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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80화 (80/211)

검을 든 꽃 80화

“본 적이 없지는 않아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유리엔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랑기오사의 기억을 통해 본 에키네시아는 갈수록 마물을 능숙하게 상대했지만, 아무리 봐도 마물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 보였다.

그녀의 마물 대처법은 실전과 경험으로 체득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실전과 경험이란 대체로 부상을 동반했다.

“마물은 특이한 생태를 가진 것들이 많다. 인간을 상대할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 그에 대해 배운 바가 있는가?”

“……어느 정도는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배운 적 없으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겠지. 유리엔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걱정들을 삼켰다. 대신 사무적으로 회의에서 결정된 토벌단의 예정에 대해 읊었다. 마지막에 끝내 누르지 못한 걱정이 약간 튀어나갔다.

“그대의 검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마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생물이니, 내 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었으면 한다.”

제니스의 경지인 그녀는 그보다 월등히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적이란 소리는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그녀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많이 다쳐 보았다.

“제 검을 의심하지 않으신다고요? 제가 검을 쓰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에키네시아가 돌아서며 물었다.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실수했구나. 모른 척해야 하는데.

유리엔은 내심 자책하며 급히 변명을 만들어냈다.

“그대가 생도 선발시험을 치를 때 직접 보았다. 그리고, 순위전의 결과도 안다. 그대는 탁월해.”

납득했을까. 그는 초조하게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잠깐 침묵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주의해 다오. 마물은 인간과 다르니.”

“예, 주의하겠습니다.”

일단은 넘어간 모양이다. 겨우 안도한 그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시선이 마주치자 맥박이 빨라지는 게 체감될 정도였다.

불빛을 받아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뺨, 얇은 눈가의 피부. 보고 있자니 손을 대고 싶어져서, 그는 뒤로 조금 물러났다.

마음 같아서는 무의미한 대화라도 지속하며 함께 있고 싶지만, 이런 상태로는 더 큰 실수를 할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그런데, 단장님.”

그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눈길만 주자 에키네시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

“왜 막사에 돌아오셨으면서 불을 켜지도 않고 계셨던 건가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대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대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거나 오직 내게만 그대를 가질 자격이 있지 않나 하는 미친 생각까지 하다가, 이제야 뒤늦게 그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느라,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제가 주무시려던 것을 방해했나요?”

“……잠을 자려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대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런 사심이 없어 보였다. 속에서 온갖 욕망이 들끓기 시작한 자신과는 달리.

유리엔은 그녀를 마주하지 못하고 돌아서 버렸다. 에키네시아가 나갈 때까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마물 토벌이 시작되었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의 실력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걱정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는 걱정임을 알면서도 바로 등 뒤에 있는 그녀에게 모든 의식이 쏠렸다.

그리고 새삼 감탄했다. 이런 식의 보조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그녀는 완벽하고 깔끔하게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지금껏 순위에 따라 교체되는 임시 스콰이어를 많이 겪었으나 에키네시아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의 의식이 그녀에게 전부 쏠려 있지 않았다면 그녀가 뒤에 있다는 걸 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혼자 싸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편하면서, 등 뒤를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그녀와 검을 맞대보고 싶다.’

기사로서의 욕심이 또다시 차올랐다. 남자로서 원하는 사람과 기사로서 원하는 사람이 일치한다니. 심지어 남자로서든 기사로서는 이런 절실한 욕심을 느껴본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건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꺼리고, 동시에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으니.

게다가 그에게는 그녀에게 고백해야 할 죄도 있었다. 손 닿을 곳에 있는 사람을 두고 사지가 사슬에 묶여 있는 기분.

‘……미치겠군.’

유리엔은 답답함을 마물에게 풀었다. 마나가 노도처럼 밀려들자 그것을 증폭하던 랑기오사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혹시 화풀이를……. 아니다, 마물 상대로 화풀이면 건전하지. 이 기회에 마음껏 해라.]

무아지경으로 전진하던 유리엔은 점심 무렵에 토벌단을 멈춰 세웠다. 식사할 시간을 주어놓고 하늘을 살폈다. 혼란한 그의 심정과 별개로 회귀 이전 같은 참사는 확실히 방지해야 했으므로.

스펙터가 몰려든 건 오늘 밤이었다. 해가 질 때쯤 비가 오기 시작해서 해가 진 이후는 폭우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묵직한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니 달라진 것 없이 예상대로 비가 올 듯했다.

스펙터는 아예 캠프 쪽에 나타나지 못하게 막을 작정이지만 혹시 모르니 토벌단원들의 체력을 보존해 놓아야 했다.

