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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7화 (77/211)

검을 든 꽃 77화

실피드를 타고 본부를 벗어났다.

아젠카 외곽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말을 몰고 시내를 통과하던 그의 눈에 가판을 펼쳐놓은 잡화점이 보였다. 가판 위에서 눈에 띈 물건이 있었다.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말을 멈췄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결국 가판에 있던 손거울을 샀다. 사본 적은커녕 생전 들고 다녀본 적도 없는 물건이었다.

성벽 밖으로 말을 달려 아젠카 외곽의 들판에 멈췄다. 낮은 키의 나무 아래에 기대선 그가 막 산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매일 보던 자신의 얼굴이지만 작은 손거울로 보니 생경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았다. 어색하고 딱딱했다.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웃어보았다. 여전히 어색했다.

[뭐 하냐, 지금?]

랑기오사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유리엔은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웃는 얼굴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가?]

“웃을 때마다 에키네시아가 풀어지니까. 그녀가 웃는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나 참, 오래 사니 별꼴을 다 보게 되는군.]

성검은 대놓고 혀를 찼다. 유리엔은 성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거울을 들어 올리고 몇 번 더 웃어보더니, 멍하니 중얼거렸다.

“잘 안 되는군. 어색하기만 하다.”

[이젠 아예 웃는 연습이라도 하는 거냐?]

“좀 더 잘 웃으면 그녀도 마주 웃어주지 않을까.”

[……하.]

“그녀 앞에서는 쉽게 웃어졌던 것 같은데.”

[망했군. 망했어.]

“뭐가 망했다는 거지?”

[네가 정신을 못 차리는 꼴을 보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싶어서.]

“명확하게 말해라.”

[됐다. 이 분야는 내가 입을 다무는 게 낫더군.]

성검은 툴툴거리는 말을 남기고는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러려니 하고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꽤 진지하게 웃는 연습을 했다.

* * *

다음날, 유리엔은 오전 내내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침 훈련으로 검을 휘두를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서류 업무를 시작하니 계속 딴 생각이 났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바라하 이슬라프가 지금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그 탓에 오후가 되도록 검토할 서류를 반절도 끝내지 못했다. 보통이라면 오전 안에 서류 작업을 끝내고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는 등의 실무적인 일을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서류에 집중하려 애쓰던 유리엔은 결국 종이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라하를 그녀의 담당이 되도록 유도한 과거의 자신에게 장갑이라도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설마 또 마검의 주인에게 가려는 건 아니겠지?]

단장실을 나서는 그에게 성검이 기가 차다는 듯 말을 걸었다. 유리엔이 변명했다.

“집중이 되지 않아서. 산책삼아 나가는 것이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잠시만 보고 오겠다.”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제발 부탁인데, 이러다 엇나가지만 말아라.]

“엇나가다니, 무슨 뜻인가.”

[범죄는 안 된단 소리지. 나는 되도록 네가 오래 내 주인으로 있어줬으면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나도 이게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으면 좋겠군.]

성검이 못마땅하게 투덜거렸다. 그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성검을 내버려두고 빠르게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 오늘도 말을 다룬다고 했으니 그들은 마구간에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마구간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엔은 마구간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 우뚝 멈췄다. 그 안에는 바라하도, 에키네시아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근처에 있을까 싶어서 최대한 감각을 넓혀보았다. 그는 금방 에키네시아를 찾아냈다. 가까운 수돗가에서 그녀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엔은 그쪽으로 향하며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고요? 저한테, 브레드 선배님이?”

“응. 네가 용서해 줄 마음이 없으면 거절해도 돼. 그녀석이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네가 사과를 받아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가 사과받을 만한 일을 당했나?

유리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 내용도 거슬렸고, 그녀와 말하고 있는 상대는 더더욱 거슬렸다.

이안 펠레트로. 정안을 떠보지 않아도 출렁거리는 악의로 가득 차 있을 게 뻔했다. 그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언제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가능하면 오늘 저녁이라도 만…….”

이안이 그를 발견하고 말끝을 흐리더니 급히 인사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단장님을 뵙습니다.”

에키네시아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약간 피로한 안색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돌아보는 움직임이나 평소보다 좀 더 힘이 빠진 눈매 등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건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마스터쯤 되는 초인이 오랜 시간 지켜본 사람에게 온 신경을 기울여 집중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거나 독에 중독되거나 잠을 자지 못하거나 지친 상태에서 억지로 움직이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으니 구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이안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정안을 떴다.

“사과라니, 무슨 소리지?”

“……생도 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안에게서 짙다 못해 검붉은 악의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넘실거리는 움직임.

그는 저런 형태의 악의를 꽤 보았다. 악의가 행동으로 이어질 준비를 끝마치면 저렇게 된다.

