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6화
맙소사, 왜 이렇게 귀엽지.
검의 정점에 오른 제니스이자 불씨를 태양으로 키워낸 눈부신 혼이, 전설을 현실로 끌어내어 시간을 되돌리는 기적을 이루어낸 사람이, 소녀처럼 볼을 붉히고 수줍어하고 있었다.
신기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끌어안고 입술을 대고 싶다.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어서 그는 그저 웃음만 흘렸다.
에키네시아는 더 말하기 부끄러운지 입을 다물고 아메시스트를 당겨 허리에 매려 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가죽끈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끈을 놓쳤다. 그러곤 손으로 귀를 막았다가 떼고 오른손을 흘깃 보았다.
[바르데르기오사가 무어라 떠는 모양이군. 하긴, 기분이 좋진 않겠지. 주인이 나 외의 다른 검을 주력으로 쓰겠다고 하면 나라도 기분이 좋진 않을 테니.]
내내 조용하던 성검이 그 모습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사소한 행동들도 마냥 예뻐서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던 유리엔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검도 질투를 하나. 아메시스트를 준비하면서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약간 걱정이 되었다. 마검이 기분이 나쁘다며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깜짝 놀랐다.
“로, 로드?”
“매는 것이 어려워 보여서. 잠시 손을 대어도 되겠나?”
등받이에 팔을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깝다. 그녀의 몸에서 꽃향기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달았다. 에키네시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지.”
유리엔은 그녀의 허리에 걸린 가죽 끈을 쥐었다. 끈을 매어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안는 형태가 되었다. 더 가까워졌다.
팔에 안긴 허리가 가늘었다. 드러난 목덜미는 희다. 달콤한 향이 얇은 피부에서 배어 나왔다.
좀 더 고개를 숙이고 힘을 주어 당기면, 그녀의 목과 어깨가 만나는 지점의 부드러운 살이 그의 입술에 닿을 것이다.
온전히 순수한 의도로만 끈을 매어 주려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불순한 의도도 아니었는데, 그녀와 가까워지니 저절로 불순해졌다. 가죽끈을 얽어매는 손이 떨렸다.
유리엔은 서둘러 끈을 마무리하고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매면 된다.”
“가, 감사합니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객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녀가 당황한 듯 그를 불렀다.
“어디 가세요?”
“……목이 말라서. 그대는?”
“아, 전 괜찮아요.”
“다녀오겠다.”
뒤돌아보지 않고 답한 다음 거의 달아나다시피 객실을 나왔다. 열차의 복도를 비틀거리며 걷다가 마침 눈에 띈 빈 객실로 냅다 들어갔다.
문을 닫고 기대서서 깊고 뜨거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흘깃 아래를 보았다.
“……미쳤군.”
[미쳤다고 할 것까지야. 신체 건강한 젊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랑기오사.”
[음?]
“못 본 척해주는 게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
성검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은 욕망이 가라앉을 때까지 객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 * *
열차에서 내려 마차를 탈 때는 일부러 두 대를 잡았다. 마차에서 잠도 자야 할 텐데, 유리엔은 그런 좁은 공간에서 그녀와 함께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밤새 마차를 타고 달려 한적한 마을에 도착해서 뒷산을 올랐다.
지워진 과거, 성녀는 이 근처의 골짜기에서 까맣게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불탄 오두막 속에서 웅크려 앉은 어린 소녀의 품에 은빛 단검이 있었다.
치유검 엘기오사.
녹색 넝쿨로 휘감긴 그 작은 단검은 불 속에서도 그을음 하나 없이, 소녀의 가슴팍을 꿰뚫은 채 꽂혀 있었다고 한다. 불길이 덮쳐 오자 소녀가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상처는 죽은 소녀가 엘기오사의 주인이었음을 증명했다. 엘기오사로 상처 입힐 수 있는 건 엘기오사 오너뿐이었으므로.
성녀가 타죽은 오두막은 근방을 오가는 약초꾼과 사냥꾼들이 공용으로 쓰던 쉼터였다. 쉼터를 쓰러 왔던 어느 사냥꾼이 시체를 발견했고, 시체의 품에 있는 단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영주에게 제보를 했다. 그 제보가 아젠카에 도달하여 창천기사단은 주인을 잃은 엘기오사를 회수할 수 있었다.
성녀 살해 사건을 저지른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까맣게 탄 시체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적었다. 시체가 발견되고 제보가 아젠카에 전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도 있었다.
그래서 유리엔은 지금 성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그저 몇 남은 단서와 흔적을 토대로 이 무렵의 어느 밤에, 다수의 사람들에게 끌려온 소녀가 불붙은 쉼터에 갇혀 죽었다는 것만 안다.
물론 성녀의 죽음을 막는 데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쉼터가 잘 보이는 능선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열흘 정도 머물 준비를 해 왔지만 운이 나쁘면 한 달까지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시기는 추측했어도 정확한 날짜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키네시아보다 빠르게 막사를 완성한 유리엔은 곧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로드의 수발을 드는 건 스콰이어의 업무 아니냐? 왜 네가 하는 거냐.]
랑기오사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는 막사 안의 그녀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답했다.
“시간이 남으니까.”
[마검의 주인 입장에선 불편할 텐데. 상관이 일을 하게 두는 꼴이잖나. 너도 스콰이어 시절을 겪었다면서 그걸 모를 리도 없고.]
