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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83화 (83/211)

검을 든 꽃 83화

“휴가 하루만 주십시오, 로드.”

부단장실을 지나가다가 바라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리엔은 잠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바론이 혀를 차며 대꾸하고 있었다.

“한창 바쁜 시기인거 알면서 휴가라니. 뭘 하려고?”

“에키네시아 생도 문병 갈 겁니다.”

“…….지금 네 연애사업을 위해 바쁜 로드를 버리고 가겠다는 거냐?”

“다녀와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루만 쉬게 해주십시오.”

“그럼 지금은 열심히 안 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 애가 좋으냐?”

“……네.”

“그 애는 널 어떻게 생각하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노력해야죠. 그러니 로드, 휴가 하루만 주십시오.”

바라하가 당당하게 답하자 바론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저렇게 쉽게 제 마음을 밝히고, 노력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지독하게 부러워서. 자신은 목을 죄어 오는 복잡한 상황을 다 치워버리더라도, 그녀에게 고백해야 할 죄책감이 있는데.

“기다려봐라, 남은 일이…….”

바론이 서류를 뒤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엔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곧 성녀를 구하러 떠나야 해서 미리 해놓으려고 가져온 일감이었다. 꽤 많았다.

생각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부단장실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바론 경.”

“예, 단장님.”

“이것도 좀 부탁하지.”

유리엔이 바론의 책상 위에 서류들을 올렸다. 그 양을 본 바론의 낯이 창백해졌다.

“……좀 많군요.”

“전에 말했던 장기 임무 때문에 할 시간이 부족하군. 축제 준비라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이 기회에 바라하도 서류 업무에 익숙해지도록 함께 하면 괜찮을 거다.”

이번에는 옆에 서 있던 바라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론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유리엔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의심하기에는 유리엔이 지금까지 너무 성실했다. 스콰이어와 생도들이 결절에 삼켜져 제정신이 아닐 때도 일은 꼬박꼬박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단장님. 바라하, 미안하지만 휴가는 못 주겠다.”

“……예, 로드…….”

“미안하군. 수고하도록.”

유리엔은 그렇게 일을 떠넘기고 부단장실을 나왔다. 성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냐, 너는?]

스스로도 제가 한 짓이 유치한 질투라는 걸 알아서 유리엔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성검과 달리 디아상트 공녀는 그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공녀는 얌전히 제게 주어진 공간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움직였다. 공녀에게 붙여놓았던 직속 정보원이 유리엔을 찾아와 그것을 고했다.

“위즈덤 클럽 모임 장소로 가는 듯합니다.”

“위즈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소속된 클럽 말인가?”

“예. 그녀를 보는 게 목적인 모양입니다. 참, 이건 전에 명하셨던 브레드 폰 포움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수고했다.”

유리엔은 정보원이 내민 봉투를 서랍 안쪽에 챙겨놓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아상트 공녀가 무슨 목적으로 에키네시아를 만나려는지 모르겠지만, 만나지 않길 바랐다.

사관학교 쪽으로 향하던 그는 돌아오는 중인 듯한 디아상트 공녀를 발견했다.

“경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요?”

“내가 랑기오사를 포기하겠다고 결정한다면…… 선택의 범위가 무척 넓어지겠지.”

로잘린 디아상트에게 그 말을 한 건 반쯤 충동이었으나,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수단이었다.

기억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는 랑기오사를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에게 그런 이유가 있다는 걸 모른다. 버리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일 터.

성검이 없다고 해서 유리엔이 마스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창천기사단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혹여 그가 약혼을 거부하게 된다면 이용 가능한 무기 중 하나였다.

유리엔은 디아상트 공녀를 돌려보낸 후 사관학교 쪽으로 향했다.

에키네시아를 다시 보았다간 간신히 다잡는 중인 마음이 무너질 게 뻔해서, 임명식 이후 일부러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룸메이트인 앨리스 윈터벨과 함께 걷고 있었다. 앨리스를 향한 그녀의 얼굴은 편안했고 즐거워 보였다. 그 얼굴은 그를 발견하는 순간 경직되었다.

그녀는 그를 꺼린다.

유리엔은 그 사실을 새삼 다시 인식했다. 앨리스를 보내고 단둘만 남자 에키네시아는 아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에 차가운 돌이 굴러다녔다. 그럼에도 며칠 만에 그녀를 보게 된 것이 기뻐서 가슴 전체는 달아올랐다.

“에키네시아?”

“죄, 죄송합니다. 못 들었어요.”

