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76화
[……주인, 설마 지금…….]
유리엔은 성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움직였다.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그는 거칠게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참, 그리고 원래는 몸을 빗기 전에 갈기를 먼저…….”
에키네시아와 바라하가 동시에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키네시아는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바라하의 품에 거의 파묻힌 상태였다. 나란히 갈기를 쥐고 있는 손가락. 그들은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보다 더 기분이 나빠졌다.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
어느 시인이 녹색 눈동자의 괴물이라고 불렀던 감정이, 질투가 그의 안에서 최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를 진정시킨 것은 자신을 보자마자 긴장한 에키네시아의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일어선 그녀의 감각이 경계하듯 그를 향한다. 바라하와 함께 있을 때에는 편안해 보였던 그녀가 그를 보자 잔뜩 긴장했다.
그것을 인식하자 끓어오르던 용암 위로 얼음물이 퍼부어지는 것 같았다. 유리엔은 그들 쪽으로 다가가며 상식을 되뇌었다.
그녀가 누구와 가까워지는 그녀의 자유다. 그에게 그녀의 친분에 참견할 자격 따윈 없다.
되뇌는 것과 달리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바라하.”
“아르 세밧티엠. 예, 단장님.”
“바론 경이 그대를 찾고 있다. 가 보도록.”
바론이 바라하를 찾긴 했다. 바라하에게 예비 교육만 해주고 바로 퇴근하라고 했었는데, 시킬 일이 생겼으니 퇴근 전에 잠시 들리라고 전해야겠다고 바론이 오늘 아침에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리엔은 그렇게 자신에게 변명했다.
“알겠습니다. 에키, 솔질을 마저 해주고 돌아가. 나머진 다음에, 아, 혹시 단장님, 실피드를 쓰려고 오신 겁니까?”
에키. 에키라고.
에키네시아의 애칭이었다. 바라하가 친근한 어투로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유리엔 자신은 그녀와 대화를 해본 것도 분수대 앞에서의 그 한 번뿐인데, 그녀를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바라하는 이미 애칭을 부르고 있다.
그는 일렁이는 것들을 감춘 채 덤덤히 대꾸했다.
“그래. 스콰이어 예비 교육 중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그저 솔질 중이었을 뿐이니,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말하면서 아직도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그들 사이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괴물로 비유된 감정은 실로 괴물이라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귀로 전해 듣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듣는 건 차이가 컸다. 굉장히 난폭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무의식이 닿기라도 한 건지 바라하가 에키네시아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게 약간 가라앉았다. 속에서 요동치던 괴물이 조금 얌전해졌다.
‘대체…… 제정신이 아니군.’
유리엔이 스스로의 상태에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바라하는 에키네시아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에키마무리하고 돌아가도록 해.”
“……네, 선배님.”
에키네시아의 목소리 끝이 확연하게 떨렸다. 그것이 의아한지 바라하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다.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바라하. 바론 경에게 가보라고 했을 텐데.”
“아……. 네, 감사합니다.”
바라하가 드디어 마구간을 나갔다. 그녀와 그만이 남자 뒤틀리던 속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주인, 방금은 대체 뭘 한 거냐?]
성검이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아 대답할 말이 없었기에 유리엔은 침묵했다.
에키네시아는 급하게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놀림이 성급했다. 솔이 통의 테두리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데구르르 구른 솔이 유리엔의 발치에서 멈췄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솔을 내밀자 에키네시아가 검이라도 겨눠진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조금 전 바라하의 곁에서 편안해 보이던 것과 비교되었다. 입안에 쓴 맛이 돌았다.
“내가 불편한가?”
“네?”
불편해한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혹시나 하여 물어보았다. 얼결에 나온 반문과 표정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그녀는 그를 꺼린다. 기억이 없는 척했고, 일부러 그 뒤로 그녀를 찾지도 않았는데.
대련을 청한 게 실수였다.
그녀가 그를 꺼리느니 영원히 대련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정말로 아쉽지만, 그녀의 재능이 탐이 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것 때문에 그를 꺼린다면, 포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대련을 청한 것이 부담스러웠다면…… 잊어도 된다.”
유리엔은 그리 말하면서도 자신이 기사로서의 그녀보다 에키네시아 자체를 더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 쪽을 택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더니 솔을 받아들었다.
“아닙니다, 단장님.”
“아니라니, 무엇이?”
“대련이 부담스럽다기보다는, 과분했을 뿐이에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리고 전에 망토는 감사했습니다. 곧 돌려 드릴게요.”
그녀는 몹시 빠르게 말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그의 앞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확연했다.
대련 때문이 아니었나? 그의 존재 자체가 불편한가? 역시 그가 보이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상처가 되는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우울해졌다.
