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4화
유리엔은 잠시 고민했다.
‘……그래, 그것부터 시작하자. 애초에 나는 그녀가 내 기억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않나.’
당장 기억을 드러내겠다는 건 아니다. 그녀의 상처를 헤집지 않도록 천천히. 천천히 가자. 고백해야 할 죄도 있으니. 그것을 떠올리자 언제나처럼 칼로 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통증보다 그녀를 원하는 욕심이 더 컸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임무에 동행해 주길 요청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대답을 기다리며 그는 몹시 긴장했다. 너무 흥분한 게 아닐까. 그녀가 그를 싫지 않다고 하는 것과 그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이 바짝 말랐다.
“아뇨, 가겠습니다. 스콰이어가 로드의 임무에 동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녀는 의외로 쉽게 동의했다. 그의 스콰이어니 동행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녀를 스콰이어로 삼기로 결정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들뜬 미소가 입가로 번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군.”
유리엔은 그 미소를 참지 않았다. 되레 더 환하게, 최선을 다해 웃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그것을 계기로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해서.
“그럼, 모레 오전 10시까지 여행준비를 갖추어서 단장실로 오도록. 일정은 1주일 이상, 상황에 따라 한 달까지 걸릴 수도 있다. 참고해서 준비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행정부의 사무관에게 요청하고.”
“……네, 로드.”
웃은 보람이 있었다. 에키네시아가 홀린 듯이 그를 보았다. 풀어진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 보였다. 풀어진 얼굴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그녀가 그를 보고 행복하게 웃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기다리고 있겠다, 에키네시아.”
그는 그녀가 취소할까 봐 걱정이 되어 얼른 자리를 떴다.
[결국 포기 안 하기로 한 거냐?]
성검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단장실로 돌아가며 대꾸했다.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럴 줄 알았다. 다른 인간들은 잘만 마음을 바꾸던데, 어째 내 주인이 되는 자들은 죄다 하나밖에 모르는 성격이어서는 역시 헛된 희망이었군.]
성검이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을 한 귀로 흘렸다.
단장실에 도착한 그는 서랍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브레드 폰 포움이 ‘사과’라는 핑계로 에키네시아를 불러들여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가 그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브레드를 포함한 노블레스 클럽의 몇몇 생도는 그 무렵 아젠카 시내 외진 곳에 있는 빈 저택을 빌렸다.
더불어 암시장에서 거래를 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약 종류를 구입했는데 무슨 약인지 알아내기 어려워 일부를 빼돌려 분석하느라 보고가 늦어졌다고 되어 있었다.
‘마취제라고.’
다수의 남생도, 몰래 빌린 외곽의 빈 저택, 암시장에서 구입한 마취제, 직접 만나서 사과하겠다는,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향한 요청.
합쳐지니 자연스럽게 더러운 함정이 그려졌다. 종이가 그의 손 안에서 우그러졌다. 일순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느리게 되돌아왔다.
유리엔은 이성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에 남은 분량을 마저 읽었다. 이안 펠레트로의 이름은 그 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충동질과 조언을 하고 빠져나갔겠지.’
이안 펠레트로가 얽힌 일은 대체로 그랬다. 증거를 찾기 힘든 이간질이나 부추김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랬는데도 펠레트로 저택에 남겨놓은 편지나 서류 등의 증거가 그 정도로 많았다.
이번 일도 그가 유도했겠지. 불현듯 타고 남은 뼈라도 가져다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유리엔은 다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런 함정 따위에 그녀가 걸릴 리가 없다. 실제로 그녀는 가지도 않았으니까.’
에키네시아는 브레드의 청을 무시했다. 게다가 창천기사단장인 유리엔이 그 ‘사과’ 이야기를 듣는 것을 이안이 보았었다. 그 탓에 아마 계획을 연기했을 것이다.
그 뒤, 마물 토벌에서 브레드를 부추기고 에키네시아와 연결해 주던 이안 펠레트로가 사망했다. 그래서 일이 완전히 흐지부지된 모양이었다.
보고서에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도 브레드 무리가 딱히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빌린 저택의 기한도 만료되었다고 되어 있었다. 다만 약은 계속 보관중이라고 했다.
유리엔은 뒷장이 아직 남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댄 채 호흡을 골랐다.
계획은 세웠으나 시도는 하지 못했고, 시도했더라도 그녀는 괜찮았을 거다.
그래도, 만의 하나라도 휘말렸다면. 그 가정에 상인의 저택에서 중독된 상태로 검을 휘둘렀던 에키네시아가 떠올라서 자제심이 박살날 뻔했다. 그의 목덜미에 파랗게 핏줄이 섰다.
[심정은 알겠는데, 죽일 생각은 말아라.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나?”
되묻는 음성에 스산한 한기가 묻어 났다. 성검은 잠시 침묵하다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시도조차 못 하고 미수로 끝난 일을 화풀이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래서 감히 그녀를 상대로 이런 짓을 꾸민 놈들을 내버려두라고?
