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3화
그랜마는 벽에서 그녀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손짓 한 번으로 창고를 박살 내다시피 한 여자에게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아직도 모든 것을 보여주진 않았다는 듯이.
그랜마가 거느린 남자도 마스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절대 이런 파괴력을 보이지 못했다.
마법이 아니라 검기로, 그것도 검이 아닌 맨손에 모은 마나로 이런 짓이 가능한 건…….
노파는 자신이 진짜 괴물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확신했다. 심지어 저 괴물은 쐐기에 대한 정보들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무언가 뒷배가 있는 거겠지.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쐐기의 역사가 자신의 대에서 끝날 것이다. 쐐기 내에서도 거의 아는 이가 없는 그녀의 손자까지 위험할지도.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랜마는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명심, 하마, 아가.”
“좋아요, 그럼 의뢰에 대해 얘기해 보죠.”
에키는 난리통에도 용케 부서지지 않은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그녀는 쐐기에 의뢰를 마쳤다. 황태자와 2황자의 행적과 세력에 대한 조사 의뢰였다.
의뢰를 마친 후 쐐기를 벗어나며 피에 젖은 로브와 가죽옷을 버렸다. 그녀는 출발할 때와 같은 완벽하게 치장한 영애의 모습으로 돌아가 열차를 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아젠카에 귀환한 건 그로부터 하루 뒤인 6월 5일의 일이었다.
* * *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홀로 조용히 제국 수도를 방문했다. 은밀히 도착한 전갈에 응한 크루엔 황태자와 유리엔이 만난 곳은 수도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의 밀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유리엔.”
먼저 와 있었던 황태자가 들어서는 유리엔을 향해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새빨간 와인이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황태자가 그것을 한 모금 삼키는 사이 유리엔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호화로운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지만 둘 모두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네가 무슨 일로 나를 다 찾아왔을까. 혹 약혼 문제 때문이냐? 로잘린은 똑똑하고 예쁜 아이니 너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디아상트 공녀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른 아이를 소개해 줄까?”
황태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물었다. 그 몇 마디의 말 속에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정치적 의도가 묻어 있었다. 유리엔은 그것을 받아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황태자 전하.”
“응? 딱딱하게 전하는 무슨. 형님이라 불러라.”
“전하께선 제가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믿으십니까?”
황태자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유리엔을 응시했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 내려는 듯이.
유리엔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 넘겼다. 한참을 침묵하던 황태자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절반 정도는.”
“만약 제가 당신이 1년 안에 제위에 오를 수 있게 해드린다면,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이거야 원.”
황태자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잔 안의 와인에 한동안 시선을 두고 있다가 눈을 들어 유리엔을 보았다.
“너한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미치진 않은 거 같은데, 무슨 헛소리냐?”
“저는 전하께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거래?”
“황제 폐하와 2황자 전하를 실각시킬 명분을 드리고, 창천기사단의 무력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황태자의 입매가 굳었다. 이런 제안이 유리엔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가 아는 3황자 유리엔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였으니까.
그는 유리엔이 기오사 오너가 되었다는 소식에 곧바로 랑기오사냐고 되물었던 적이 있었다. 예상대로 유리엔이 얻은 기오사는 랑기오사였다. 재미없을 정도로 뻔한 이복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그 유리엔이 아비와 친형을 치자는 제안을 하는 건가?
“……일단 대체 무슨 수로 그러겠다는 건지는 제쳐두고, 거래라면서. 대가로 뭘 원하는 거냐, 너는?”
“자유입니다.”
“뭐?”
황태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유리엔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창천기사단장이자 아젠카의 군주일 뿐, 더 이상 제국의 황족이 아닙니다. 제국에 관여할 생각도, 관여당할 생각도 없습니다.
“…….”
“하지만 상황이 저를 그리 내버려 두질 않더군요. 그래서 상황 자체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날 제위에 올리는 게 상황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제가 지지할 수 있는 건 전하뿐입니다. 아시잖습니까.”
황태자는 황제가 3황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2황자 카르엠과 유리엔의 사이가 어떤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2황자와 황제의 사이는 혈육일지 몰라도, 그들은 유리엔에게는 혈육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유리엔이 그들에게 굽히고 들어간다 해도 그들이 용납하지 않으리란 것까지 알고 있다. 차라리 남인 것이 나았을 사이다.
그 점은 사실 황태자도 다르지 않았다. 사이에 오간 것이 증오냐 무관심이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황태자에게 황제와 2황자는 그저 정적에 불과했다.
단 한 번도 정을 준 적도, 정을 받은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혈육이라 여기겠는가.
