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81화
그를 돌아본 바론이 무언가 말하려다 유리엔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은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뇌가 끓어올라 증기가 되어 시야를 모조리 뿌옇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결절에, 삼켜진 것 같습니다.”
“결절은 어디로 간 거지? 이미 분리되었나?”
“예, 방금 분리되었습니다.”
이미 분리된 결절에 들어갈 방법은 없다. 유리엔은 텅 빈 땅을 돌아 보았다.
제니스인 에키네시아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상황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절’은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황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정상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그녀는 결절 안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마물을 간신히 다 죽이고 나서도 먹을 것이 없어 마물 고기를 먹다 중독되기까지 했었으니.
언제나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녀를 욕심낸 탓일까. 그래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비극이 찾아오려는 걸까. 물에 잠겨가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무언가 믿는 것이 있으니 들어갔겠지. 마검의 주인이라면 무슨 일이 있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삼켜졌다는 걸 보니.]
성검이 달래듯 한 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유리엔은 그 말을 희망으로 삼아 이성을 지탱했다.
토벌단의 인원 점검을 하고 어떻게 할지 회의를 했다. 삼켜진 자들이 돌아올지도 모르니 결절이 해제될 때까지 머물기로 결정되었다.
근처의 성에서 물자를 공수해 와 간이 캠프를 치고, 단원들을 정비하고, 마물 토벌을 계획대로 진행했다.
유리엔은 토벌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막사에 남아 계속해서 빈 터를 지켜보았다.
일반 단원들은 그의 상태를 잘 몰랐으나, 그를 오래 알아온 바론이나 디트리히는 유리엔이 제정신이 아님을 금세 알게 되었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잠을 자지도 않은 채 틈만 나면 빈 터를 보고 있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다. 바라하가 사라진 바론도 침통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야, 네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사라진 스콰이어를 대신해 식사를 가져온 디트리히가 짜증을 냈다. 유리엔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입술은 메말랐는데 푸른 눈만 형형했다. 누구 하나 잘못 걸리면 사지를 토막 낼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건드리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단장으로서 필수적인 일은 꼬박꼬박 하고 있다는 게 더 섬뜩했다.
디트리히는 저런 유리엔을 처음 보았다. 만약,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정말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혹은 시체로 돌아온다면. 자신이 알던 유리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망할, 역시 걔를 좋아하는 거였잖아.’
질투도 안 하고 덤덤해 보여서 아닌 줄 알았다. 좀 더 자신의 감을 믿었어야 했다. 디트리히는 불안하게 친구를 응시했다.
저놈이 저런 식의 또라이는 아니었는데. 검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수도사처럼 살아서 또라이였지.
얌전한 놈이 돌아버리는 게 제일 무섭다더니.
디트리히의 알기 쉽고 반듯하던 친구는 지금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를 결절이 되어 있었다.
* * *
흰 까마귀 협곡에서 결절이 생겨나고 분리된 건 5월 13일 저녁이었다. 13일 저녁부터 15일 오후까지 약 이틀. 그건 유리엔의 생애에서 가장 긴 이틀이었다.
흐르는 시간만큼 불안이 차올라 목을 죄었다. 그녀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해가 갈까 봐 참았던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
마검으로 장난질을 했던 아비와 형제에게 칼을 들이댈 것이다. 그녀가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대신 복수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그를 진정시키려던 성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조만간 날 쥘 수 없게 될 수도 있겠구나. 미리 인사를 하지. 넌 제법 괜찮은 주인이었다. 앞으로도 잘 지내라.]
“…….”
[가만, 악행이건 뭐건 날 놓게 되면 마검의 주인에 대해서도 전부 잊잖아. 훨씬 낫군. 내 주인이었던 자가 미쳐 날뛰는 걸, 다음 주인의 손에 들린 채 처벌하게 되는 일은 사양이다.]
“……그런 일이 있었나?”
[있었지. 그자도 사랑 때문이었다. 적어도 너는 그리 되진 않겠지. 다 잊어버릴 테니. 그게 네게도 나은 결과일 거다.]
에키네시아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는 절망하여 복수를 하고, 그로인해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고, 편히 살아가라고? 유리엔이 짚고 있던 막사 기둥의 일부가 으스러졌다.
그녀가 달아나는 건 가정해 봤어도, 그녀가 죽는 상황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그간의 욕심이 무의미해졌다. 자신이 욕심을 낸 탓에 결절이 생긴 게 아닐까 싶은 망상마저 들었다.
이제 다가갈 수 없게 된다 해도 괜찮다. 그녀가 영원히 그를 꺼린다 해도 괜찮다.
더 이상 욕심내지 않을 테니, 제발. 지켜볼 수만이라도 있도록. 아니, 지켜볼 수 없게 되더라도 괜찮으니까.
그러니 신이시여 제발, 그토록 힘들었던 그녀가 두 번째 삶에서마저 행복해지지 못하는 일만은 없기를.
5월 15일 늦은 오후, 그렇게 기원하며 빈 터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캠프가 되돌아오는 것이 비쳤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살아 돌아왔다. 그걸로, 충분했다.
유리엔은 잠시 동안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허물어졌던 정신은 그녀에게 밀려나며 약간 되돌아왔고, 끼어든 바라하로 인해 완전히 돌아왔다.
