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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8화 (78/211)

검을 든 꽃 78화

에키네시아는 본부 건물 앞에 있는 화단 근처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드레스 아래로 보이는 종아리에서 발목으로 이어지는 날씬한 선.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을 머금고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약하게 한숨을 내쉬는 벌어진 입술. 열이 있어 평소보다 조금 흐린 눈동자. 피곤한 듯 표정 없이 가라앉은 얼굴.

유리엔은 입구에서 멈칫 섰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돌아본다.

내리깔고 있던 속눈썹이 크게 떠지며 깜박이고, 그 아래의 눈동자가 그를 담고, 아, 왔다, 하는 미미한 반가움이 흰 얼굴에 퍼져나갔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아마 그녀는 기억하지도 못할 일.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미소라고 하기에도 무리인, 그저 기다리던 사람이 와서 드러난 아주 작은 기쁨일 뿐이었다.

그러나 유리엔은 그 순간 깨달아 버렸다. 그녀가 그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자신이 얼마나 절실히 원하고 있는지를.

쿵, 하고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

울부짖고, 고통받고, 오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악몽에 헐떡이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만을 봐왔다.

다시 시작한 삶에서는 그를 보며 긴장하고 불편해하고 경계하는 모습만이 보였다. 그나마 약간 풀어지는 게 그가 웃을 때 정도.

그러니 저런 미소의 부스러기 같은 걸 보고도, 무어라 묘사하기도 어려운 감정이 차올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겠지.

그 심정이 겉으로 드러날까 봐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걷자 등 뒤로 자박자박 그녀가 뒤따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걸음을 늦췄다. 그의 보폭은 그녀보다 넓을 테니까.

그녀에게 속도를 맞춰 걸었다. 걸음을 따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기숙사 입구에 도착한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봉투를 받아 든 그녀가 의아한 듯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 얼굴이 또 예뻐서, 저절로 표정이 풀어진다.

“무리는 하지 말도록.”

그녀를 오래 마주하고 있었다간 헛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아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격려하듯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유리엔은 그녀로부터 멀어지며 그녀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아귀에 찰나 스쳤던 어깨는 가늘었고 열로 인해 약간 뜨거웠지만, 분수대 앞에서처럼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 사소한 변화는 하루 종일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 * *

다음날은 신입생 순위전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엔 그래도 아침 훈련 때는 집중이 되었는데, 이날은 검을 쥐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몸이 좋지 못한 상태로 순위전을 치를 그녀가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유리엔은 결국 아침 훈련을 중단하고 단장 전용 연무장 밖으로 나왔다.

“아르 세밧티엠. 어제 말씀하신 건에 대해 조사가 끝났습니다.”

연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 차림의 남자가 수건을 내밀며 작게 속삭였다.

“수고했다. 내용은?”

“서면으로 올렸습니다.”

남자가 건넨 수건 안에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만져졌다. 유리엔은 주위를 확인하고 수건을 벗겨 안의 종이를 읽었다.

-브레드 폰 포움, 3학년, 생도 순위 68위, 노블레스 클럽 소속, 키리에 제국 포움 후작가의 차남.

성품이 오만하여 사관학교 내에서 평이 좋지 않음. 생도 대표의 요청으로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스콰이어 교육을 담당하러 갔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와서 욕설을 해댄 적이 있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상당한 악감정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라.’

이런 성격에 악감정도 남아 있는 상태인데 ‘사과’니 어쩌니 떠들어댔다고. 거기에 그걸 전하는 이안 펠레트로는 실행에 옮기기 직전의 악의로 가득했다. 아무리 보아도 수상했다.

“……브레드 폰 포움의 최근 행적에 대해 조사해 와라. 무언가 꾸미는 것이 있는 듯하니.”

“아르 세밧티엠.”

하인이 경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유리엔은 본부로 돌아가 부단장실에서 바론을 만났다.

“사관학교 클럽 내부 사정을 좀 알아 봐야겠는데. 추천할 만한 생도가 있나?”

“갑자기 클럽이라니, 어느 클럽 말이십니까?”

“노블레스.”

“거긴 가문의 급이 낮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곳 아닙니까. 무슨 일이신데 그러십니까?”

“노블레스 소속 생도 중에 수상한 동향을 보이는 자가 있다. 조사를 하려면 클럽에 대해 파악해 둘 필요가 있으니.”

“흠……. 사관학교 내의 일은 바라하가 잘 알 테니, 그를 부르겠습니다.”

바론은 하인을 불러 바라하를 데려오라 일렀다. 그러고는 소파에 걸터앉은 유리엔을 약간 낯설게 바라보았다.

“……단장님께서 사관학교의 일에 참견하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창천기사단장은 아젠카를 다스리고 각국과 외교를 하고 기사단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일이 많았다.

사관학교의 일은 보통 행정실의 사무관들 선에서 끝나곤 했다. 단장에게까지 올라가는 건 이미 조사가 끝나고 결정만 기다리는 중대한 일에 한정되었다.

예를 들어 사관학교 내에서 마약이 나도는 사건이 터진다고 치면, 마약의 종류, 반입 경로, 현장이 발각된 상황 및 조사 과정, 연관된 생도 목록, 관련 처벌 규정까지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올라오고 단장은 결정만 내리면 되는 것이다.

