니니 이럴 때라도 기분을 내야지.”

임무를 떠나기 전, 에키는 언젠가 파티마나 앨리스와 같이 쇼핑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먼저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약간 놀란 눈으로 파티마를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전 좋아요, 선배님.”

“응! 아젠카 의상실은 잘 모르지? 내가 여기사님들이랑 선배님들한테 들은 곳 소개해 줄게. 앨리스한테도 물어볼 테니까 같이 가자!”

발랄하게 손을 흔든 파티마가 다음 대련 상대를 향해 이동했다.

에키는 약간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아주 예전이라면 머리가 흐트러진 것에 짜증이 났을 거고, 회귀 전이라면 머리에 손을 대도록 내버려두질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두근거림이나 설렘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소리 내어 웃고 싶어질 정도로 가볍고 포근한 기분이었다.

파티마의 다음으로 상대하게 된 테오에게도 에키는 은근슬쩍 지도대련을 했다.

앨리스와 검을 맞대고 유리엔에게 아메시스트를 받으면서 검을 쥐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에키는 여전히 검을 쓰는 행위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실력을 감추며 적당히 상대하기만 하는 대련은 그녀에게는 지루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반면 상대의 검술에 맞추어 유도하는 지도대련은 꽤 흥미로웠다. 은근히 뿌듯하기도 하고.

‘클럽 전체가 실력이 늘면 내가 실력이 느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일 테니까, 서로 좋은 거지 뭐.’

“수고했습니다, 에키네시아 생도. 역시 강하네요.”

“고마워요, 테오 생도.”

에키는 테오의 가슴팍에서 멈춘 검을 거두었다. 파티마와 달리 테오는 에키네시아의 교묘한 지도대련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고개만 갸웃거리며 다음 대련을 위해 이동했다.

마지막 대련 상대는 미하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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