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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91화 (91/211)

검을 든 꽃 91화

“아…….”

신관은 짐작도 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급히 샤이 쪽에 놓여 있던 종이를 회수했다. 그러곤 깊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 아니에요.”

샤이가 화들짝 놀라 머리를 젓자 신관이 몹시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성녀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엘기오사는 신께서 인간에게 전해준 자비와 익애의 증거이며, 따라서 엘기오사 오너인 성녀님은 신께서 택한 자애의 화신입니다. 저는 신의 미천한 종이며 신이 증거하신 자애를 위해 예비된 자이니, 저를 당신의 수족이라 여기시고 뭐든 편히 명해 주십시오.”

자신보다 훌쩍 큰 성인 남성이 지극히 정중하고 유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샤이는 새파랗게 질려 에키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에키는 작게 한숨을 쉬고 샤이에게 신관의 말을 번역해 주었다.

“샤이, 이분은 성녀인 너를 돕기 위해 온 신관님이야. 모르는 것이나 부탁할 게 있으면 얼마든지 이분에게 말하면 돼.”

“……제, 제가 정말 성녀인가요?”

“엘기오사……. 그러니까 네가 가진 그 단검이 널 주인으로 받아들였잖아? 너는 그걸 쓸 수 있고. 그게 성녀라는 뜻이야.”

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관은 은근히 안도하는 낯이 되더니 에키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에키네시아 님, 제가 미욱하여 성녀님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아론 님, 조금 쉽게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송구합니다, 제가 무지하여 어찌해야 할지…….”

신관의 얼굴이 창백했다. 마주 앉은 샤이의 얼굴도 창백했다. 그들을 번갈아 본 에키는 포기하고 그가 제 쪽으로 당겨놓은 종이를 도로 잡아 당겼다.

“아니에요. 도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에키네시아 님!”

그녀는 오전 내내 신관을 도와 샤이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주로 앞으로 샤이가 어떻게 지내게 될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샤이는 대신전에서 지내게 된다. 성녀는 기오사 오너이지만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녀의 등장이 공표되었으니 이제부터 순례자나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을 터였다. 샤이는 성녀로서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엘기오사를 다루는 법을 연습하는 것은 물론, 성녀로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도 산더미였다.

그렇다고 샤이가 준비될 때까지 계속 그녀의 존재를 공개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대신전은 곧 있을 태양 축제의 마지막 날에 성녀를 정식으로 데뷔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성녀는 그날 낮에 일반 시민들 앞에서 신께 제례를 올리고, 밤에는 연회에 참석하여 각국에서 방문할 사절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아론은 계획과 일정을 상세하게 읊었지만, 샤이는 에키의 설명을 통해 배울 것이 많고 바쁘다는 정도만 간신히 이해했다. 소녀가 성녀라는 지위에 익숙해지려면 약간 시간이 걸릴 듯했다.

설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자리를 비웠던 창천의 기사 하나가 돌아왔다.

“단장님께서는 이미 제도로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오후 열차로 바로 아젠카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지금 표를 예매하고 올 테니, 식사를 하고 계십시오.”

“아, 저는 따로 이동해서 귀환하겠습니다. 들릴 곳이 있어서요.”

에키가 급히 끼어들었다. 기사는 의아한 듯했으나 특별히 그녀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스콰이어는 로드 직속이기에 로드의 명이 별도로 있지 않는 한 행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알겠다,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그럼 네 표는 예매하지 않도록 하지.”

기사가 떠나자 샤이가 몹시 불안한 기색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언니……. 어디 가세요? 가, 같이 가는 것 아니었나요?”

“잠깐 들릴 곳이 있어서. 괜찮아, 신관님과 기사님들이 샤이를 잘 돌봐주실 거야.”

샤이가 신관을 돌아보았다. 신관은 눈치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일정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녀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불과 얼마 전에 마을 사람들 전체에게 목이 졸리고 불타 죽을 뻔한 아이였다. 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려움은 짙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절 안의 올가미를 든 진흙 거인들은 샤이의 공포가 반영된 사념이었을 것이다.

에키는 내심 혀를 찼다. 하여간 대신전도, 성녀의 나이와 상황을 들었으면 좀 유하고 상냥한 신관을 보낼 것이지.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괜찮아, 샤이.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야. 다 좋은 사람들이고, 널 지키기 위해 온 사람들이니까 믿어도 돼.”

“그럼 이제 언니랑은 헤어지는 건가요? 다시 만날 수 없어요?”

자신을 구해줬고, 지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약속대로 그 괴상한 공간 속에서 거인에게 목이 졸릴 때도 구하러 온 사람이었다.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샤이는 에키의 품에 병아리처럼 매달렸다. 그러자 그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될 거고.”

“정말요?”

“그럼, 옆집이나 다름없는걸. 자주 놀러갈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먼저 가 있어.”

“네!”

샤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로소 안심한 모양이었다.

이후 함께 식사를 하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역으로 이동했다. 에키는 역에서 그들이 탄 열차가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자, 그럼 나도 가볼까.”

[근데 너 몸은? 아까 걔가 걱정했잖아.]

“어제 하루 푹 쉬었으니 충분해.”

그녀는 올라바트로 가는 표를 샀다. 방향이 약간 다르긴 해도 올라바트는 아젠카로 가는 중간에 있어서 돌아가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듯했다.

