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8화
성검이 한숨을 쉬든 말든 유리엔은 순조롭게 움직였다.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진흙 거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쉼터 근처에 주위에 널린 기름과 불을 이용해 울타리를 만든 뒤에 발견한 사람들을 데려다 놓았다. 성녀의 흔적이 보이질 않아 초조해지는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지형이 괴상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위험한 곳은 아닌 것 같구나. 예전에 마검의 주인이 들어갔던 결절에 비하면 말이다. 엘기오사 오너만 빨리 찾아내면 되겠군.]
위험해 보이지 않자 랑기오사도 긴장을 풀었다. 유리엔은 성검의 의견에 동의하며 짊어진 남자를 쉼터 쪽에 가져다두려 움직였다. 곧 쉼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거기에 서 있었다.
‘왜?’
대체 왜 그녀가 결절에 들어온 건가. 그가 들어온 결절에 그녀가 들어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추고 있던 것을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대체 왜?
유리엔은 황급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짊어지고 있던 청년을 내던지다시피 내려놓고 그녀의 앞에 섰다.
에키네시아가 무사한지 확인하듯 그를 훑었지만 유리엔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왼손에 정신이 팔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손을 감싼 천에 진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대충 봐도 몹시 아파 보이는데, 그녀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저 미약한 당황만이 어린 채로 그녀가 제 손을 잡아 뺐다.
“별거 아니에요, 로드.”
분수대 앞에서 처음 그녀의 손을 쥐었을 때, 그는 뭐라고 빌었던가. 시간을 되돌려 보드라워진 그 작은 손이 두 번 다시 상처 입을 일이 없기를 원했다. 그게 고작 한 달 반 정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녀는 손에 상처를 입었다. 화상으로 짓물러진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춘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절에 발을 들인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두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인데 벌써 두 번째였다.
“……그대는, 대체, 왜 항상!”
왜 몸을 아끼지 않는가. 왜 위험에 제 발로 걸어들어 오는가. 아무리 그대가 강하다지만 그대가 무적인 것도 아니지 않는가.
행복해지고 싶다면서, 적당히 외면하고 살면 안 되는 건가. 그대가 조금쯤 외면한다 해서 죄가 되진 않을 텐데. 그대를 걱정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생각하지 않나.
울컥 솟구치는 감정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키네시아가 화들짝 놀라는 게 보여서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잘 진정되질 않았다.
“그대는 왜 결절에 들어왔지?”
“네?”
“왜, 결절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거짓말이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앞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유리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에키네시아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로드, 엘기오사의 오너를 찾았어요. 안전한 곳에 잠시 두고 왔습니다. 결절을 빠져나갈 방법으로 짐작 가는 게 있어서…….”
내내 찾고 있던 성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는데 반갑지가 않았다. 결절을 탈출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듣는데도 신기하지가 않았다.
“저, 로드?”
“……알겠다. 그 시작점이라는 건 저 안에 있겠군. 시험해 볼 만한 가설이다.”
돌아서서 쉼터 쪽으로 가서 문을 부쉈다. 손놀림이 거칠었다.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로드, 제게 화가 나셨나요?”
그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들었다. 그녀에게 화가 났냐고? 아니다. 그녀가 나서게 만드는 상황과,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없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좀 더 대단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그가 도움을 청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속이 쓰렸다.
그렇다고 그녀가 알아챌 정도로 티를 내다니 추하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에게 화를 내기까지 하고.
한심해서 자괴감이 들었다.
“그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미안하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못한 채 사과를 하고 쉼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감정에 휘둘리는 와중에도 그녀가 한 설명은 놓치지 않고 들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허공에 그어진 흠 같은 저것이 시작점인 모양이었다.
“저것인가?”
“예, 아마도요.”
랑기오사를 들어 그것을 찌르자마자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거대한 검은 거인과 함께 결절 내부에 있던 모든 진흙 거인이 몰려왔다.
효율로 따지자면 에키네시아에게 검은 거인을 맡기고 그가 진흙 거인들을 처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실력을 숨기길 원하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리엔은 그녀에게 진흙 거인들을 부탁하고 검은 거인을 맡았다.
덩치가 크긴 해도 재생 능력 외에 별다른 특수 능력은 없어서 검은 거인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핵을 찾기 위해 전신을 썰어봐야 하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유리엔은 재생형 마물을 상대할 때의 정석대로 차근차근 베어나갔다. 여유가 있자 성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인, 결절 말이다.]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는가?”
[아무래도 지워진 과거와 다른, 큰 변화를 발생시키려 하면 반동으로 결절이 생기는 것 같지 않나?]
“……확실히 그렇군. 공교롭게도 둘 모두 신검에 의한 현상이고.”
