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2화
펠레트로 가문은 그 증거와 소문을 무마하고 피해 생도들이 속한 가문들을 상대하느라 난장판이 되었다.
쐐기는 로아즈에 대한 정보도 함께 보내왔다. 정말로 별다를 것 없이 무난하게 괜찮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나마 특징이라면 큰 기대 없이 후원했던 마법사가 현자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 정도.
에키네시아도 보통의 귀족영애처럼 살아왔다. 검을 쥘 일도 없고, 실제로 쥐어보지도 못한 삶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니 에키네시아가 마검은 그렇다 치고 실력도 최대한 숨기려 하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기사가 될 거라면서 사관생도부터 시작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너무 의심스러우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전히 기사가 되려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짐작되는 이유는 있는데 확신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녀가 그 길이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이라 판단했다면 그가 할 일은 조용히 돕는 것뿐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유리엔에게 그 모든 일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외에 의뢰했던 다른 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도 도착해 꺼림칙하던 이들을 솎아냈다. 그것도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쐐기에 대한 조사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를 힘들게 한 일은, 토벌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한 통의 전보로 시작되었다.
-로잘린 디아상트 공녀가 아젠카에 곧 도착할 것이다. 그녀와 약혼하도록 해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크루엔 황태자가 직접 보낸 전보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것.
그가 쓴 대로, 유리엔은 그 약혼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로아즈에 보내진 마검이 증발했다. 2황자 파는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초조해졌을 것이다. 그 와중에 유리엔이 로아즈의 딸을 스콰이어로 지명해 버렸다. 대놓고 로아즈를 비호하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창천기사단장이 스콰이어를 지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검 사건의 내막을 아는 이들에게 그것은, 3황자가 황실의 음모를 알아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3황자 유리엔이 황제의 의도를 알면서 마검을 숨기고 로아즈를 비호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거라면, 이건 지금까지 순종적이었던 3황자 최초의 반항이 된다.
게다가 사라진 마검이 3황자에게 있다면 그는 황제가 귀족 가문을 상대로 벌인 음모의 증거를 손에 넣은 셈이다.
유리엔이 마검 사건을 알아차렸다고만 해도 불안한데, 알아차린 게 분명한 정황에서 항의하지도, 사건을 드러내지도 않고 침묵하고 있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 사라진 마검은 어디에 있는지, 2황자 파는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황자 파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황태자 파는 그 움직임을 읽었다.
정확한 내막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략적인 건 파악했을 터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신경전이 3황자의 변화를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조짐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그래서 크루엔 황태자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2황자가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기도 했다.
너는 누구의 편이냐. 내게 굽히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적대할 것이다. 네가 정말 황위에 욕심이 없다면 나를 확실하게 지지해라.
황태자가 보낸 약혼녀는 그런 의미였다.
유리엔은 사라진 마검과 로아즈를 보호하기로 한 선택이 파란을 일으킬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것이 약혼이란 결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녀를 위해서는 가장 평온한 방법일지도.’
약혼을 하고, 황태자의 뜻에 따라 그의 검이 되어 2황자 파를 상대하면, 마검의 행방도 얼버무릴 수 있고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창천이 제국의 황위 다툼에 휘말리게 되는 건 피하기 어렵겠지만.
‘단장직에서 물러나는 건 무의미한 짓이고.’
이제 와서 그가 단장직을 그만둔다고 하면 본격적으로 제위를 노리려는 목적으로 보일 터였다.
게다가 제국의 압박 탓에 창천기사단장이 물러난다는 건 아젠카의 독립성을 훼손시키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단장이 바뀌는 것을 용납하느니 차라리 제국과 전쟁을 해서라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게 창천이었다.
‘크루엔 형님은 창천을 제법 잘 이해하고 있다. 무리하게 이용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황태자 파는 순순히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되도록 창천이 아니라 내게 집중되도록 잘 조율하기만 하면…….’
황태자에게 굽히는 것은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가장 평온한 길이었다.
반면 약혼을 거절하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혼돈으로 빠져드는 일이었다. 황태자와 2황자 양쪽에서 그를 적대하게 될 테니까.
유리엔 자신과 창천만 생각한다면 혼란을 감수하고 자립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창천은 결코 약한 집단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게 했다간 에키네시아의 평온은 완전히 망가질 확률이 높았다. 마검의 행방도 얼버무리기 어렵다. 그녀는 결국 휘말리게 될 것이다.
에키네시아의 삶을 위해서는 약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헛된 희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원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와 함께할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대답조차 듣지 않은 상태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리엔은 그녀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임명식 날이었다.
