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9화
유리엔은 떨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에키네시아, 나를 봐다오. 그대가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숨겨주겠다. 원한다면 나 역시 잊어 버리도록 노력하마. 그러니 나를 봐라.”
그가 말하는 ‘그것’은 그녀의 과거 전체였으나, 아마 그녀는 ‘마스터’라는 사실 하나로 알 것이다. 그래야 했다.
유리엔은 초조하게 그녀가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는 것을 기다렸다.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눈가가 붉고 벌어진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제발. 속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대가 마스터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대와 대련을 하길 원했었다. 대련을 하고 나면 답하겠다고 했었던 것들을 지금 말하겠다.”
여기서 그가 모든 사실을 고백해 버리면 그녀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유리엔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예전에, 그대를 탄신 연회에서 보고 기억했다고 했었지. 그때 그대에게 있는 재능을 알아봤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관심을 가졌고, 그대가 사관생도가 되자마자 스콰이어로 받아 들인 것이다.”
“재능을…… 알아봤다니요, 어떻게?”
그가 보았던 그 불씨를 재능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이미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과 진실을 섞어 그녀가 납득할 만하게 늘어놓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키네시아가 황망히 그를 바라본다. 공포는 어느새 가라앉았고 그 자리에 당황이 생겨났다.
그것을 알아차린 유리엔은 내심 안도했다. 어떻게든 납득은 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고여 있던 눈물이 사라지지 못하고 한 줄기 흘렀다. 그는 그 눈물 한 방울을 눈으로 좋았다. 그가 처음으로 보았던 그녀의 눈물이 떠올랐다.
마검에 물든 몸뚱이에서 솟았던 한 방울의 기적. 그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증거였었다.
‘지금 이 눈물도 같은 의미일까. 겉으로는 진정되었어도 속으로는 여전히…….’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물었다.
“이미 알고 계셨으면, 아까는 왜 그렇게 놀라셨어요?”
왜 놀랐냐니, 그대가 이름을 불러 준 것에 전율하고, 그 전율을 통해 내가 그대에게 완전히 미쳐 있다는 걸 다시 자각해서…….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불현듯 손아귀 안에 잡혀 있는 어깨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려서 한 손 안에 들어오는 어깨와 손끝에 느껴지는 가느다란 쇄골과,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흐느끼느라 달아오른 얼굴이.
유리엔은 기겁해서 손을 떼고 그녀로부터 물러났다. 아무리 그녀에게서 공포가 가셨다지만 이 와중에 욕망을 느끼다니 짐승인가. 아니, 금수만도 못했다. 에키네시아는 저토록 말간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
‘대답을…… 해주어야…….’
“그대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가 희게 비었다가 붉게 물들었다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거짓말을 많이도 했다. 감정까지 거짓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들어서.”
“……네?”
더듬더듬 말해 놓고 나니 귀가 뜨거웠다. 그는 에키네시아를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나직이 물었다.
“아까 제가 마스터인 걸 숨기고 싶어 하면 숨겨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로드께선 왜 제가 그것을 숨기려 하는지 아세요?”
“……그대가 알려준다면.”
알지만, 그대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 그런 대답이었다.
일부러 모호하게 표현한 그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러더니 불쑥 그를 향해 다가왔다.
유리엔은 기절할 듯이 놀랐지만 그의 놀람은 움찔 하는 정도로만 드러났다. 가까워진 그녀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럼, 왜 숨기려 하는지도 모르면서, 제가 원한다면 숨겨 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알면서 이리 하는 것이지만, 설사 몰랐다 해도 당연히 그리 했을 것이다. 그대의 결정과 그대의 선택을 믿는다.’
“게다가, 알려주기 전엔 그 이유도 묻지 않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그대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의 상처를 들출까.’
“……왜 저를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세요?”
‘그대는 누구에게든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하나같이 답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유리엔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보기 흉할 정도로 붉어졌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너무 티가 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이런 문제에 능숙할 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어쩔 줄 모르고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성검이 기막힌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지만 유리엔은 거기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로드……. 혹시.”
그리고 침묵하던 에키네시아가 폭탄을 던졌다.
“절 좋아하세요?”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었다. 유리엔은 자신이 지금 무슨 낯을 하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
그대를 좋아하고 있느냐고.
물론이다.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그대로 인해 변할 만큼.