“……안다. 그래도 해주고 싶어서.”
에키네시아는 요리를 할 줄 모른다. 요리사가 해주던 음식을 먹던 귀족 출신이니 요리에 서툰 게 당연하긴 했다.
문제는 그 서툰 점이 지워진 과거에 9년을 떠돌면서도 그다지 나아지질 않았다는 점이다. 못 먹을 음식을 만들진 않지만 개죽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머물렀다.
짐이 된다는 이유로 재료를 제대로 들고 다니지 않는 탓도 있었다. 그녀가 떠돌면서 들고 다녔던 조미료는 소금뿐이었으니.
사냥과 도축에는 능숙해졌으면서 조리 방법은 소금을 뿌려 굽는다. 혹은 물에 넣고 끓이면서 소금으로 간을 한다에 그쳤다. 그런 식사마저도 거르기 일쑤였다.
스콰이어 교육 과정에는 간단한 요리법도 들어가 있었으므로, 에키네시아도 지난 한 달간 요리를 약간 배우긴 했을 터다. 하지만 그래봤자 속성 과정이었다.
맛보다는 배를 채우는 데 치중하는 것. 신입 스콰이어들이 만드는 요리란 대체로 그런 법이다. 그러다 스콰이어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괜찮은 걸 만들게 된다.
물론 아무리 요리 경험이 늘어도 끝까지 먹을 만한 연료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오래 혼자 떠돌았음에도 그대로인 에키네시아처럼.
유리엔의 스콰이어 경력은 약 4년이었고, 그는 제법 요리를 잘했다. 단체로 임무를 떠났을 때 취사 담당이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이 임무기간 동안 자신이 요리를 할 생각이었다. 식량을 구입할 때도 재료를 좋은 것으로 넉넉히 챙겨 왔다.
결국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소리다.
그는 정성들여 재료를 다듬고 버터를 녹인 냄비에 볶았다. 메뉴는 무난한 비프스튜였다. 냄비를 저으며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입맛을 알면 좀 더 딱 맞춰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좋으냐.]
“좋아하는 편이긴 해도, 취미까진 아니다.”
[요리 말고……. 아니, 됐다.]
성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엔은 신중하게 간을 하느라 성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월계수 잎과 따로 챙겨 온 향신료까지 넣었다.
스튜가 끓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뒤늦게 나온 에키네시아는 그가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놀라 항변했다.
“신경 쓰지 마라. 시간이 남아 했을 뿐이니.”
유리엔은 태연히 대꾸하며 작은 접시에 스튜를 떠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맛을 봐주겠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권했지만 속으로는 긴장했다.
그녀의 입맛에 맞을까? 요리를 할 때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내밀게 되니 그 자신감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으, 네에.”
접시를 받아든 에키네시아가 김이 나는 스튜에 입김을 불었다. 그 소소한 동작도 그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예뻐 보였다.
눈매가 저절로 풀어지는 걸 느꼈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스튜를 머금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보며 유리엔은 이러다 자신이 정말로 자제를 못 하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로드께서 요리를 잘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감탄하듯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자제하기가, 힘들다. 유리엔은 시선을 피했다.
“……잘하진 않는다. 먹을 만하게 만들 수 있는 정도지. 나도 스콰이어 출신이니까.”
[온갖 정성을 들여놓고서 아닌 척 굴기는.]
그는 성검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그녀와 대화하는 데에 집중하기도 바빴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식상한 표현을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를 보고 긴장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에키네시아와 함께 그가 만든 요리를 먹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사관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디트리히에게 꽤 폐를 끼쳤지.”
“폐라니, 어떤 식으로요?”
너무 들떠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유리엔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18세의 유리엔은 정해진 선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아는 소년이었다. 나이를 좀 더 먹은 후에는 어느 정도 융통성도 생기고 그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타인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었다.
아직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위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 의도적으로 정을 두지 않으려 선을 긋는 태도에 홀로 지내며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까지 합쳐져서 가관이었을 것이다.
최대의 피해자는 룸메이트였던 디트리히였다. 디트리히는 상대가 제국의 황자라고 맞춰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말로 받아칠 만큼 얌전하지도 않았다.
디트리히는 대놓고 그에게 또라이 새끼라고 욕을 해댔고, 속 터지면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검술로는 도저히 유리엔과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흙을 뿌려대는 뒷골목식 싸움은 제법 해볼 만했다.
배척받으며 자랐다 해도 황자였던 유리엔은 난생 처음 저속한 막말을 들어보았고 흙투성이가 되도록 굴러 보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철이 든 이후 디트리히는 네놈이 그나마 사람다워진 건 절반은 자기 덕이라며 종종 투덜거리곤 했다. 유리엔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에키네시아에게 알리기엔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그는 말을 돌렸다.
“……일단 들지. 식는다.”
그녀는 그가 피해버린 대답이 몹시 궁금한 듯했다.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할 때 다시 물었다. 그녀와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는 것 자체는 정말 좋았지만 그 화제는 피하고 싶었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부족할 판에 그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는 창피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먼저 말을 꺼내신 건 로드인 걸요. 궁금해질 수밖에요.”
“그대가 말을 거니까, 들떠서 자꾸만…….”
또 말이 헛나갔다.
그녀 앞에서는 자꾸만 말실수를 하게 된다. 에키네시아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유리엔은 수습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