유리엔이 새파란 눈으로 손바닥의 문양을 노려보았다.
“그건 네 사적인 판단인가, 아니면 랑기오사로서의 판단인가?”
주인의 눈이 돌아 있었다. 저건 말리는 게 불가능하다. 성검은 빠르게 체념했다.
[……랑기오사로서 말하자면, 악행까지는 아니지. 사지만 멀쩡하게 남겨두면 말이다.]
사지 멀쩡하게 살려두기만 하면 괜찮다는 소리였다. 유리엔은 보고서를 다시 집어 들고 남은 뒷장을 마저 살펴보았다.
뒷장에는 연관된 생도들의 목록이 있었다. 브레드를 포함해 총 다섯 명. 바라하를 통해 알아냈던 노블레스 클럽 구조와 비교해 보니 클럽의 주류는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장에 브레드에 관해 첨부된 사실이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알아낸 일이었다.
사관생도가 개인적으로 하인이나 하녀를 두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 출신 생도들은 몰래 개인 하인이나 하녀를 부렸다.
브레드 역시 그중 하나였는데, 최근에 그의 개인 하녀가 야반도주를 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하녀에게 손을 댄 것으로 추측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건 영 글러먹은 놈이로군.]
성검이 혀를 찼다. 유리엔은 서늘한 얼굴로 그 부분을 읽었다. 계획이 세워졌다.
직접 그놈들을 마주하는 것은 참았다. 그는 지금까지 감정적으로 폭력을 휘둘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에키네시아를 상대로 그런 더러운 짓거리를 하려 든 놈들을 앞에 두고도 이성을 유지할 자신은 없었다.
이 일을 공론화할 생각도 없었다. 지저분한 꼴을 이미 많이 본 에키네시아는 쉽게 넘길지 몰라도, 유리엔은 그녀를 이런 일과 엮인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행정실의 사무관 중 직속 정보원인 자를 이용했다.
연관된 생도 전원을 한 명씩 따로 호출한 사무관은 이 일의 증거를 정리한 것을 보여주며 요란하게 퇴학될 것인지, 조용히 자퇴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했다.
생도들은 처음에는 부정하거나 가문의 위세를 내세웠다. 그러나 사무관이 이 일을 공론화하고 단장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자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증거가 너무 명백했고,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를 건드리려 했다는 게 알려졌다간 가문에서도 비호해 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결국 다섯 명의 생도들은 각자 다른 사정을 대고 조용히 자퇴했다.
그중 브레드 폰 포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적의 습격을 받았다. 도적은 그를 질질 끌고 가 브레드에게 겁탈당하고 달아났던 하녀와 하녀의 가족 앞에 눈을 가린 채 던져 주었다.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브레드에게 확실하게 복수를 했다. 그는 사지 외의 다른 부위를 잃었다.
엉망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포움 후작은 길길이 날뛰었으나, 아들을 그렇게 만든 자들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습격했던 도적들은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고, 하녀의 가족은 누군가의 비호 아래 아젠카로 이주한 후였다. 제국 후작의 손길은 아젠카에 닿지 못했다.
모두 창천기사단장과 그의 스콰이어가 장기 임무를 위해 아젠카를 떠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1629년 5월 23일,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장기 임무를 위해 열차에 탔다.
열차 안에서 유리엔이 눈을 감고 있었던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1등 칸이라 해도 객실은 좁았다. 그런 곳에서 마주 앉으니 에키네시아가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고, 그도 긴장이 되어서 마음을 다스릴 겸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녀의 기척이 확연히 편안해져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유리엔은 이대로 자는 척을 하는 게 나을지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시선이 와 닿았다. 예민한 마스터의 감각 덕에 그녀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느끼고 있자니 얼굴로 피가 몰릴 것 같았다. 당황하던 그는 그녀가 잠깐 시선을 돌리자마자 얼른 눈을 떴다.
“어, 언제 깨어나셨…….”
“잠든 적 없다.”
풀어져 있던 에키네시아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긴장할수록 그는 우울해졌다.
유리엔은 이번 임무 동안에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게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빌었다. 그래서 그녀가 던지는 작은 질문도 기뻤다.
최대한 자세하게 대답했다. 말투가 딱딱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잘 몰라서 정성을 기울이기만 했다.
“임무의 내용, 이제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만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지금부터 갈 장소에서 엘기오사 오너이자 성녀인 여자아이를 불타 죽을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예언자도 아니고, 미래의 일을 알고 막으려 하다니. 그에게 과거의 기억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토록 애써 지운 과거다. 네가 그 지워진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성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슴께가 두려움으로 죄여들었다. 그러나 이미 알리기로 결심했었기에, 유리엔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이번 임무의 목적은 엘기오사를 회수하는 것, 그리고 엘기오사의 오너를 구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