그대 앞에서 말이 헛 나오고, 그대의 사소한 말과 표정에 감정이 종잡을 수 없이 날뛰고, 생전 몰랐던 욕망이 깨어나고, 내 안에 괴물인지 짐승인지 모를 것이 생겨날 정도로.
자제하지 못하고 말들을 쏟아낼 것 같아 그는 입을 가렸다.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긍정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성이 마비되어 예상이 되질 않았다.
이 와중에 그녀가 제 감정을 알아채준 게 묘하게 기쁘기도 하고, 그녀가 보기에 제 꼴이 어떨지 걱정되기까지.
부정할 수는 없으니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로, 로드, 제가 무례한 질문을…….”
“좋아하고 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에키네시아의 말을 끊었다. 서두를 떼니 뒷말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니, 그저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대를 사모하고 있다.”
의외로 입을 열자 마음은 쉽사리 언어가 되었다. 물론 이런 말로는 너무나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제 마음을 드러내긴 했다.
이제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유리엔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지켜보았다.
에키네시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고, 뺨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드러난 그 열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숨이 가쁜 것처럼 가슴께를 움츠렸다.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채 뒷걸음질했다.
명백한 거부였다.
그것을 인식하자 시야가 아찔해졌다. 유리엔은 무너지는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로부터 돌아섰다. 목소리가 갈라질까 싶어 숨을 들이켜고 꽉 막힌 것 같은 목으로 침을 넘겼다. 그녀가 거절의 말을 입에 담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에키네시아. 그저 내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뿐이니.”
이게 당연한 결과일 텐데, 너무 들떴었다. 그녀가 그에게 익숙해지고, 그가 준 검을 쓰고, 그를 향해 웃고,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를 싫어하지는 않는다지만, 그가 그녀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는 불편한 존재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에키네시아가 그의 앞에서 지워진 시간들을 떠올리고 공포에 질린 게 벌써 몇 번째인가.
그런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그녀 입장에선 섬뜩할 수밖에.
‘나를…… 다시 꺼리게 되려나. 피해 다닐지도 모르겠군.’
겨우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말하지 말 것을.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아마 그는 제 감정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감정이 숨기지도 못할 만큼 가득해져 흘러넘치고 있었으므로.
유리엔은 무너져 쌓인 검은 거인의 잔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그녀가 확실하게 거절한 건 아니니, 아직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노력할 생각이었으니까.
적어도 에키네시아는 그의 얼굴은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요 며칠은 그에게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그를 사랑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물론 절실히 원하지만, 불가능할 테니까. 그저 받아주기만 해도 좋았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그를 받아줄 것인가. 무심코 온갖 가정과 계획이 흘러갔다.
유리엔은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불길을 피해가며 제대로 걷고 있는 몸과 달리 정신은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그에게 접근하는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적의가 있었다면 모를까 적의가 없는 기척이었으므로.
그래서 팔을 잡혔을 때 정말로 놀랐다.
“팔, 다치셨잖아요. 지혈도 안 하시고.”
에키네시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 패티코트 자락을 잘라 그의 팔뚝을 감쌌다. 유리엔은 넋을 잃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텅 비자 똑똑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 떨리는 손, 울고 싶은 것처럼 젖은 눈. 숨길 수 없이 배어 나오는 걱정과, 미처 감추지 못한 슬픔. 왜?
그가 다치자 놀라 이름을 불렀고, 당황해서 그를 공격한 검은 거인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정체가 들킬 것을 감수하고 그녀가 결절에 들어온 건 어째서일까.
“샤이……. 그러니까, 엘기오사의 오너와 마을 사람을 다른 곳에 두고 왔어요. 데리고 오겠습니다.”
에키네시아가 떠나고 나서도 유리엔은 팔을 내리지 못했다. 매듭을 내려다보며 다시 되새겨 보았다. 그가 고백한 직후에 그녀에게 짧게 스쳐 지나갔던 열기를.
“……가능성이 있는 건가.”
받아주는 것도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받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줄 가능성이 있다면.
심장 가득 무언가가 차올라 주체할 수 없이 넘실거렸다.
이 장기 임무에 그녀의 동행을 요청하며 그는 그녀가 자신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었다.
결과는 나왔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자신은 이미 미쳐 있으니 포기하려면 성검을 버리고 모든 걸 잊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방금, 그녀에게서 가능성이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리엔은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