에키네시아와 바라하는 결절 안에서 좀 더 친밀해진 것처럼 보였다. 가벼운 말투, 친근한 접촉.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다고 한 게 바로 전이었다. 유리엔은 들끓는 질투를 억누르고 몸을 돌렸다.
에키네시아가 살아서 행복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욕심은 참을 수 있다. 아니, 참아야 했다. 그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이안 펠레트로는 어떻게 된 거지?’
결절 안이 에키네시아의 말대로 무난했다면 이안 펠레트로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검술은 꽤 뛰어났으니까.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아마 어떤 식으로든 실력을 발휘해서 바라하를 살린 것일 터. 그렇다면 함께 끌려들어 갔던 이안은?
유리엔은 바론에게 에키네시아가 결절에 삼켜진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그녀는 넘어져서 삼켜졌고, 이안 펠레트로는 그 직후에 비틀거리다 결절에 닿았다고 했었다.
직접 보지 못했기에 정말로 실수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그는 그 보고를 듣자마자 그녀가 ‘의도적으로’ 이안 펠레트로를 끌고 들어갔을 가능성을 떠올렸었다.
결국 그녀는 바라하와 함께 무사히 귀환했고, 이안은 돌아오지 못했다.
‘일부러 끌고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단원들은 모두 살아 돌아온 그녀와 바라하에게 몰려 있었다. 유리엔은 혼자서 캠프의 막사들 사이로 걸었다.
결절에 그들이 삼켜진 지점은 에키네시아의 막사 바로 앞이라고 했었다. 그쪽으로 가보니 그녀의 막사가 불에 타 무너져 있는 게 보였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안을 뒤졌다. 꼼꼼히 뒤질 필요도 없었다. 불탄 남자의 시체를 발견한 유리엔은 그것을 조사했다.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였지만 뼈만 남은 건 아니라서 가슴팍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상처와 주위 흔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기사라면 누구나 이것이 검에 찔린 부상임을 알아볼 것이다.
‘이걸로 그녀를 특정하거나 처벌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혹은 남겠지.’
증거는 없고, 심증은 생긴다. 에키네시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는 그렇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안 죽였으면 그가 죽였을 자였다.
[……마검의 주인이 죽인 건가.]
성검이 불쾌한 듯 중얼거리자 유리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죽어 마땅한 자 아니었나. 네가 보기에 이안 펠레트로가 살아남는 게 정의였나?”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다. 죄를 밝히고 심판하는 게 정의니까. 이런 건 정의가 아니라 복수잖아. 너도 알지 않나.]
“그래서 그녀를 악이라고 할 건가?”
[그건 아니지만……. 주인, 아무리 나라도 선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을 추구하진 않는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란 말이다. 세상에는 선도 악도 아닌 게 훨씬 많다고.]
유리엔은 랑기오사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타다 남은 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그것으로 시체를 감싸며 물었다.
“그럼, 이건 악행인가?”
[……뭘 하려고?]
“완전히 태울 거다. 뼈만 남도록.”
[악행이지, 당연히! 당장 그만둬라.]
“그건 네 생각인가, 아니면 랑기오사로서 내리는 판단인가?”
[…….]
“이안 펠레트로는 살인을 저질렀다. 에키네시아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성공했겠지. 네가 담고 있는 정의는, 그런 자를 불태우는 게 성검을 잃을 정도로 악한 짓이라고 판단하나?”
[……아니.]
성검이 떨떠름하게 부정했다. 성검의 정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여기는 정의였다. 제국법대로 처리해도 화형이 나올 만한 일을 가지고 악하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 놈은 타죽어도 싸, 라고 말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유리엔은 묵묵히 시체를 감싸 들어 올렸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캠프를 벗어나 협곡 안쪽으로 들어가 그것을 뼈만 남도록 불태웠다. 남은 뼈는 불탄 막사 안쪽에 되돌려 놓았다.
이후 그는 그녀에게 의혹 어린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은밀히 작업을 시작했다.
쐐기가 보내온 정보에는 이안 펠레트로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들에 대한 증거가 꽤 되었다.
이안은 기숙사에 증거를 남겨놓진 않았지만 펠레트로 가문의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에는 증거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쐐기는 그것들을 입수해 왔다.
그 행적들은 예상보다 더 많았고 예상보다 더 저질이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까지 치면 아마 훨씬 더 많을 듯했다.
클럽이나 생도 간의 악감정을 부추긴 것, 다른 생도에 대한 헛소문을 조장한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도 있었다.
반면 순위전 대진표를 조작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거나 예산을 빼돌리는 등의 기사단 내에서 처벌이 이루어질 만한 일도 있었다.
가장 최악은 비품이나 검에 손을 대어 부상을 입거나 죽도록 유도한 경우였다. 이건 밝혀졌다간 기사단 내의 처벌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유리엔은 증거들 중 일부를 이안 펠레트로의 방에 가져다두었다. 방을 정리하다가 자연스럽게 발견되도록. 다른 것들은 펠레트로 가문을 입 다물게 하는 데에 사용했다.
차남의 사망이 정말 사고사냐고, 함께 들어갔다던 생존자들을 데려오라며 따지던 그들은, 수사를 원했다간 더 많은 죄목이 파헤쳐질 것을 짐작하고 침묵을 택했다.
침묵의 대가로 이안 펠레트로는 공식적으로는 명예로운 전사자로 처리되었다. 다만 사관학교 내에서 발견된 증거로 인해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