에키네시아는 또 몸살이 난 상태로 아프다는 말조차 없이 임명식에 참석했다.
얼마든지 미룰 수 있는 임명식인데도, 왜 늘 무리를 하는가. 대체 왜 자기 몸은 전혀 챙기지 않는지.
유리엔은 쓰린 속으로 임명식을 빠르게 진행할 것을 명했다.
“이로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기사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의 스콰이어가 되었음을 선언하노라. 이 서약은 죽음 또는 탄생이 있기 전까지는 영원히 효력이 유지됨을 고한다. 1629년 5월 19일, 아르 세밧티엠.”
영원을 맹세하는 선언, 서약문 교환, 나란히 새겨진 서명. 그 형식적인 절차를 행하며 유리엔은 약혼을 떠올렸다.
그에게 강제된 약혼의 상대가 에키네시아였다면.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 게 임명식이 아니라 그 약혼식이었다면. 이 종이가 스콰이어 서약문이 아니라 약혼 서약문이었다면.
서약문을 내려다보며 그런 가정을 해보았다. 계속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러다 결국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까지 깨달아놓고, 그녀와 결혼하는 건 이제야 처음 상상해 보았다.
순간적으로 현실을 모조리 잊을 정도로 달콤한 상상이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결혼이라니, 연결지어본 적조차 없던 일이었는데 연결 짓자마자 그것만 생각났다. 멍해진 머릿속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등등 떠 다녔다. 유리엔은 반쯤 넋을 놓았다.
“단장님, 아니, 로드. 약혼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에키네시아의 말이 그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축하드려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담담했다. 동요 없이 담담하게 그의 약혼을 축하하고 있었다. 얇고 서늘한 날붙이가 그 말을 따라 가슴께를 헤집고 나갔다.
그녀의 얼굴 위에 드리운 저 망사를 걷고 보면 다르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부질없는 희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살아서 행복하기만 하면 지켜볼 수조차 없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가짐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녀의 행복은 그의 사랑보다 중요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만약, 만약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그대의 평온을 희생할 수 있나? 혼란에 휘말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나?”
“……전 제 평온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아요.”
그녀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에키네시아가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만에 하나 그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를 선택할 미래 따위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를 선택하면 그녀의 평온을 망가뜨리게 될 테니까.
기적이 일어나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선택해 준다 해도, 그가 그녀가 겪었던 그 모든 악몽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면…….
가능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치밀어 오르는 절망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솟구치는 것들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만들어냈다.
“이해했다, 에키네시아.”
* * *
유리엔은 하얀 가죽으로 감싼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붙였던 검의 이름이 칼날의 풀러에 새겨져 있었다.
아메시스트.
그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입학하기 전에 준비했던 검이 완성되어 도착한 지는 며칠 되었다. 줄 기회를 잡지 못해서 아직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끝까지 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약혼을 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현명한 결정이다. 마검의 주인에게도 그게 나은 선택이고, 네게도 그게 낫지.]
성검은 은근히 기뻐했다. 그가 사랑에 빠지고 변화하는 걸 내내 못마 땅해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 디아상트 공녀에게 약혼하겠다고 말하고, 약혼식을 준비하라 명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로잘린 디아상트는 이 약혼의 의미를 잘 아는 여자였다. 외모도 아름다운데다 영리해 보였다. 결혼에 큰 기대가 없는 듯하니 결혼해도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듯했다.
에키네시아는 평온하게 스콰이어로 지내다가 순조롭게 기사가 될 것이다.
그의 스콰이어인 만큼 잘못하면 황태자의 검으로 움직여야 할 유리엔을 따라 휘말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의 스콰이어인 만큼 누구보다도 안전할 수도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이제 결정을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라, 쉽사리 포기가 되질 않아서.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
아니, 그냥, 그가 그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아서.
그 결정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메시스트를 그녀에게 줄 날을 미루듯 결정을 내리는 것을 미루었다. 성검이 종종 그를 독촉했으나 유리엔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음을 비우고 싶어서 일에 집중했다.
할 일은 많았다. 다음 달에 여름 태양 축제가 있었고, 시간이 되돌아간 걸 알고 나서 반드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일도 있었다.
성녀 살해 사건.
오두막과 함께 불탄 소녀의 시체와 엘기오사가 발견되었던 일.
“……성녀를 살린 후에 결정을 밝히겠다.”
[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미루기만 하는 것 아니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랑기오사는 그 마음이 정리되긴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주인의 표정이 워낙 고통스러워 보여서.
그 와중에 그를 좀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건 바라하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