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7화
그날부터 시작된 야숙 생활 동안, 그는 영 멀쩡하질 못했다. 적어도 성검이 보기에는 그랬다.
유리엔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에키네시아와는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지속하려 안달이었다. 그녀가 한 말들은 집중해서 듣다 보니 거의 외워버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 앞에서는 쉽사리 튀어나왔다. 물론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 예를 들면 황가의 사정 같은 건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번갈아 밤을 새느라 마주치는 시간이 적었음에도 함께 지낸다는 상황 자체에 내내 들떴다. 바로 앞에 있을 때가 아니라도 근처에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잘 가라앉질 않았다.
유리엔은 지나치게 들뜬 마음을 다스리려고 나무토막으로 조각을 했다. 그가 스콰이어였던 시절, 심란할 때 나무토막을 조각하면 검을 섬세하게 다루는 연습도 되고 머리를 비우기도 좋다고 로드인 바론이 가르쳐줬던 것이었다.
그는 바론의 말에 따라 드물게 나무토막을 손에 쥐긴 했었지만 그것이 취미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유리엔은 검 외에는 취미가 없는 인간이었으며 욕망 탓에 심란해질 일도 없었다.
그러나 요 며칠, 그는 평생 조각한 나무토막의 몇 배는 될 법한 나무 조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
그 꼴을 지켜본 성검은 할 말이 많았으나 꾹 참았다. 인간 사이의 감정 문제, 특히 사랑과 관련된 건 자신이 끼어드는 게 역효과만 났었다. 랑기오사는 그 경험을 되새기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게 긴장이 되어 그는 계속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잠이 오질 않아서 뒤척이다 결국 막사를 나왔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 시간에 에키네시아가 남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소리 내어 웃은 탓이 컸다. 작게 흐른 웃음소리와 휘어진 눈매가 자꾸 떠올라서 잘 수가 없었다.
“로드? 왜 주무시지 않고.”
“오늘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낮잠을 과하게 잔 모양이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게 너무 기뻐서 표정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그는 골짜기 쪽에 시선을 두고 심호흡을 했다.
그 와중에 그녀가 꺼낸 말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 대련하실래요?”
유리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얼어붙었고, 이어서 생각이 폭주하듯 뇌리를 메웠다.
무슨 뜻이지? 혹시, 모든 걸 고백하려는 걸까? 이제 나를 믿을 수 있게 된 건가? 이렇게 빠르게?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나?
그저 평범한 대련 요청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녀가 그에게 평범한 대련 요청을 할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다.
대련이라니. 영원히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녀와 검을 맞대는 게 가능하다고?
유리엔은 멍하니 되물었다.
“……진심인가?”
“네. 로드께서 괜찮으시다면.”
담담하게 답한 에키네시아가 일어나서 자리를 잡았다. 유리엔은 따라 일어나지 못했다.
이게 현실인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건 착각이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눈만 돌려 아메시스트를 차고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천천히 현실감이 들었다.
정말로 그녀가 숨기고 있던 것을 그에게 고백한다면, 그 역시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그녀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녀의 비극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그것을 떠올리자 폭주하던 생각들이 희게 변하며 지워져 버렸다.
유리엔은 비틀거리며 그녀의 앞에 섰다. 에키네시아가 갈라진 목소리를 내다가 헛기침을 했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을 드시면 시작할게요.”
“그러지.”
기계적으로 대꾸하고 반사적으로 랑기오사를 뽑았다. 거기까지는 매끄러웠으나 손이 떨리는 바람에 성검을 떨어뜨렸다. 성검은 혀를 차는 소리만 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할까.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게 그 때문임을 알게 되면.
유리엔은 그녀의 반응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대련을 하자고 청하며 그녀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겠다고 결심해 놓고서, 정작 그때가 오니 그가 준비가 되질 않았다.
마음이 더 깊어져 버렸다. 너무 좋아져 버렸다.
겨우 그에게 익숙해진 그녀가, 이제야 그의 앞에서 약간이나마 웃는 그녀가, 그를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알게 되자 더 두려워져 버렸다.
증오할까. 원망할까. 외면할까.
떠날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떠나는 것보다 차라리 그를 찌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약 그녀가 차마 그를 죽이진 못하고 이제 두 번 다시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말라고 한다면,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원인이 자신이니 그리 해야 했다. 그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미 변해버린 자신이, 그녀의 부재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녀를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게 가능할까.
기억하는 상태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건 확실했다. 이 삶이 두 번째라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그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가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성검을 버려야겠지.’
그러면 에키네시아에 대한 것을 모조리 잊고, 이 삶이 그녀가 만들어낸 두 번째 기회라는 것도 잊고 살아가게 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히 지낼 자신을 생각하니 지독하게 역겨워졌다. 유리엔은 마른세수를 하고 간신히 랑기오사를 쥐었다.
에키네시아가 아메시스트를 뽑아 그를 향해 겨누었다.
짧은 정적. 달빛이 흰 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칼날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칼끝이 요동쳤다. 그녀는 검을 내팽개쳤다.
“에키네시아?”
본능적으로 정안을 떴다.
