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92화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그녀는 찰나에 간부의 뒤로 이동해서 그의 오금을 걷어차 무릎을 꿇리고 목에 검을 들이댔다. 간부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게 아니야. 네놈들이 마음에 들어서 봐주는 것도 아니고.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데.”
“충분히 알겠으니 불쌍한 그 아이는 놔주렴, 아가씨.”
느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조금 전에 보스를 부르러 갔던 남자가 희끗한 머리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노파와 함께 돌아왔다. 노파는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에키는 간부를 여전히 붙든 채로 노파를 돌아보았다.
“직접 나오길 바라긴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나왔군요.”
“아가씨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보네? 놀라지 않는구나.”
“당신이 쐐기의 보스잖아요, 그랜마.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예의 바르기까지. 귀엽고 착한 아가씨잖아. 그런데 날 어떻게 알았지?”
노파가 푸근하게 웃었다. 난롯가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저 노파가 쐐기의 보스로, 본명인지 별칭인지 알 수 없는 ‘그랜마’라고 불리는 자였다.
처음 보스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에키도 꽤 놀랐다.
과거에 창천기사단을 모욕한 쐐기를 정면으로 상대하며 거의 궤멸 수준으로 만들자 저 노파가 튀어나왔었다.
당시 에키는 그랜마와 담판을 짓고 기오사를 모으는 과정에서 쐐기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이용했었다. 사채와 도박, 암살까지 관여하는 조직은 저질이었으나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몹시 유용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정말로 중요한 의뢰 얘기를 해볼까요?”
“아가, 그전에 그 아이부터 놔주지 않겠니?”
“놔주면 대화하기 이전에 칼부터 들어야 하잖아요. 조직원들의 피를 봐야 의뢰를 들을 건가요?”
“대화를 할 때는 칼을 넣는 게 예의란다.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그런 말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다섯 명과 저기에 숨어 있는 어설픈 마스터를 물러나게 한 다음에 해야죠, 그랜마.”
에키가 노파의 뒤쪽 그늘을 향해 턱짓을 하며 말했다. 그랜마의 주름 진 얼굴이 일순 굳었다. 에키는 버둥거리는 간부를 한 손으로 제압한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사라진 물건들은 확인했나요? 그게 흘러나가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죠. 그것 말고도 의뢰의 대가로 당신에게 제공할 게 많아요.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간 뒤처리가 힘든 것도 있는데, 주위를 물리는 게 어때요?”
“……어떤 걸 주려고 그러니, 아가?”
“글쎄요, 예를 들면 당신의 진짜 ‘아가’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 같은 것?”
그랜마는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딱딱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파가 조직원 모두를 물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키는 조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붙들고 있던 간부를 놓아주었다. 간부는 허겁지겁 창고 밖으로 달아났다. 그랜마는 유일하게 곁에 남은 남자 하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아가는 내 아들 같은 아이라, 곁에…….”
“당신의 오른팔이자 후계자잖아요? 그 남자는 남겨놔도 돼요.”
“……정말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아가씨는.”
노파의 입은 웃었으나 눈은 차가웠다. 에키는 그랜마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전 당신의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곳곳에 있는 쐐기의 지부와 안전가옥의 위치라든가, 조직원임을 숨기고 활동하는 자들이라든가. 그리고 당신이 아끼는 손자의 거처가 어느 도시의 23번지 저택이라는 것까지. 어느 도시인지도 말해 볼까요?”
“……그런 걸 함부로 말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니?”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저를 해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제가, 좀 강해요.”
“자신감이 넘치는 아가구나.”
“시험해 보셔도 돼요.”
“……그래, 아가씨는 강하다고 치자. 우리 아가들이 숨어 있는 걸 알아챈 건 아가씨가 처음이거든.”
그랜마는 아이을 어르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아가씨 주위의 사람들은 괜찮을까? 우리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단다. 원래 의뢰인의 신상은 비밀로 보장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지만, 아가씨는 좀 특이한 경우니까.”
명백한 협박이었다. 회귀 이전의 에키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기에, 이런 협박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잃을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잃을 것이 두려워 움직이지 않았다가는 아무것도 대비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아즈를 가지고 수작을 부리고 그녀를 악마로 만들었던 자들을 알아내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위험 부담을 감수하겠다는 것뿐이지, 정말로 위험해질 생각은 없었다.
에키는 그랜마가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가진 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럼 당신은 당신 자신과 손자를 포함한 쐐기라는 조직 자체가 몰살당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살기가 흉흉하게 치솟았다. 그랜마의 뒤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 칼끝은 에키의 살기로 인해 본능적으로 떨고 있었다.
에키는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노파를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
“저를 적대하면 쐐기는 살아남지 못해요. 그러니 제 의뢰에 따라 하얀 사자를 조사하는 것이 저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안전할 거예요.”
지워버린 과거에 그랜마가 그녀에게 기오사의 정보를 제공하며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아가씨 같은 괴물을 적으로 돌리느니 원하는 대로 정보를 내주는 게 훨씬 덜 위험하다고.
노파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에키를 관찰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상태라지만 그녀의 앳된 입매나 가느다란 목은 고스란히 보였다. 어디로 봐도 에키네시아는 어리고 곱상한 여자에 불과했다.