“불편한 건 사실이란 뜻이군.”
“…….”
그의 말에 그녀가 우뚝 멈췄다. 선명한 눈동자 대신 굽이치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여린 몸의 선만 보이는 뒷모습. 분수대 앞에서처럼 어깨가 떨고 있을까.
이토록 그를 꺼린다면, 그녀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일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스콰이어로 지명해 버렸다. 그녀는 그의 곁에 계속 머물게 될 예정이다.
“그대는 곧 내 스콰이어가 될 테니, 나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애마인 실피드를 꺼내는 척하며 흘리듯 말했다. 아직 임명식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스콰이어 지명을 취소하면 되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그 선택은 외면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에키네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서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 버리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를 보러 온 게 아니라 말을 꺼내러 온 것처럼 실피드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걸음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듯 느렸다.
에키네시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가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단장님.”
그녀가 이대로 그를 외면하고 나가버리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약간은 희망을 품어도 될까. 입을 열었다간 들뜬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 유리엔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에키네시아는 망설이며 입술을 여닫았다. 발간 입술이 움찔거렸다. 별 거 아닌 움직임인데 그는 그 입술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작년 탄신 연회 때, 저를 보셨다고 하셨죠. 저는 단장님과 말을 나눈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저를 아셨나요? 제가…… 무언가 실례를 했던가요?”
유리엔은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 서자 자꾸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다.
그를 올려다보는 하얗고 예쁜 얼굴. 말을 하며 움직이는 입술. 그런 것을 보고 있는 스스로가 파렴치하게 느껴져서 유리엔은 정안을 떴다.
정안으로 보는 그녀는 타오르는 태양이다. 눈부신 그 혼이 불안에 젖어 일렁거렸다. 자신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그것이 슬펐다.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그대가 눈에 띄었을 뿐.”
“눈에 띄었다고요? 제 머리카락 때문인가요?”
여기서 긍정하면 안심할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대의 혼 안에 있던 불씨를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결국 비극의 시작이었으니. 유리엔은 돌려 대답했다.
“……아니,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혼의 움직임이 변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것이 갸웃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몸도 혼처럼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커다란 눈이 천천히 깜박인다. 그녀의 전신에 바짝 들어가 있던 긴장이 당황한 탓에 풀려서 자연스러워졌다.
“개인적인 관심이라니, 무슨 뜻이신지…….”
얼떨떨하게 묻는 그녀가 어쩐지 너무 예뻐 보여서. 경계 대신 그저 의아해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여서.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자 그녀가 더 무방비해졌다. 그녀의 눈이 그에게 고정된다. 긴장도 경계도 없이 그저 바라본다.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미소가 절로 더 깊어졌다.
‘더 잘 웃으면, 혹시 따라 웃어주지 않을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은데.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유리엔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손을 뻗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만지려 했다.
‘미쳤군.’
손을 떼야 하는데, 이대로 손을 떼면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변명하란 말인가.
고민하는 사이 손가락은 그대로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움직였다. 손끝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감촉이 지나치게 좋아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 와중에 머리카락에 걸린 지푸라기가 눈에 띈 건 천만다행이었다. 유리엔은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그 지푸라기를 쥐고 손을 뗐다. 얼버무리듯 말을 했다.
“그 질문도, 대련 이후에 답하도록 하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무하다는 듯 찌푸려진 표정. 그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대련 요청, 부담스러우면 잊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그를 흘기는 것이 묘하게 귀여웠다. 그녀를 보며 많은 감정을 느껴 보았지만, 귀엽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소녀 같은 얼굴. 어쩌면 저것이 그 악몽을 겪기 전의 본래의 그녀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면을 발견한 느낌에 유리엔은 짧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조금 전만 해도 속이 지독히 쓰렸는데, 이토록 간단하게 기뻐진다. 그저 그녀가 긴장을 풀고 그를 대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그를 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움텄다.
“그대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그만큼 절실히 그대와의 대련을 바란다는 뜻이다.”
언젠가 그대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영원히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결심했지만 그래도 바라게 된다.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진정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물론 그날이 오면 그대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흉인 나를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웃음 끝에 내장을 헤집는 죄책감이 솟았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까 봐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실피드를 끌고 마구간 밖으로 나온 후에야 호흡을 골랐다.
유리엔은 실피드를 돌아보았다. 끌고 나올 계획이 없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일도 밀려 있는데. 말이 순진한 눈을 끔벅이며 푸르륵거렸다. 에키네시아가 마구간을 떠나자마자 집어넣기엔 미안했다. 그는 실피드를 적당히 달리게 해준 후에 마구간에 돌려놓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