기쁘면서 서글펐다. 뒤범벅되어 있던 감정은 그녀가 그의 말조차 놓쳐 버리자 완전히 아픔으로 기울었다.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을 정도인가. 정말로, 실낱같은 가능성조차 없겠구나. 뼈아픈 자각이 찾아왔다.

속내를 감추고 말을 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서 말이 헛돌았다.

클럽 간의 분쟁이란 소리에 문득 아까 정보원이 올린 브레드 폰 포움에 대한 보고서가 생각났다. 돌아가면 그것부터 확인하고 처리해야겠다.

“시키실 일이 있다면, 스콰이어 업무를 바로 시작해도 됩니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군.”

유리엔은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을 하고 빠르게 대화를 마쳤다. 이제 떠나면 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싫은 건가.

내심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결절에서 나온 직후에 함부로 그녀를 끌어안아서?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이상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임명식에서 던진 질문이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그녀가 그의 약혼에 큰 관심이 있을 리가 없으니 약혼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온갖 가정이 하나씩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시선이 그녀의 이마께에 길게 머물렀다.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인사까지 다 해놓고 뭐 하는 거지? 어차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니, 더 보고 있어봤자 미련만 남을 거다. 마검의 주인도 널 불편해하는 기색이지 않느냐. 어서 가자.]

성검이 독촉하듯 말했다. 이대로 돌아서서 가면 그는 곧 장기 임무를 떠나고, 돌아온 후에 약혼을 할 거다. 완벽하게 그녀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짐승 같은 감정이 날뛰며 뱃속을 할퀴었다. 그 짐승이 내지른 비명이 언어가 되어 튀어나갔다.

“에키네시아. 나와 마주하는 것이 싫은가?”

자제할 수 없이 물음이 나갔다.

당연히 싫을 테니, 대답하기 불편할 텐데. 공연히 그녀를 성가시게만 만들 질문이었다. 입 밖에 내자마자 후회했다.

“싫지 않아요. 싫은 게 아니라…….”

에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 와중에 드디어 그녀가 자신을 마주해준 게 기쁘고, 며칠 만에 본 그녀의 얼굴이 눈을 떼기 싫을 정도로 예뻤다.

약간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몸살이 그 정도로 심했던가. 더 이상 가늘어질 데가 어디 있다고. 제발 더는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걱정까지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내놓은 의외의 대답을 인식하는 게 조금 늦었다. 싫은 게 아니라니, 정말일까. 아니면 그저 로드에 대한 예의상 하는 말일까.

눈가가 저절로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싫지 않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싫은 것이 아니라면, 왜 그대는…… 나를 보지 않지?”

별거 아닐 그 말에서 가능성을 찾으려 애쓰는 제 꼴이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포기하기 싫은 건가, 나는.

유리엔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거나 얼굴을 굳히거나 난감한 기색을 보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가 한 예상 중에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에키네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리엔은 그녀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달아오른 채로 그녀가 말했다.

“예쁘셔서요.”

“…….”

[……음?]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고통이 그 말 한마디에 깨끗하게 날아갔다. 완전히 텅 빈 머리로 유리엔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붉게 물든 채 그를 보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더니 시선을 피한다. 어쩔 줄 모르고 표정이 흐트러진다.

했던 말을 당장이라도 주워 담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울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귀여웠다.

그 일련의 반응이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유리엔은 멍한 머리로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겼다.

‘싫어서 피한 게 아니라…… 예뻐서…… 피한 거라고?’

그러니까 싫지 않다는 소리였다.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의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뜻도 된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것이 가슴 안쪽에서 부풀어 올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몸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리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에키네시아의 얼굴이 그 탓에 더 붉어졌지만, 그것마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지옥을 기던 기분이 이렇게 간단하게 천국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감정을 통제하는 건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으로, 그녀에게로 이동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포기할 수 없다.’

웃음 너머로 유리엔은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다. 포기할 수 없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이미 변해 버렸기에 그녀를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라면 모를까, 그녀가 그를 싫어하지 않는데 그가 먼저 그녀를 놓을 수는 없었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결심이 섰다. 그를 보는 것이 그녀에게 고통이 아니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

그녀의 곁에 서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자신이길 원했다. 원하면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에키네시아.”

“네, 네! 죄송합니다, 로드.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아니, 상관없다. 그보다…….”

장기 임무를 떠나게 되면 그녀의 곁에 있을 수가 없다. 돌아오면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목을 죌 것이다.

그 전에 가능성을 확인해야 했다. 그녀가 그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그는 가능성만으로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 없으면 노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성녀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 임무 자체를 취소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이 임무에 그녀가 동행하게 되면, 그녀는 그에게 지워진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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