그게 정상이었다. 이렇게 사건의 발단부터 단장이 나서는 게 아니라.

“혹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와 관련이 있습니까?”

“……경은 입이 무거우리라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오래 유리엔을 봐온 바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하 이슬라프가 도착했다. 유리엔은 그에게 노블레스 클럽에 잘 아는 생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네, 있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그 생도를 통해 노블레스 클럽의 구조를 파악해 와라. 클럽 내부의 파벌이나 무리의 형태, 클럽장의 장악력, 클럽 내 권력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등을.”

생도 간의 권력 구조는 그 안의 생도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바라하는 급히 그의 말을 받아 적더니 약간 망설이다 물었다.

“오늘 안에 말이십니까?”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이 명령 탓에 바라하는 에키네시아의 순위전을 지켜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약간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유리엔은 그 뒤에 몇 가지 급한 일만 처리한 후 바로 사관학교로 향했다.

기사단장이 신입생 순위전을 대놓고 참관했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드를 눌러쓰고 1층의 경기장이나 대기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2층 관람석의 바깥계단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계단에 있는 창문을 통해 에키네시아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역시 아직 몸이 좋지 않은가.’

그녀가 몸살 때문에 한 칼에 경기를 끝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유리엔뿐이었다. 또한 그는 앨리스와 에키네시아의 경기가 못마땅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 무리를 하는군.’

앨리스란 생도를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지도 대련까지 해주는 걸 보니 걱정과 동시에 질투가 솟았다.

그녀의 본래 실력을 아는 유리엔으로서는 감질 나는 대련이었지만,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그녀와 검을 맞대보고 싶었다.

언젠가 그녀와 대련을 할 날이 올까. 자신도 그녀와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애타는 욕심에 창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끝까지 그녀의 검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 * *

신력 1629년 5월 10일, 북부 흰 까마귀 협곡으로 창천기사단의 마물토벌단이 출발했다.

에키네시아를 만나고 랑기오사의 기억을 보면서 시간이 되돌아간 것을 알게 된 유리엔은 토벌단의 규모를 늘렸다.

겨울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을 불과 한 달만에 바꾸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과거 토벌단에서 사상자가 나온 건 밤에 출몰한 스펙터 탓이 가장 컸지만, 그 이전 낮에 토벌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나온 탓도 있었다. 흰 까마귀 협곡의 마물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유리엔은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부상자가 나오지 않을 규모의 토벌단을 짰다.

스펙터는 그 혼자서 처리할 작정이었다. 스펙터의 습격이 없으면 이안 펠레트로가 바라하를 죽이려 한 현장을 잡을 수 없겠지만, 그자를 잡자고 스펙터가 날뛰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칠지도 모르지.’

5월 12일. 흰 까마귀 협곡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엔은 기사들과 함께 회의를 했다. 정찰을 다녀온 기사가 예상보다 마물의 수가 많다고 보고했지만, 토벌단 규모 자체가 커졌기에 별 부담은 없었다. 토벌은 순조로울 듯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던 유리엔은 디트리히와 마주쳤다. 디트리히가 실실 웃더니 그에게 손짓을 했다.

“야, 분위기 좋더라?”

“무슨 소린가?”

“네 스콰이어랑, 바라하랑. 같이 막사 세우고 있더라고.”

“…….”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좀 도와주고 왔다. 바라하 녀석, 하여간 섬세하질 못해서.”

유리엔의 눈이 요동쳤다. 그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물었다.

“……네가 보기에 그들이 잘 어울리나?”

“뭐, 바라하 쪽은 확실히 호감이 있는 거 같고……. 연애감정까지 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키네시아 생도도 딱히 싫진 않아 보이니까? 지내다 보면 정들고 정들면 자연스럽게 사귀겠지.”

디트리히는 가볍게 말하면서 유심히 유리엔을 살폈다. 유리엔의 표정이 담담하자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율, 너 진짜 걔한테 관심 없는 거 맞지?”

“대체 그런 걸 왜 자꾸 궁금해하는 거냐.”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놈인데 목석같아서 연애나 제대로 할는지 걱정되어서 그런다, 왜!”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테레사 경은 네 얘기만 하면 인상을 쓰던데.”

“그게 다 관심이야, 관심. 원래 무관심이 제일 무서운 법이거든.”

“그래서, 계속 맴돌기만 할 건가?”

디트리히는 꽤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일단은. 야, 최소한 테레사와 비슷한 선에는 서야 고백을 하든 말든 하지. 그러니까 마스터부터 되고 나서. 그 다음엔 반드시 기오사 오너가 될 거다. 아직 준기사인 주제에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걸로 들리겠지만…….”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넌 기오사 오너가 될 테니까.”

“……말이라도 고맙다, 이 자식아.”

픽 웃은 디트리히가 손을 흔들고 제 막사 쪽으로 향했다.

유리엔은 그가 레밍기오사의 오너가 될 미래를 알고 있다. 이미 보았으니까. 그의 죽음까지도.

분수대의 천사상에 걸려 있던 그와 테레사의 시체가 떠오르자 속이 메슥거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레밍기오사의 오너가 되는 미래는 이루어지더라도, 그 죽음은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이 세계는 그녀가 얻어낸 세계다. 그녀의 파괴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만들어낸 구원은 그녀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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