그래도 증오보다는 무관심이 낫다. 따라서 유리엔이 굳이 누군가를 지지한다면 자신을 지지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자신을 1년 안에 제위에 올리겠다니. 황태자가 알던 그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발상이었다.
달라졌다. 황태자는 유리엔이 변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생소한 것을 보듯 이복동생을 훑어 보며 나직이 답했다.
“글쎄, 네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는 선택도 있지.”
“제가 지킬 터전은 아젠카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네가 아무리 성검의 주인이라지만…….”
“의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믿지 않으셔도, 저는 전하를 제위에 올릴 겁니다.”
“대체 무슨 수로? 아니, 그전에. 제위에 오른 뒤에 내가 너를 내버려 둔다는 보장이 있느냐?”
“전하께선 합리적이시지요. 전쟁보다는 회유와 협상을 선호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만약 전하께서 저와 아젠카를 적대하는 길을 택하신다면, 저는.”
유리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해 보였다.
“성검을 포기하겠습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 역시 정의롭지 않은 수단을 택해서라도 당신과 맞서겠다.
그 말뜻을 이해한 황태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지금까지 성검의 주인이 아닌 유리엔을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유리엔의 독대를 허용하고 정말로 혼자서 이 밀실에 온 것도, 절반 정도는 믿는다고 한 것도, 반역을 입에 담으면서 그 대가로 오직 자유만을 원한다는 말을 어느 정도 납득하는 것도, 그가 성검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는 존재니까.
황태자가 봐온 유리엔은 성검의 주인이 되기 이전에도 그저 곧게만 살았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금욕적이었다. 그런 그가 성검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스스로 성검을 버린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과연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문득 섬뜩해졌다. 황태자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변했구나, 유리엔. 네가 협박을 할 줄 알게 되다니.”
“전하께서 손익을 계산하실 때에 고려해 주셨으면 하여 알려드린 것뿐입니다.”
“……뭐, 시험 삼아 해본 말일 뿐이다. 나는 아젠카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제국이니까. 그러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하를 믿습니다.”
유리엔은 결코 성검을 버릴 수 없다. 기억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황태자는 그가 성검을 버릴 가능성을 계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황태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았다. 경계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진짜 적이 되진 못할 거라 여겼던 인물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변수가 되는 일은 피해야 했다. 그는 얕게 한숨을 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1년 안에 나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거냐?”
유리엔은 잠시 침묵하다가, 곧 밀봉된 서류를 하나 꺼내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황제 폐하와 2황자 전하가 꾸몄던 사건의 전말이 이 안에 있습니다.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함께.”
“사건?”
“밝혀지면 제국민들과 귀족들마저 황제로부터 등을 돌리고, 창천기사단이 출동할 명분이 생길 사건입니다.”
“그런 딱 좋은 사건이 있다고?”
황태자가 서류에 손을 뻗자 유리엔이 그것을 막았다. 쨍한 하늘색 눈동자가 크루엔 황태자를 눈에 담았다.
“이것을 드리기 전에, 약속해 주십시오.”
“뭐, 아젠카와 너의 자유 말이냐? 정말로 그 사건이 네가 말한 대로고, 내가 제위에 오른다면 그쯤을 못 해줄까.”
어깨를 으쓱인 황태자는 테이블 한 쪽에 준비되어 있던 양피지와 깃펜을 당겨 오더니 빠르게 글씨를 휘갈겼다.
우아한 필체로 아젠카의 독립을 보장하며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더 이상 제국의 황족이 아님을 공언한다는 문장이 쓰였다. 그가 황제가 될 경우 효력을 발휘할 친필 서류였다.
서명까지 마친 황태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유리엔의 이름 뒤에서 성을 지웠다. 이름 뒤에 남은 지운 자국을 깃펜 끝으로 두드리며 황태자가 말했다.
“그때가 오면 네 성은 네가 새롭게 짓든가 해라. 아니면 내가 하나 내려줄까?”
“감사합니다. 그건 그때에 결정하겠습니다.”
“이제 되었느냐?”
“그 외에도 원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말해 봐라.”
“우선 약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약혼은 왜? 나를 지지하겠다면서?”
“그 수단이 꼭 약혼이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가장 깔끔하고 쉬운 수단이지 않느냐?”
황태자는 진심으로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결혼은 동맹의 증거이자 정략의 일환.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다. 유리엔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디아상트 공녀가 별로냐? 우리 쪽의 영애들은 많으니 다른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허?”
황태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얼이 빠진 낯이 되어 유리엔을 훑어 보더니 턱을 긁적였다.
“오늘 정말이지 여러 번 놀라게 되는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첩으로 들이거나 애인으로 삼으면 안 되는 거냐? 디아상트 공녀가 그런 것에 신경 쓸 영애는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