새카맣고, 새빨갛게 치솟는 악의.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찢어발기려 드는 악의. 비명을 지르는 혼. 그 고통을 보자마자 유리엔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들이 이기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하는 고백으로 인해 그녀가 그를 어떻게 대할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을 안 그녀가 받을 충격이 가늠이 되질 않았다.
15년에 달하는 세월을 그토록 힘겹게 보내게 된 원인이 고작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유리엔은 정안을 감고 맨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눈물이 고여 흐릿해진 눈으로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안색이 창백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애원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키네시아.”
그대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왜, 상처는 전부 그대가 짊어지고 있는가. 왜 스스로에게 악의를 겨누는가. 그대는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죄가 없음에도 죗값을 치렀다. 그러니 제발.
유리엔이 다가가자 에키네시아는 의미 없이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했다. 공포에 질린 몸짓. 그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폐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다.
제발. 차라리 나를 증오해라.
내가 그대를 악마로 만든 자다. 그대 대신 나를 원망해라. 그 악의를 내게 겨눠라.
그는 치솟는 말들을 토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골짜기 아래에서 불빛과 소음이 떠올랐다.
“마녀! 마녀를 끌고 와!”
외면할 수 없는 소란이었다. 유리엔은 하려던 말들을 눌러 삼키며 골짜기 쪽을 확인했다. 내내 기다리던 일이었으므로 파악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키네시아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엉망으로 무너졌던 그녀의 호흡은 어느새 고르게 돌아와 있었다.
그렇겠지. 그대는 강인한 사람이니까. 포기해 버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텐데, 끝까지 버텨 기적을 이루어낼 정도로.
그 점이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바로 그 점이 그녀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지탱해 주고 싶었다.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 소망을 위해 노력하려 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의 앞에서, 그로 인해서, 과거를 보고 고통을 느낀다. 아직 진실을 말하지 못했는데도.
“에키네시아, 저 아이가 엘기오사의 오너일 거다. 사람들은 내가 막을 테니, 그대에게 아이를 부탁해도 되겠나?”
“예, 로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유리엔은 바로 곁으로 온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제압하고 추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서 온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나하나 알아내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연이었다. 성녀가 이런 이유로 살해당했을 줄이야.
[엘기오사의 주인들은 특성상 수난을 겪는 경우가 많지. 저런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게 물어 뜯기게 되니까.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게 좋겠다.]
랑기오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유리엔은 대답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을 관할하는 영주에게 경위를 설명한 후 일차적으로 구금하고, 대신전의 성녀에 관한 성명서를 첨부하여 제국에 사건 개요를 알리고 처벌을 논의한 다음 고지하고 시행하는, 길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할 예정이었다.
대표 격인 주동자에게 어느 영주 소속의 마을인지를 묻던 유리엔은 등을 찔러 오는 불길한 예감에 대화를 중단했다. 마스터의 예민한 감각에 공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빠르게 쉼터 쪽으로 달려가 부서진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키네시아? 무슨 일……!”
[결절? 아니, 전에 결절을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체 이게 무슨…….]
그녀에게 물어볼 필요도, 성검의 경악한 중얼거림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결절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에키네시아와 사라진 성녀를 보자마자 상황 파악은 끝났다. 결절이 생겨났고 성녀는 삼켜졌겠지. 유리엔은 창틀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대는 또, 저 안에 들어가려 했겠지.’
바라하를 구하려 했듯, 성녀를 구하기 위해.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를 결절로.
아무리 제니스라지만 너무 자기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경험이 있어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고 해도 다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픔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저번에는 결절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오래 앓기까지 했으면서.
그녀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당황한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결절에 들어가자니 설명할 말이 없어서겠지.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감추고 싶어하니까. 그를 믿지 못할 테니까.
[주인, 지금 설마…….]
유리엔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결절로 발을 내디뎠다. 물거품을 통과하는 것 같은 괴상한 감촉이 전신을 휩쓸고 나자, 그는 현실 같지 않은 공간 안에 서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느냐?]
“내가 들어왔으니 그녀는 결절을 피하겠지. 내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성녀는 내가 구해내면 된다.”
[물론 너는 내가 봐온 주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탁월한 마스터다. 하지만 결절은 달라. 법칙이 다르단 말이다. 혹시라도 공기가 없는 공간이었으면 어쩔 작정이었느냐? 제니스인 마검의 주인도 장담할 수 없는 곳에 제발로……!]
성검은 조곤조곤 말하다가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유리엔은 주변을 살피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모두 삼키고 분리되는 게 결절이다. 공기 또한 삼켜지니 공기가 없을 리는 없다.”
[지금 그런 사소한 걸 따질 때냐?]
“이미 들어온 상황에 왜 들어왔는지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지.”
[다음에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
그는 대답하지 않고 랑기오사를 들어 쇠기둥 같은 나무를 건드려 보았다.
[이 나무, 닿지 않게 조심해라. 내 몸에 전해지는 열기가 끓는 쇳물 수준이다. 그리고 약속은 하지 않는 거냐?]
“노력해보겠다.”
[……그래, 노력이라도 해라.]
글러먹었군.
랑기오사는 빠르게 포기했다. 성녀를 구한다는 사명감으로 결절에 뛰어든 거라고 여기면 이해할 만했다. 사명감보다 마검의 주인이 결절에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는 게 뻔히 보였지만, 성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