귀환을 명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리다 에키네시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따라 하늘을 확인했고, 밤에 폭우가 내리리란 사실도 예상한 모양이었다.

에키네시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깜박이지 못하고 굳어버린 눈꺼풀 아래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신이 경직되었다가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그 반응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녀는 지금 그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설마, 내게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나? 이번 마물 토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안다고? 그녀는 이 시기에 마검에 휘둘리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유리엔은 당황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귀환을 명령했다. 그리고 굳어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짚으며 말했다.

“에키네시아 생도. 수고했다. 캠프로 돌아가면 푹 쉬도록.”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확신한 걸까? 아니면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 * *

유리엔은 비가 쏟아지는 내내 막사 안에서 고민했다. 그녀가 이 사건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모른 척하기로 결심해 놓고서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았었다.

결정적인 힌트를 주어버린 걸까.

에키네시아가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나. 아니면 아직 의심 정도일까.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떠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가 먼저 밝히지 않는데 그가 그녀의 상처를 들쑤실 수는 없었다.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유리엔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그만두고 막사를 나와 바라하의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바라하는 바론이 아들처럼 아끼는 스콰이어였다. 그를 잃고 바론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잘 안다.

에키네시아의 곁에 그가 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지만,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아직이라…….’

더 미칠 수도 있다는 건가.

모르겠다. 그는 아비와 형제의 견제 탓에 제대로 무언가에 애착을 붙여보지 못했었다. 두려웠으니까. 그런 그가 두려움에 짓눌리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첫 욕심이며, 처음으로 시작한 사랑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변해갈지 짐작도 되질 않았다.

그는 과거에 스펙터가 몰려나왔던 장소로 향했다. 미리 준비하고 간 것이라 스펙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수가 좀 많았다.

[그때 캠프를 습격했던 놈들이 전부가 아니었나 보군. 두 배는 되어 보이는데.]

“상관없다.”

많아봤자 물리력이 없는 스펙터였고, 그는 마스터이자 성검의 주인이었다. 수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도 무사히 모든 스펙터를 쓸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지워진 과거와 같은 참사는 완벽하게 막았다. 마음이 놓였다.

안개가 빼곡한 협곡을 벗어날 때까지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그의 기억을 알아챘을지, 그럼 어떻게 나올지, 그런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안개에서 벗어나 캠프를 보는 순간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맙소사, 저게 갑자기 왜 생겼지?]

캠프의 상공에 결절이 부풀고 있었다.

결절은 자연재해 같은 것이었다. 들어본 사례들은 있으나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타인의 경험을 지켜본 적은 있었다. 랑기오사를 통해 에키네시아가 결절 속에 들어갔던 것을 보았으니까.

유리엔은 미친 듯이 달렸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결절은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요란하게 울리던 캠프의 비상종마저 결절에 삼켜지면서 빗소리만 남았다.

대다수의 단원들은 무사히 대피했는지 밖에 몰려 있었다. 그는 빠르게 그들 사이를 훑었다. 분홍색 머리카락도, 태양처럼 빛나는 혼도 보이지 않았다. 혈관의 말단에서부터 얼음이 차오르는 듯했다.

설마. 에키네시아. 제발.

유리엔은 다시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에키네시아는 물론이고 이안 펠레트로도, 바라하 이슬라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결절. 혼란스러워진 캠프.

사람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며, 없어진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게 되는 상황. 몹시 드문 기회. 악의로 가득 찬 이안 펠레트로, 지워진 과거에서 결절 대신 스펙터가 날뛰었을 때 이안 펠레트로가 바라하 이슬라프를 사고로 위장해 죽였던 전적.

‘비슷한 상황이 왔으니 비슷하게 행동했겠지.’

그럼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왜 보이지 않는가? 그녀가 실수로 결절에 휘말릴 확률은 매우 낮았다. 이안을 막으려다 휘말린 것일까. 그녀라고 신은 아니니 방심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녀가 사라졌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존재하지 않는다. 혈관에 차오른 얼음들이 심장을 짓눌러 왔다.

‘이안 펠레트로를 미리 죽여 버렸어야 했다.’

에키네시아가 사라졌는데 이안 펠레트로가 악의 가득한 혼으로 여기에 남아 있었다면, 아마 자신은 그를 찢어 죽이고 성검의 자격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유리엔은 비로소 왜 성검이 그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는지 이해했다.

캠프가 통째로 사라진 땅의 가장 자리에 바론이 멀거니 서 있었다. 유리엔은 단원들 사이를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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