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4화
“제가 싫습니다.”
“아니, 거……. 크흠.”
황태자는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그가 말해 놓고도 저 유리엔이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애인을 두는 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아서. 그는 이마를 짚고 신음을 홀렸다.
“어떤 여자냐?”
“사적인 일입니다.”
“……뭐, 지금 그게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 어쨌든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말이다, 유리엔. 그 조건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너도 모르진 않겠지?”
“이 약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 전하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까?”
“그래, 잘 알고 있군. 설사 내가 너를 믿는다 해도, 약혼을 거부하고 나면 아무도 네가 나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저는 전하의 신하가 되려는 게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네가 상관이 없어도 나는 상관이 있단 말이다. 내가 왜 네 지지를 원했는지 모르느냐?”
황태자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국의 군부는 대부분 2황자 측에 서 있다. 군권을 틀어쥔 현 황제가 2황자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2황자 카르엠이 나름 뛰어난 기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탓도 있었다.
황태자는 외가와 처가를 포함해 다수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귀족들의 사병은 제국군과 기사단들에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제국군은 황제 직속이라 끌어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사단은 달랐다.
요충지의 요새에서 머물며 그 지역의 방위를 전담하는 기사단들은 상당히 자립적인 집단이었으며, 그 지역의 가문과 깊게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유리엔은 제국 기사들의 우상이었다. 제국 내에서 은밀히 유리엔이 다음 대 황제가 되길 원하는 세력들도 대체로 기사단과 기사단에 연계된 가문들이었다.
따라서 황태자가 유리엔의 지지를 얻으면 중립이던 기사단들을 포섭하는 것이 무척이나 쉬워진다. 군부를 틀어쥐고 있는 2황자를 상대할 만해지는 것이다.
무력이 없는 권력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되도록 이 경쟁이 내전까지 가지 않길 원하지만,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황태자는 그 때문에 유리엔을 제 아래로 끌어들이려 했었다.
“나는 네 이름이 필요하다. 네가 나를 지지한다는 의사 표명 자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걸 말만 가지고는 신뢰하기 어렵지. 약혼만큼 간단하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느냐?”
황태자의 상황도, 저 요구도, 예상한 일이었다. 유리엔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로잘린 디아상트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경께서 약혼하지 않겠다고 하셔도 아무 상관 없어요. 솔직한 심정으론 경이 엎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정말 약혼을 거절하실 경우, 대가는 확실히 받아 내겠지만요.〉
대가는 얼마든지 치를 수 있다. 에키네시아와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유리엔은 결심했던 것을 입 밖에 내었다.
“그렇다면 위장 약혼을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실 때까지만.”
“뭐? 위장?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디아상트 공녀와는 제가 협상할 예정입니다. 공녀와 협상한 후 디아상트 공작과도 논의를 하도록 하지요.”
“그렇게까지 힘들여 돌아갈 필요가 있느냐? 그저 결혼하면 간단한 일인 것을. 혹 네가 원한다는 그 여자가 정실이 아니면 싫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냐?”
“그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녀는 저를 거절했으니까요.”
황태자는 이제 더 놀랄 기력도 없는 심정이 되어 이마를 싸쥐었다.
“……짝사랑이라고? 네가? 거기에 그 짝사랑 때문에, 약혼조차 못 하겠다고? 그 여자랑 결혼할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는 상태인데? 너, 미쳤느냐?”
[미쳤지, 아주 제대로, 하여간 내 주인들은 하나같이……. 하긴, 올곧은 자들만 내 주인이 되니 당연한 일인가.]
성검이 자포자기한 듯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황태자에게 대답했다.
“제 선택입니다. 상세한 계획은 공녀와 협상한 후 전해 드리겠습니다.”
“나 참……. 널 어릴 적부터 보아 왔지만, 네가 사람다워 보이는 건 처음이다. 너도 욕망이 있긴 했구나.”
“납득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유리엔이 무표정하게 말하고는 서류를 황태자 쪽으로 내밀었다.
“나머지 요구는 후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황태자는 서류를 받아 들며 아까 서명한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유리엔이 그것을 챙겨 넣는 동안 그는 봉인을 뜯고 그 안의 서류를 확인했다.
그 서류에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황제가 얻게 된 경위와, 그것으로 황제와 2황자가 벌이려 했던 음모의 얼개와, 어디를 어떤 식으로 조사하면 증거와 상세한 내용을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리되어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 황태자가 유리엔에게 건네주었던 서류를 바탕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쓴 것이었다. 유리엔은 기억을 되살려 그것을 작성하면서 마검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가문이 로아즈 백작가였다는 사실은 쓰지 않았다.
과거에도 황태자는 끝끝내 후보 가문 중에 어디가 선택되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유리엔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스콰이어로 삼은 것을 단서로 삼아 로아즈가 연관이 있다는 걸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러더라도 건드릴 수는 없다. 내 스콰이어의 가문이니까.’
