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79화
에키네시아.
유리엔은 막사로 걸음을 옮기며 그 태양 같은 혼을 되새겼다. 눈부시고, 강인하며, 위태로운 혼. 그는 그녀의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녀를 지탱해 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볼 때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해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를 돕고 싶다며 스콰이어로 삼고, 곁에 맴돌면서 사소한 변화에 집착하여 그녀도 점점 괜찮아질 거라 희망을 품고…….
“엉망이군.”
[뭐가 말이냐?]
유리엔은 성검의 말에 답하는 대신 걸음을 멈췄다. 그의 막사 곁에 그녀의 막사가 있었다. 막사 안에 그녀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그대로 간이침대에 기대앉았다.
그녀가 있는 방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두터운 막사의 천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릎 위의 깍지 낀 손이 비틀렸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녀의 곁에 있어준다면, 그녀가 더 이상 외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다면, 그가 굳이 자신을 불편해하는 그녀에게 다가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워진 과거를 아는 자신만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내심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그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디트리히가 말했듯 바라하는 좋은 남자고, 에키네시아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와 연인이 되어 행복해질 수도 있다.
그녀에게는 그 편이 가장 좋은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바라하와 그녀는 빠르게 친해진데다 함께 있으면 좋아 보인다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질척한 무언가가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라, 전신을 채워나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가.
불빛 하나 없는 막사는 새카만 어둠이었다. 유리엔은 그 어둠 속에서 바라하를 향해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제대로 된 웃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날, 기사단 본부 앞에서 그를 맞이하며 밝아졌던 그 표정을 상상했다.
그녀가 그가 아닌 다른 이에게 그 웃음을 보이고, 손을 내밀고, 맞닿는다면.
생전 몰랐던 거친 욕망이 일었다.
누구든 그녀에 대해 알면 매혹되고 말 것이다. 바라하든, 다른 누구든. 유리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토록 눈부신 존재니 누군가가 에키네시아에게 매혹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 누군가를 향해 웃어주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 품에서만, 나를 향해서만 웃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 오직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몰아치는 욕심이 가슴께를 쥐어짜는 듯했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아까부터 왜 그러느냐, 대체.]
성검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유리엔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숨을 골랐다. 내뱉는 숨이 짐승처럼 뜨거웠다. 날것처럼 비린 감정이 속에서 미쳐 날뛰었다.
내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위해줄 수 있다. 그녀를 위해 살 수 있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녀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저 태양은 내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었다. 미쳤다고 판단하는 이성과 막무가내로 으르렁대는 욕망이 있었다.
뒤엉켜 혼탁해진 감정들. 이건 뭔가. 이런 괴물 같은 것이 내 안에 언제부터 있었는가.
목 안쪽이 사막처럼 메말랐다. 유리엔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미쳐가는 것 같군.”
전에 디트리히가 늘어놓고 갔던 말이 순간 떠올랐다. 좋아하는 여자 근처에 남자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다던가. 여자라도 너무 친하면 싫을 거라던가.
그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때 그는 뭐라 했던가. 제정신이 아닌 소리라고 했었다. 디트리히는 원래 사랑은 정신병 같은 거라고 대꾸했었지.
그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지금 자신은.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건가?”
성검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신음과 혀를 차는 것과 사레가 들리는 것을 합치면 날 법한 이상한 소리였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침묵하더니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설마 지금까지 그런 뻔한 걸 고민하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네가 변했잖느냐.]
유리엔이 멀거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문양이 희미하게 반짝이다 가라앉았다.
[……나는 검이니 사실 인간의 감정은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껏 수많은 인간을 지켜본 경험상 말하는데.]
성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 변화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본 바로, 인간이 타인을 위해 변하는 경우는 사랑뿐이었다.]
“변한……다고.”
[그래. 내가 왜 네게 그녀와 엮이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것 같나.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급속도로 바뀌어. 그게 얼마나 강력한 힘인 줄 아느냐? 내 주인이 될 정도로 정의를 추구하던 자를 하룻밤만에 복수에 미친 살인마로 만들 수 있는 게 그 감정이다.]
“…….”
[봐라, 너는 이미 변했고, 변해가는 중이며, 변하는 이유는 그녀잖나. 네가 나에게 뭐라고 했었지? 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녀를 보고도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거라니 뭐니 했었잖아. 하,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냐, 멍청아.]