[시간을 되돌린 건 카이로스기오사고, 결절을 만드는 건 라키아기오사니까.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치면 가장 크게 변한 건 ‘마검의 악마’였던 그녀와 관계된 사건들일 텐데. 로아즈 영지 근처에서 결절이 생겼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마검의 주인이 조용히 정리해서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고? 그녀가 결절에 익숙한 게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뭐?”
[이런, 앞을 봐라!]
그녀가 모르는 사이 여러 번 결절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떠올리는 바람에 그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검은 거인의 손이 코앞에 들이닥쳤다.
인식하고 있었기에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피하는 게 조금 늦어서, 팔뚝이 길게 긁히며 피가 튀었다. 그 순간.
“유리엔!”
에키네시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엔은 그 목소리에 붙들린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하늘을 날았다. 하얀 검을 타고 보랏빛 불꽃이 일었다. 검은 거인의 정수리를 꿰뚫는 긴 궤적이 그의 눈에 비쳤다.
무너지는 검은 거인의 잔해보다 먼저 그녀가 불길 사이로 착지했다. 겁에 질린 얼굴과 젖은 눈동자가 그를 찾아 헤맸다.
“유…….”
그를 발견한 그녀가 또다시 이름을 부르려다, 말끝을 삼켰다. 눈이 느리게 깜박이더니, 서서히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그 자리에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유리엔 역시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가 제대로 검을 쓰는 모습을 맨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간결하고, 위력적이고, 아름다웠다. 마스터라면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마나 운용이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모습보다 그의 귀에 와 꽂힌 그녀의 부름이 더 강렬했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랑기오사의 기억 속에서 성검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던 이후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고작 이름을 불린 것 정도로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일었다. 성검 앞에서 오열하던 그녀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가 자제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를 붙들고 다시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애걸했을지도 모르겠다.
몇 남은 진흙 거인이 그들을 향해 몰려왔으나 에키네시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리엔은 성검을 들어 그것을 처리했다.
‘미쳐 간다기보다 이미 미친 거군.’
검을 휘두르며 그는 담담하게 제 상태를 인정했다.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하고 바라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동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져 버렸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거인들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에키네시아는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방금 그의 앞에서 마나를 사용했다. 그녀가 입에 담은 그의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키네시아.”
에키네시아가 흠칫 떨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키네시아? 괜찮은가?”
심상찮은 반응이었다. 유리엔이 다시 그녀를 부르자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녀가, 돌아서서 달아나려 한다. 사라지려 한다. 그를 떠나려 한다. 심장이 삐걱거리며 멈추려 했다.
“잠깐……!”
유리엔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더 물러섰다.
지금 놓았다간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손 안에 붙들린 가는 몸이 몸부림 쳤다. 경황이 없는지 바르작거리기만 하는 움직임이었다. 전신이 악기의 현처럼 떨고 있다. 그녀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에키네시아는 마물이 뿜어낸 산성액을 맞고 피부가 녹아내렸을 때조차 이런 얼굴을 하진 않았다. 그녀는 보는 그가 다 가슴께가 죄어들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나를 쓸 수 있는 것을 들켜서?’
그것만으로는 이 정도로 공포에 질릴 리가 없다. 아마도 그것을 기반으로 마검과의 관계를 그가 유추할까 봐, 그게 두려운 것이리라.
떠올리면 스스로에 대한 악의가 치솟고, 공포에 질리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 그래서 모조리 지워버린 것.
그녀에게 마검의 악마였던 과거는 이런 의미인 것이다.
알고 있었던 상처였으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보니 생각보다도 더 위태로워 보였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자 에키네시아의 몸부림이 멈췄다. 정안으로 보이는 혼이 물에 잠긴 빛처럼 흔들리고 깜박였다. 유리엔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덧붙여 말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들킨 게 아니다.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으나, 나는 그대의 상처를 파헤칠 생각이 없다. 그 과거들을 모조리 묻어버리길 원하면 나 역시 묻어버릴 테니.
“알, 알고 있었……. 어떻게……. 언제부터…….”
에키네시아는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더니 되레 더 파랗게 질려서 양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가 무너질 듯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유리엔은 급하게 그 몸을 지탱했다.
그는 당황했다. 안심시키려 한 말이었는데, 뭔가 실수를 한 건가? 들키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었나?
가린 손 틈으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손아귀 안에서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우는 건가?’
묵직한 무언가에 명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잘 우는 편이 아니다. 제 손으로 가족을 전부 죽였던 장소인 로아즈 저택에서도 울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울고 있었다.
웃기를 원했는데. 행복하길 바랐는데. 그가 그녀가 지운 과거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울게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