황태자는 그 서류를 읽으며 입매를 굳혔다가, 창백하게 질려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그의 손끝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돌았군. 완전히, 돌았어.”
서류를 팽개치며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신음 같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바르데르기오사라니, 제정신이 아니야. 아바마마께서 멀쩡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건…… 마검으로 일부러 학살을 일으키겠다니. 진정 미친 게 아니고서야……. 이게 알려졌다간…….”
“모든 제국민들이 황실로부터 등을 돌리겠지요. 창천기사단은 황실을 상대로 성전을 선포하고 마검을 회수할 겁니다. 타국에서도 이 일을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황태자가 소름이 돋는지 목덜미를 쓸었다. 유리엔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전하께서 이것을 내걸고 창천기사단의 협조를 얻어 황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르십시오.”
회귀 이전에는 크루엔 황태자가 유리엔에게 했던 제안을, 지금은 유리엔이 황태자에게 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류를 노려보며 길게 침묵했다. 약간 지루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걸 보니 네가 정말로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겠구나.”
“……?”
“너는 기오사를 수호하는 창천의 단장이고, 기사의 성지 아젠카의 군주이자 제국의 황자다. 이 사건을 내게 들고 오지 않고 네가 직접 내세웠다면 너는 아젠카의 군주인 동시에 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겠지.”
“…….”
“네가 성검 랑기오사를 빼어 들고 사악한 마검을 든 황제를 벌하겠다 선언하면, 너는 만인의 지지를 얻으며 황궁에 입성해 새로운 황제가 될 수 있었을 거다. 네 이야기는 마왕을 처단한 용사의 전설처럼 전해지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 내게 이것을 들고 왔으니 그게 너의 진심이겠지. 정말로…….”
황태자는 말을 멈추더니 생경한 눈으로 이복동생을 바라보았다. 크루엔 황태자는 황제와 2황자와 3황자 간의 비틀린 관계를 늘 방관해 왔다.
아비에 대한 애정이나 기대는 일찌감치 버렸고, 2황자의 열등감에 눈살을 찌푸렸었다.
막내인 3황자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지독히 억눌려 욕망을 모르는 소년은 안쓰럽긴 해도 그다지 정이 가진 않았다.
다방면으로 너무 뛰어난 탓도 있었다. 황궁에서 지내던 시절의 유리엔은 아름다운 외모에 열기라곤 없는 눈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소년이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보면 사람 같지가 않아서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정말 많이 변했어. 다른 사람 같군.’
그가 알던 유리엔이라면 제위에 관심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대놓고 당신을 황제로 만들겠으니 요구를 들어달라며 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에 연연하여 막무가내로 싫다고 하지도 않았겠지.
‘원한다는 그 여자 때문인가? 알아 봐야겠어, 이건.’
냉정한 판단과는 별개로 황태자는 지금의 유리엔이 예전의 그보다 마음에 들었다.
“너를 믿겠다. 유리엔.”
그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황제로 만들어다오. 그리하면 나 역시 네게 보답하겠다. 신하가 아니라 동맹을 대하는 예우로써.”
“감사합니다. 전하.”
유리엔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밀실 안에서는 오래도록 대화가 오갔다. 물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젠카에 돌아오자마자 에키네시아는 하루를 푹 쉬었다.
몇 번 고생해서 몸이 익숙해졌는지 전처럼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쉬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휴식을 취했다. 유리엔이 지적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모른 척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앨리스로부터 브레드 폰 포움을 위시한 노블레스 클럽의 몇몇 생도들이 자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안 사정 때문이라고 했지만 아젠카 사관학교를 자퇴할 정도로 심각한 사정이 있는지 의혹이 있었다.
에키는 사실 브레드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소문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중요한 관심사가 많았다. 그녀는 잠깐 의아하게 여겼다가 금세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쉬고 난 다음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대신전을 찾아가 샤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자주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뒤 기사단 본부에서 머물고 있는 니콜을 방문해 책을 몇 권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회귀 이전에 결절에 대해 조사할 때 참고했던 것들과, 구할 방법이 없어서 찾아보지 못했던 책들이었다. 현자의 제자인 니콜이라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은 결절에 대해 전부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지만.’
카이로스기오사에 대한 라키아기오사의 반동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그녀가 시간을 되돌렸음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조사 자체는 그녀 혼자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로아즈 백작가에 전보를 보냈다. 당분간 새 고용인이나 새로운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쐐기가 로아즈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니콜이 떠나면서 대비해 두고 온 것도 있다고 하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녀의 로드인 유리엔은 아직 제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면서 유리엔과 마주치지 않으니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떠오르고 가슴 안쪽을 쑤시는 것들을 외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월 10일이 되었다. 그날은 위즈덤의 클럽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