“오만하구나. 뭘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랜마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창고 문 쪽으로 향했다. 창고의 입구에 선 노파가 문을 반쯤 열고 밖을 향해 마당의 닭들을 부르듯 휘파람을 불었다.
에키는 태평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자 역시 칼을 뽑아든 채 그녀를 겨누고 움직이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고 잠시 기다린 그랜마가 그녀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여기에서 버티면, 아가씨의 말을 믿어보지.”
“버티지 못하면요?”
쾅, 소리가 나며 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럼 아가씨는 사라진 물건들의 위치를 뱉어낼 때까지 손톱이 뽑히고 나서 우리의 상품이 될 거란다. 잘해보렴.”
웃고 있는 노파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충 보아도 수십. 장소는 조직이 접선에 이용하는, 그러므로 각종 장치가 되어 있을 창고.
그에 비해 에키네시아는 검 한 자루만 가지고 있는 혼자의 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불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메시스트를 뽑아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험해 보라고 한 건 저니까, 숨은 붙여놔 드릴게요.”
그녀는 몰려드는 자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평온하던 그랜마의 얼굴이 푸르게 질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얀 검이 그리는 궤적마다 붉은 피가 솟았다. 에키네시아의 검이 닿은 자들은 부상을 입건 기절하건 간에 확실하게 전투 불능이 되었다. 양 떼에 사자를 풀어놓은 꼴이었다.
창고에 설치되어 있던 화살 함정이나 덫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뒤통수로 쏘아지는 화살을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피해 버렸다. 그러곤 명치를 향해 찔러 오는 단검을 밀어 방향을 바꿨다. 그 단검은 애꿎은 동료를 찌르고 말았다.
그랜마의 오른팔이자 마스터인 남자가 그들 사이에 합류해서 그녀를 공격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다른 칼날들 사이에 은밀히 숨어 마나를 머금고 다가오는 검을 에키네시아가 정확하게 받아쳤다.
그 검을 받아치는 순간에만 그녀의 검에 보라색 마나가 언뜻 어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효율적인 마나 운용이었다.
보라색 마나가 어린 검에 남자의 검이 닿자마자 남자는 신음을 흘렸다. 손아귀가 터져 피가 흐르며 검은 퉁기듯 날아가 버렸다.
담고 있는 마나의 양과 질의 차원이 달랐다. 철벽을 나뭇가지로 후려치면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법이다.
“그만!”
마스터인 남자의 검이 날아가는 걸 확인한 그랜마는 결국 조직원들을 뒤로 물렸다. 에키네시아는 물러서는 조직원들을 내버려 두고 멈춰 서서 검을 늘어뜨렸다.
그녀는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로브는 그녀의 것이 아닌 피로 그새 흠뻑 젖어 있었다. 주위에 널브러진 자들이 다친 곳을 움켜쥐고 신음을 흘렸다.
“약속대로 아무도 안 죽였으니, 데려가서 치료해요.”
에키가 널브러진 자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랜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팡이를 휘저었다. 조직원들이 급히 달려가 부상자들을 짊어지고 물러났다.
그동안 에키는 아메시스트의 칼날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어림 잡아 스물은 넘게 베었는데 날은 새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마법진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니 걸려 있다던 마법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주인아, 지금 고작 그런 거에 감탄하는 거야? 묻은 피 없애는 건 나도 할 수 있잖아! 내가 더 잘해!]
“시끄러, 발.”
[쳇, 이게 얼마만의 인간 상대인데 난 꺼내주지도 않고, 이 좋은 기회에 죽이지도 않고……. 야, 그러다 나중에 진짜 폭발해도 난 모른다.]
마검이 부루퉁하게 투덜거렸지만 에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가 연상될 정도로 희고 깨끗한 검을 바라보다가 조심조심 그것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사이 조직원들이 빠져나갔다. 핏자국이 고인 창고에는 에키와 그랜마, 손아귀가 터져버린 남자만이 남았다. 그랜마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정체가 궁금해지는데.”
“금방 알아낼 수 있다면서요?”
“대륙에 우리가 모르는 마스터가 존재할 줄은 정말로 몰랐단다. 그것도 이런 상식 밖의 실력자일 줄이야. 그 나이에 정말 대단하구나, 아가. 이제부터 아가씨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야겠지.”
“알아내는 건 상관없어요. 당신들이 알아내려 하는 걸 제가 막기도 어렵고. 다만…….”
에키는 그랜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옆으로 오른팔을 쭉 뻗었다. 가죽장갑을 낀 빈손이었다. 그 빈손에 엷은 보랏빛이 불꽃처럼 타올라 칼날 같은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그대로 그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검기는 어둑한 허공을 가르며 창고의 벽에 소리 없이 가 닿았다.
콰앙, 하고 폭음이 일었다. 거대한 쇠망치로 후려친 것처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흔들리고 벽돌들이 부스러져 모래가 되어 쏟아졌다.
마나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깊게 파인 대지가 속살을 드러냈다. 무너진 벽 너머로 창고의 밖을 포위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새파랗게 질려 주저앉거나 뒷걸음질 쳤다.
그랜마가 멍하니 완전히 박살 나버린 한쪽 벽을 보았다. 에키는 벽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뒷말을 이었다.
“저에 대해 무언가 하려 들 때는, 무척 신중해지셔야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