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5화
대놓고 기억이 있다는 티를 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엘기오사라고요? 그건 행방불명 아니었나요? 게다가 엘기오사의 오너라니…….”
에키네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잊고 싶어서? 아니면 그를 믿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그대가 마검의 주인인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녀로 인해 죽었던 그가 그렇게 말했다간, 그녀는 공포에 질릴 것이다.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이자 트라우마를 파헤치는 꼴이므로.
유리엔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봤자 그녀는 믿지 못한다. 자신을 왜 원망하지 않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냐고 묻겠지. 그럼 그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나로 인해 나락에 떨어졌으니, 나는 그대를 원망할 수 없다. 내가 그대를 악마로 만들었다.
15년의 고난이다.
그녀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전부 되돌렸다 해도, 되찾기 위해 겪었던 고통이 너무 길었다. 그녀에게 남은 상흔은 아직도 낫지 않았다.
‘내가 그대에게 관심을 가진 탓에 그대가 그 모든 악몽을 겪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는 견딜 수 있을까. 그대는 어떻게 할까. 나를 죽이고 싶어 할까.’
유리엔은 칼에 헤집어지는 듯한 익숙한 고통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전부 잊기를 원할 수도 있는데 파헤쳐 다시 상처 입힐 순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모른 척하고 있지 않나.
선택은 그녀가 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겠다. 노력하기로 결심했으므로.
그래서 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검을 손질하기 싫어하는 건, 단순히 귀찮기 때문인가?”
유리엔은 그녀가 왜 싸구려 검을 들고 다니는지 알고 있다. 알면서 물었다. 상처를 건드렸다. 그는 정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검을 쥐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아서요. 쥐고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싶었습니다.”
정안에 비치는 그녀의 혼이 일그러진다. 검은 자국 같은 것이 타오르는 혼의 위로 돋아나 휘감는다. 불꽃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유리엔은 밖을 향해 넘실거리는 대신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새카만 악의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악의였다. 에키네시아는 지금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여기고 있다.
그가 상처를 건드린 탓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말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건드리지 말 것을.
그가 후회하는 사이 그녀는 자신을 향하는 악의를 가라앉혔다. 불꽃이 일렁거리며 제 목을 죄는 검은 것들을 불태웠다. 에키네시아는 설핏 웃으며 말했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검 손질이 귀찮은 게 제일 큰 이유지만요.”
유리엔은 정안을 감았다.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더 검을 싫어하고 있었다. 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스스로의 목을 죄는데.
“역시 그대는…… 검이 싫은가?”
그가 준비한 검은 손질하지 않아도 되는 검이다. 분명히 그녀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 자체가 싫은 거라면, 주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검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검 선물이라니.
에키네시아는 정적 끝에 답했다.
“즐거울 때도 있어요.”
“어떤 때에?”
“대련할 때…….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즐겁습니다.”
즐거울 때가 있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철저하게 목적을 위해 검을 휘둘렀고, 필요할 때 외에는 검을 쥐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았던 그녀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만 검을 들었다.
그런데 대련하면서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니. 역시 처음에 짐작했던 대로 검 자체가 싫다기보다 검을 보며 연상되는 악몽이 싫은 모양이었다.
내심 그녀가 검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기에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녀에게 그런 느낌이 들게 한 그 상대가 지독히 부러워졌다.
“언젠가 그대와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몸을 굳히는 것을 보고서야 무의식적으로 품은 소망을 말해 버린 것을 깨달았다.
실수였다. 그녀 앞에 있으면 말이 자꾸 헛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사과했다.
“독촉하는 것이 아니다. 미안하군.”
“아, 아니에요.”
“어쨌든, 그럼…….”
그대를 위해 만든 검이다. 검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받아줄 수 있겠나.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데, 실제의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그대가, 그 검을 쓰는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바보처럼 말을 더듬는 게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도 잘 말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에키네시아는 의아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스스로의 상태가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러워졌던 유리엔은 그녀를 보고서야 자신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녀만을 위해 만든 선물을 처음으로 주려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게다가 그 선물이라는 게,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자각조차 못 한 상태에서 만든 물건이었다.
자각도 못 한 주제에 그의 검인 랑기오사와 비슷한 하얀 형태를 구상하고, 그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자수정을 박게 하고, 아메시스트라고 이름까지 지어 새겼다.