성검이 한심하다는 듯 타박했다. 유리엔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음속에서 격랑이 일었다.
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감정이,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거란 말인가. 그렇게 간단한 표현으로?
랑기오사는 자포자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너를 막고 싶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고, 이번에도 실패했지만. 누가 막는다고 막아지면 그게 그렇게 강력한 감정일 리가 없지.]
“……그녀를 독점하고 싶어지는 것도 정상인가?”
[인간은 흔히 사랑하면 독점하고 싶어 하더군. 음……. 생각은 자유다만,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마라. 난 되도록 네가 천수를 누릴 때까지 내 주인이었으면 좋겠다.]
성검의 푸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욕망마저도 사랑이라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막 자각한 감정이 형체를 얻어 사지를 짓눌렀다.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유리엔은 또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생각해 보니 깨달음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녀를 존경하고 그녀의 행복만을 원했다면, 그녀가 그를 보며 불편해한다는 걸 안 순간 물러났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이미 내린 결정이라는 이유로 스콰이어 지명을 취소하지도 않고, 그녀 근처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그녀를 보며 욕망을 느꼈고, 바라하를 교육 담당으로 붙인 것을 후회했다.
그녀가 조금 풀어진다는 이유로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하기도 했으며, 그녀가 그를 보고 미소지어 주기를 절실히 원하기도 했다.
“하…….”
바보 천치가 따로 없군.
유리엔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는 순간, 막사 입구에서 인기척이 났다. 입구의 천을 젖히고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유리엔은 뻣뻣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그녀도 안에 그가 있는 것을 몰랐었는지, 그대로 굳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아챈 그들이 숨을 멈췄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구나.]
침묵을 깬 것은 성검의 중얼거림이었다. 유리엔은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등불을 찾았다.
불을 붙이고 그녀를 보았다. 에키네시아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주홍색 불빛을 받은 탓에 열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에키네시아 생도.”
어른거리는 불빛과 어둠 속에 잠겨 그의 막사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라니. 조금 전까지 하고 있었던 생각을 고려해 보니 환상이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그녀가 그의 막사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온갖 가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전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가 그에게 지워진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다거나 하는 식의.
찰나 스쳐간 가정 중에는 육욕 어린 상상까지 있었다. 유리엔은 그런 상상을 한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가, 간신히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로 왔지?”
에키네시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품에 안고 있던 것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이걸, 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돌려준다니, 무엇을?
그는 그녀가 내민 것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분수대 앞에서 그녀에게 걸쳐주었던 검푸른 망토.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돌려놓으려 온 건가. 그것도 내가 없을 줄 알고.’
그가 떠올렸던 건 역시 전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유리엔은 멍하니 곱게 접혀 있는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이것을 돌려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이걸 계기로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았으니 나쁘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아직 에키네시아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망토를 돌려주러 와서 돌려줬으면 그대로 돌아가면 그만일 텐데, 왜 남아 있지? 뭔가 할 말이 있어 남아 있는 걸까?
사실 망토는 핑계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소망이 솟았다.
별것 아닌 대화라도 좋았다. 사소한 질문이라도 기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방금 실망해 놓고 또다시 기대가 생긴다.
유리엔은 눈을 내리깐 채 갈등했다. 긴장으로 피부가 팽팽해졌다. 몇 차례 입안에서 말을 곱씹으며 고민하다가 겨우 물었다.
“그저 이걸, 돌려주러 온 것뿐인가?”
“……네.”
에키네시아의 대답은 간결했다. 맥이 탁 풀렸다. 그러자 스스로의 꼴이 우스워졌다. 대체 뭘 기대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괴감이 차오르는데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아, 저번에 약과 생강차……. 감사했습니다.”
“……그것들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나?”
“네. 무척이나.”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구나. 아주 조그만 도움이겠지만, 그래도. 그 말 한마디에 아래로 처박히던 기분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거울을 보고 연습할 땐 어색하기만 했는데, 그녀의 앞에선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웃음이 나왔다. 진심이 이끄는 대로 풀어놓기만 하면 되었다.
에키네시아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단장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키네시아 생도, 잠시.”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어깨를 잡으려다 그녀가 멈추는 바람에 감히 잡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불러놓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대뜸 불렀는데, 생각해둔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그대는 마물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