그 악의가 누굴 향하는지는 뻔했다. 감히 그의 앞에서 이안 펠레트로가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악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다.

유리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심정을 짐작했는지 성검이 그를 말렸다.

[진정해라. 증거도 없고, 정확히 무슨 짓을 꾸미려 든 건지도 아직 모른다. 여태껏 네가 뭘 위해 저 놈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잊었느냐? 현장을 잡은 것도 아닌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벌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랑기오사의 잔소리가 아니라도 유리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잠깐 분노를 참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는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고 에키네시아 쪽을 바라보았다. 스멀거리는 악의를 보다가 깨끗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자 정안이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정안을 감았다.

“어떤 다툼인가, 에키네시아 생도?”

“개인적인 일입니다, 단장님.”

에키네시아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유리엔은 속으로만 쓴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는 왜 피로해 보이는 걸까.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와중에 사관학교의 사용인들 중에 섞여 있는 직속 정보원에게 보고받은 내용이 떠올랐다.

에키네시아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자신의 룸메이트와 나란히 기숙사로 돌아왔다던 이야기. 그들이 대련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었다.

굳은 살 하나 없던 손을 생각해 보면, 땀으로 온몸이 젖을 정도로 검을 휘두를 경우 그녀는 십중팔구 몸살이 날 터였다. 회귀 이전과 달리 거의 단련이 되지 않은 귀족영애의 몸 그대로니까.

그 가정을 떠올리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몸살이 확실했다. 열이 있어 보였다.

당장 내일 신입생 순위전까지 있는데 아픈 몸으로 돌아다니다니. 보나마나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여기며 참은 거겠지.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혼자 이겨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의지할 사람을 모조리 잃고 홀로 떠돈 세월이 너무 길어서. 유리엔은 이안을 향해 말했다.

“생도 대표, 에키네시아 생도에게 더 할 말이 남았나?”

“예? 아……. 그게.”

이안이 우물거리자 에키네시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사과하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전해주세요, 선배님.”

“……알았어, 그렇게 전해줄게.”

“끝났으면, 가보도록. 에키네시아 생도와 할 말이 있다.”

유리엔은 ‘사과’와 관련된 일을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안을 보냈다. 악의의 농도를 보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확실했으니까.

이안이 떠나고 나자 에키네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유리엔은 흘러내린 분홍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

서두를 열어놓고 머뭇거렸다. 그를 보면 긴장하고 꺼려하는 그녀가 그의 도움을 달가워할 것인가.

“……내가, 그대를 도울 일이…….”

도울 일이 있을까. 이안이 거슬리게 구는 일이든, 몸이 아픈 지금 곁에 있어주는 일이든.

그녀가 혼자 기오사를 모으던 것을 지켜보던 때와 달리, 지금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도와줄 수 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의지해 줬으면 좋겠다.

“죄송하지만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단장님.”

“……아니,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겠지. 어쩌면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그가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쓴웃음이 절로 새어 나와 유리엔은 급히 입가를 가렸다.

이대로 모른 척 떠나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곁을 지킬 수 없다면 약이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에키네시아는 약을 챙겨 먹기는커녕 참을 만하다며 저 몸으로 돌아다닐 확률이 높았다. 기껏해야 푹 자면 낫겠지 하고는 잠만 잔다거나.

“따라와라, 에키네시아 생도.”

“……네.”

유리엔은 그녀를 데리고 기사단 본부 쪽으로 향했다. 그녀를 잠시 기다리게 해두고 단장실로 뛰어올라 갔다.

본부 내에 있던 단원과 사무관들은 늘 차분하던 단장이 본부 내에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올라 가는 희귀한 광경을 목격하고 얼이 빠졌다.

그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장실에 빠르게 도달했다. 단장실에는 상비약 상자가 있었다. 그것을 열고 근육통에 잘 듣는 푸른 연고를 챙기고, 혹시 모르니 외상용인 붉은 연고도 챙겼다.

항생제 시럽까지 꺼낸 후에 전부 종이봉투에 담고, 뭔가 더 도움이 될 것이 없나 싶어 주위를 살폈다.

티세트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병이 마침 눈에 띄었다. 엊그제 바론이 아내가 만든 거라며 두고 간 수제생강차였다.

‘감기와 피로에 좋다던가.’

그는 그것을 유리병째로 봉투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도 미련이 남아 단장실 안을 훑어보았다. 뭔가 더, 사소한 거라도 좀 더 챙겨주고 싶은데.

마음 같아서는 곁을 지키며 간호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게 서글펐다.

“의사와 신관을 보내는 건…….”

[작작해라.]

유리엔의 혼잣말에 성검이 질린 투로 한마디 했다. 그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되어 종이봉투를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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