그래놓고서 검은 로드가 스콰이어에게 주기에 가장 무난한 선물이니 사심이 안 들어간 걸로 보일 거라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깨닫고 보니 사심이 안 들어가긴 무슨, 재료가 사심인 기오사라고 해도 될 법한 검이었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주려 했었다니. 유리엔은 난생 처음으로 과거의 자신이 창피해졌다. 그러나 이미 말을 꺼낸 상태라 물릴 수도 없었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챙겨 왔던 가죽 꾸러미를 꺼냈다.
성검과 나란히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구상했던 검이 그 안에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쥔 모습도 내내 상상했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마법을 골라 새겨 넣었다.
정말이지 부끄러울 정도로 마음이 담긴 물건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에키네시아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대 것이다.”
“이건…….”
“그건 손질하지 않아도 된다. 따로 관리해 줄 필요도 없고. 마법이 걸려 있으니.”
그 마법을 새겨 넣는 비용으로만 기사 하나의 연봉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다. 검 전체에 들어간 돈은 따져보지도 않았다. 자신의 물건이었으면 사치스럽다 여겼겠으나 그녀가 꺼내 드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한참 부족해 보였다.
‘더 공을 들였어야 했는데…….’
그녀에 비하면 너무 모자란 물건이었다. 유리엔은 불안하게 에키네시아를 살폈다. 검을 살펴보는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녀가 풀러에 새겨진 글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메시스트가 검의 이름, 맞나요?”
“그래. ……마음에 드나?”
에키네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별로인가. 역시 너무 급하게 만든 것 같았다. 아니면 혹시 검에 담긴 마음이 티가 나서 거북해하는 걸까.
유리엔은 당황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횡설수설 말했다.
“이물질이 검의 표면에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날의 강도를 유지하는 마법도. 반년마다 한 번씩 마나를 충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마나 충전은, 마법사들에게 부탁해도 되고, 아니면…….”
마나를 다룰 줄 알면 충전이 가능했다. 에키네시아 스스로도 충전이 가능하겠지만, 그녀는 마스터임을 숨기고 있으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가져와서 충전해 달라고 요청하면 좋겠다. 창천은 희귀한 마스터급 기사가 굴러다니는 곳이지만, 그래도 그 많은 마스터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충전을 해달라고 했으면 좋겠다. 꼭 그래줬으면 한다.
유리엔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슬며시 제 소망을 털어놓았다.
“……내가 충전해 줄 수도 있다.”
말해 놓고 나니 부끄러워졌다. 검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유리엔은 어쩔 줄 모르고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만 움켜쥐었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던 에키네시아가 웃었다. 환하다기보다 작고 부드러운 미소에 불과했으나, 그녀가 그를 향해 보이는 제대로 된 미소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로드, 정말 예뻐요. 잘 쓰겠습니다.”
웃었다. 그녀가. 일순 그녀를 제외한 주위 모든 것들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만이 또렷하고 선명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상상했던 그 무엇도 지금의 느낌에는 미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저 간결하게, 기뻤다. 행복했다.
그 표현이 담고 있는 모든 의미가 그의 내부를 채우다 못해 흘러 넘쳤다. 흘러 넘쳐서 미소가 되었다. 유리엔은 그녀를 향해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이거, 일부러 맞추신 건가요?”
“그렇다. 부담스러운가?”
혹시 담겨 있는 사심이 티가 났나? 그는 제발을 저리듯 놀랐다.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기성품 같지가 않아서 여쭌 거예요.”
“그대를 스콰이어로 임명하기로 했을 때 제작을 맡겼다. 완성된 게 얼마 전이라서. 그대에게 줄 기회를 잡느라…….”
아, 이런. 얼른 말끝을 흐렸지만 늦었다. 현실이 아니라 천국에 반쯤 걸쳐 있는 기분이라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나와버렸다.
그녀 앞에선 왜 이렇게 말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앞에서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멀쩡할 날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계속 줄 기회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
“그냥 아무 때나 불러서 주시면 되는데.”
“그대가…….”
“아니면 임명식 때 주신다거나. 기회는 많았잖아요.”
에키네시아가 의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유리엔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그대가 나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인 데다, 마음을 다잡으려면 그대를 봐선 안 될 것 같아 계속 만나지 않고 참았는데, 줄 기회가 많았다니.
“그대가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어서.”
“제가요? 로드를?”
“이제는 아니란 걸 안다. 저번에 그대가 내게 예쁘…….”
“잠깐, 잠깐, 잠깐만요. 그 뒷말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급하게 그의 말을 끊는 그녀의 얼굴이 그때처럼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