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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90화 (90/211)

검을 든 꽃 90화

8막. 움직이는 것과 싫지 않은 것

결절에서 벗어난 건 6월 1일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유리엔은 곧장 마나 전보를 통해 성녀의 존재를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창천기사단장으로부터 경위를 전해 들은 영주의 경비병들에게 끌려 갔다.

그 뒤 그들은 샤이를 데리고 역이 있는 대도시 크리올라로 돌아가 하루 투숙하며 피로를 풀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연락을 받자마자 출발하여 열차를 타고 도착한 수석 신관과 창천기사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엔은 그들에게 샤이를 맡겨 아젠카로 돌아가도록 할 예정이었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는 에키네시아를 따로 불렀다.

그들이 머문 곳은 응접실을 가운데에 두고 침실 세 개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고급 여관이었다. 에키는 긴장한 채로 유리엔의 침실 앞에 섰다.

결절에서 나온 후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고 기절하듯 잠들었으니, 그 고백 이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셈이었다.

[난 이해가 안 가. 쟤도 네가 좋다고 했고, 너도 쟤가 좋다며? 근데 왜 좋아한다는 걸 숨기겠다는 거야?]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는데 부루퉁한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다 너 때문이니까, 입 다물어.”

[내가 왜? 좋아하면 특별해진다며? 그럼 네가 내 주인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랑 관련이 있어?]

“너처럼 단순하면 간단하겠지.”

[인간들이 너무 복잡한 거야! 치이, 하나도 모르겠어. 답답해 죽겠네.]

에키는 아젠카라는 도시와, 디트리히, 바론 같은 사람이 유리엔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난 며칠 사이에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리엔이 자라나고 가꾸던 터전과, 그에게 피가 섞인 가족보다 소중한 존재들을 모조리 망가뜨렸다. 마지막엔 그 역시 그녀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유리엔은 그 멸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지른 악마가 나라는 걸 알게 되면……. 좋아하는 마음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겠지.’

오히려 좋아한 만큼 더 큰 배신감과 증오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영원히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해도, 그녀 자신이 그를 볼 때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짓들을 떠올리는 한, 에키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른 모든 상황을 제하고 감정만을 보아도 그러했다.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

그가 고백했던 것도, 그가 내보인 마음도. 전부 없었던 일로 여기고 잊어버리자. 어차피 유리엔도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고 했었으니까.

무례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는 쪽이 더 기만이므로.

에키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서 눈가를 문질렀다. 화끈한 감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들을 삼켜버리고 똑바로 고개를 든 채 노크를 했다.

“로드, 스콰이어 에키네시아입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곧바로 들어가는 대신 잠깐 지체를 했다.

마스터임을 들킨 것, 그가 고백했던 것,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그의 약혼, 2황자인지 황태자일지 아직 모르는 마검으로 수작을 부린 세력, 그녀가 복수하려 들 경우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지만 그들의 혈육인 유리엔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불안감, 오른손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마검, 누적되는 살의, 결절, 가족들, 니콜 언니, 사관학교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어지럽게 생각이 몰아쳤다. 감정을 접어버리고 상황만 놓고 보아도 이따위였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정면으로 보이는 티테이블에 유리엔이 앉아서 서류 같은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움직임에 느슨하게 묶어둔 은발이 어깨 위로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오른쪽 창에서 들어온 아침의 여린 햇빛이 그에게 닿아 황금빛으로 부서졌다.

긴 속눈썹이 깜박이고, 그 안쪽에서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파란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고정된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입꼬리가 살짝 깊어진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은 미소와, 그녀를 향하면서 빛이 차오르는 눈동자.

고백을 듣고 나니 너무나 뚜렷하게 티가 났다. 그가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이.

“잘 쉬었나? 피로했을 텐데.”

조용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굳어 있던 에키가 움찔 놀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딛는 걸음마다 심장이 쿵, 쿵, 요동쳐 왔다.

저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를 구원했던 빛이.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다. 죄책감에서 눈을 돌리고 모른 척하면 저 남자는 그녀의 것이 된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잊어버리자고 결심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다. 다진 결심이 그를 마주하자마자 위태롭게 흔들렸다.

‘정신 차려, 에키네시아 로아즈. 되돌렸다고 해서 그 모든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아.’

얼마 전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유리엔의 시체가 그녀를 향해 내던지던 말들. 에키는 보이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깨물고, 간신히 대답했다.

“네, 편안히 쉬었어요. 로드께서는요?”

“나 역시.”

유리엔이 보던 서류를 접어 한쪽으로 치웠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아젠카로 돌아가기 전에 제도에 들릴 일이 생겼다. 그대는 동행하지 않아도 되니, 먼저 아젠카로 돌아가도록 해라. 전투의 피로도 남아 있을 테니.”