그녀가 예매한 열차는 늦은 오후에 출발했고, 항구도시 올라바트에 도착한 건 밤중이었다.

그녀는 바로 여관을 잡은 다음, 여행용 가죽옷을 걸쳤다. 혹시 몰라 마법 가방에 딱 한 벌을 챙겨 왔던 게 도움이 되었다.

밤이 완전히 깊어지자 어둠을 타고 지워진 과거에 보았던 비밀 장소로 몰래 숨어들었다. 알고 있는 장소인 데다 지키는 자들이 기사도 아니어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중요한 물건들을 훔쳐냈다. 인장과 장부, 조직원 목록, 열쇠 등의 조직의 사활을 좌지우지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온 에키는 잠을 청했다. 그녀가 일어난 건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다. 한가롭게 식사를 하고, 가죽옷 위에 후드가 달린 로브를 걸친 뒤 여관을 나왔다.

그녀는 뒷골목의 주점에 들어가 맥주 두 잔과 구운 감자를 시키고 쐐기모양 칼집을 냈다. 그 후에 종업원을 불렀다.

“주방장이 직접 사과를 하고 싶다는데요.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회귀 이전에 알아냈던 그대로라 몹시 순조로웠다. 그녀는 곧 으슥한 창고로 안내되었다. 쐐기가 의뢰인을 맞이하는 접선 장소 중 하나였다.

“의뢰?”

입가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에키는 그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조직 전체를 궤멸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면서 남겨 놓고 대답을 뱉게 했던 자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태연히 말했다.

“하얀 사자를 조사해 줘.”

“뭐라고?”

“하얀 사자를 문장으로 쓰는 곳. 알잖아?”

하얀 사자는 제국 황실의 상징이었고, 황실에 대한 조사는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쐐기가 음지에 있는 집단이라지만 이런 의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미친년이군. 끌어내.”

간부는 인상을 쓰고 턱짓을 했다. 순식간에 험상궂은 남자들이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와 에키를 둘러쌌다. 눌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텐데.”

“계집애가 정신이 나갔나?”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키는 그대로 그 팔목을 잡아채어 남자를 메다꽂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어떻게 내리친 건지 그자는 즉시 혼절해 버렸다.

피식거리고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일변했다. 그녀는 약간 신중해진 남자들을 무시하고 간부를 똑바로 응시했다.

“서른두 번째 벽돌 아래에 있었던 물건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 것 같아?”

“이년이 무슨 헛소리를…….”

“잠깐.”

간부가 손을 들어 으르렁거리는 남자들을 막았다. 흉터가 섬뜩하게 꿈틀거렸다.

“……정체가 뭐냐, 계집. 어느 조직 소속이지?”

“그냥 의뢰인이야. 내 의뢰를 성실하게 수행해 주기만 하면, 너희가 절실하게 원하는 걸 대가로 줄 의뢰인.”

“우리가 절실하게 원하는 것?”

“그 벽돌 아래에 있던 물건들 말이지. 세상에, 아직도 없어진 걸 몰랐어? 생각보다 허술하네.”

간부는 입을 다물더니 옆에 있던 남자에게 손짓을 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자 그가 목소리를 죽인 채 명령했다.

“너, 보스께 다녀와. 벽돌 아래를 확인해 보시라고 해.”

귓속말이었지만 에키는 고스란히 그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꼬고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마검이 어떻게 로아즈에 보내졌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마검을 가져다 둔 게 황태자인지 2황자인지를 알아내기로 결심했었다. 누군지 알아야 더 이상 로아즈가 이용당하지 않도록 대비할 수 있고, 복수할 계획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황궁을 조사하는 건 니콜에게 맡기기엔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때 그녀가 떠올린 방법이 바로 쐐기였다.

쐐기는 황궁을 조사하다가 위험해지든 말든 상관이 없는 자들이고, 지워버린 과거에 많은 것을 알아낸 터라 이용하기 좋은 조직이었다.

에키에게는 쐐기가 조직의 사활을 걸고 움직이도록 만들 방법도 있었다. 새벽에 훔쳐낸 인장과 장부는 그 일부에 불과했다.

간부는 여유로워 보이는 그녀를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겁이 없군.”

“겁먹을 이유가 없어서.”

“……아까 보니 체술을 익힌 모양인데, 고작 그런 알량한 실력을 믿고 있다간 몸 성히 나갈 수 없게 될 거다. 뭐, 계집은 쓸 곳이 많으니 불구로 만들진 않겠지만.”

간부가 후드에 감싸인 그녀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에키는 대꾸 없이 웃고만 있었다. 마검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투덜거렸다.

[같잖아서 못 봐주겠네. 주인아, 좀만 죽이자, 응? 죽이면 다 닥치고 얌전해질 텐데! 왜 참아? 저것들도 결절에서 죽였던 그놈만큼이나 나쁘 잖아!]

“살 기회는 줘야지. 써먹으려면 살려둬야 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육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간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살 기회? 써먹어? 살려둔다고?”

“어머, 들렸어?”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에키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당신들은 죽여도 별로 거리낄 게 없는 족속들이지만, 내가 되도록 살인은 피하고 싶어서. 의뢰할 것도 있는데 다짜고짜 죽이기부터 하는 건 좀 그렇기도 하고.”

“뭐 이런 미친 계집이……!”

간부가 왈칵 화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에키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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