“전 괜찮습니다, 로드. 수행하겠습니다.”

“전부터 지적하고 싶었다만.”

에키가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유리엔의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갔다.

“그대는 분명 마스터다. 하지만 그대의 육신은 마스터라기엔 아직 약하지. 제대로 단련하려면 아무리 빨리 잡아도 1년은 걸릴 터. 그대의 몸은 이미 혹사당하는 중이니, 부디 무리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쟤 되게 잘 아네?]

마검이 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처럼 마검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지만, 유리엔은 지나치게 쉽게 그녀가 마스터임을 받아들인 데다 그녀의 상태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에키는 얼떨떨하게 그를 보다가 항변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로드.”

“그대가 아는 건 한계치겠지. 보통은 한계에 닿기 전에 멈춘다. 또 앓아눕고 싶은 건가?”

유리엔이 접은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항변을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이다. 아젠카로 돌아가도록.”

“……예, 로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는 사용하는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근육이 망가지기 직전의 상태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다치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니 몸살이 오는 건 당연한 반작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본 것처럼.

에키는 머뭇거리다가 서류를 봉투에 넣는 그를 향해 물었다.

“로드……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제 상태를 잘 아세요? 티가 많이 나나요?”

혹시 성검에게 탐지하는 기술 같은 게 있나. 그녀의 재능을 탄신 연회 때부터 알아봤다고 했었으니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마나를 이용한 특별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엔은 봉투에 밀랍을 떨어뜨리고 인장을 찍으며 느릿하게 답했다.

“그대가 티를 낸 적은 없다. 내가 그대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뿐이니.”

“…….”

“다시 말하지만, 그대가 마스터라는 사실 역시 그대가 밝히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할 테니, 결절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잊어버려도 된다. 아젠카로 돌아가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그는 봉투를 든 채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굳어 있는 그녀를 지나치며 그가 속삭였다.

“그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만 생각해라.”

에키는 그가 방 밖으로 나간 후에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질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니, 자신이 무슨 비밀을 안고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일까. 왜 뭐든 받아들일 수 있을 듯이 말하는 건지. 믿고 털어놓으면, 그는 받아들일 수 없을 텐데. 자신에게 두고 있는 마음의 종류가 바뀌어버릴 텐데.

그녀는 술렁거리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아젠카로 돌아가기 전에 올라바트에 들려야겠어.”

[거긴 왜?]

“알아내야 하는 게 있어서. 거기 써먹을 만한 놈들이 있잖아.”

[어? 걔들? 그 쐐기 모양 문신 새긴 놈들 맞지? 그때 진짜 신났는데! 잘 생각했어, 이참에 살의도 좀 풀자!]

“안 죽여.”

[왜애! 걔네 나쁜 놈들이잖아! 전엔 죽였으면서! 죽이자, 응? 다 죽이기 좀 그러면 몇 명만 본보기로 죽이면 되잖아. 그럼 말 잘 들을걸?]

“안 죽일 거니까 좀 닥쳐, 발.”

[에이, 재미없어…….]

에키는 유리엔의 침실을 나왔다. 유리엔은 봉투를 부치러 간 건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응접실에서 수석 신관과 마주하고 있던 샤이가 그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언니!”

소녀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에키는 샤이를 가볍게 안아 주고 수석 신관 쪽을 보았다. 젊은 청년 신관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

“안녕하세요. 음, 성함이…….”

“아르 세밧티엠. 수석 신관 아론입니다. 성녀님에 대한 업무 전반을 맡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아론 님.”

“성녀님께서 당신을 무척 의지하시는군요.”

신관의 눈길이 그녀에게 매달린 샤이를 향했다. 샤이는 에키의 드레스 자락에 파묻힌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뭔가 중요한 말을 하시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 어떡해요…….”

에키는 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흘깃 테이블 쪽을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빽빽한 종이가 샤이가 앉아 있던 자리 앞에 놓여 있었다. 신관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신관에게 들리지 않도록 샤이에게만 살짝 물었다.

“샤이, 글은 읽을 줄 알아?”

“……아뇨.”

샤이가 파랗게 질린 채 답했다. 정황상 짐작했던 일이라 에키는 웃으며 주눅이 든 소녀를 달랬다.

“괜찮아,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말하면 돼. 저 사람은 널 돕기 위해 온 사람이니까.”

그녀는 샤이를 데리고 신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젊은 신관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를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저 나이에 수석 신관 지위에 올랐다면 상당한 엘리트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아론 님, 샤이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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