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75화
유리엔의 임시 스콰이어는 사관생도들이 순위에 따라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었다. 스콰이어가 없는 대부분의 기사들과 같은 방식이었다.
다른 기사들은 가끔 잘 맞는 생도나 편한 생도, 마음에 드는 생도를 임시 스콰이어로 부르기도 하지만 유리엔은 그런 적도 없었다. 누가 오든 똑같이 대했고 교체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보통 임시 스콰이어는 이른 아침에 자신이 맡은 기사를 방문해서 그날의 일정에 대해 듣는다. 전날에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기본적으로 기사가 일어날 시간쯤에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제가 에키네시아 생도의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맡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부터는 제 다음 차례인 토머스 생도가 단장님의 임시 스콰이어직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이안 펠레트로를 마주하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서 저런 보고까지 한다면.
유리엔은 태연히 웃고 있는 이안 펠레트로를 내려다보았다. 정안에는 음습하게 넘실거리는 시커먼 악의가 뚜렷했다.
저게 지금 누구의 예비 교육을 하겠다고?
그는 이안의 성향을 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입학 첫날에 스콰이어로 지명된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질투하다 못해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일 터.
바라하를 상대로도 그랬는데 신입생인 그녀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런 자에게 피해를 입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 근처에 어슬렁거리게 두는 것 자체가 싫다. 그래서 유리엔은 덤덤하게 명령했다.
“스콰이어 예비 교육은 다른 생도에게 맡기고, 너는 정해진 일정대로 임시 스콰이어직을 수행하도록.”
“……예?”
“두 번 명령하게 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대신할 생도를 구하고 에키네시아 생도에게 소개해 줘야 해서.”
“한 시간 주지.”
유리엔은 시계를 흘긋 보고 말했다. 이안이 당황하더니 급하게 경례를 붙이고 달려갔다. 시간을 길게 줄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있다고 해서 저놈이 제대로 된 생도를 그녀에게 붙여줄 리가 없으므로.
그녀에게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해줄 생도라. 유리엔은 적당한 사람이 없는지 고민했다. 사관생도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지라 떠오르는 생도가 없었다.
눈만 서류에 둔 채 유리엔은 고민을 거듭했다.
“단장님, 토벌 규모를 이렇게 늘릴 필요가 있습니까?”
바론이 놀란 얼굴로 서류뭉치를 쥐고 단장실에 들어왔다. 그를 본 순간 유리엔은 적당한 생도를 떠올렸다.
“바론 경, 경의 스콰이어는 지금 어디 있지?”
“바라하는 아침 훈련 중일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훈련 중단하고 사관학교에 잠시 다녀오라고 해라.”
“예? 갑자기 왜…….”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가 오늘부터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데, 제대로 진행되는지 보고 오도록. 원활하지 않으면 아예 바라하가 그녀의 교육을 맡는 것도 괜찮겠군.”
바론의 표정이 당황으로 흐트러졌다. 스콰이어 지명부터 심상찮더니 이젠 예비 교육까지 참견하다니.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 생도들 중에 고학년 아무나 시키면 되는데, 굳이 정식 스콰이어인 바라하를? 내가 알던 단장님이 맞나?
그의 표정을 본 유리엔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명령은 아니다.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지.”
“……알겠습니다. 바라하에게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바론이 떨떠름하게 대꾸하고 단장실을 나갔다.
그날 저녁 유리엔은 바라하 이슬라프가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스콰이어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 * *
“야, 너 네 스콰이어한테 바라하 붙여줬다며?”
디트리히가 포도알을 집어 입에 던져 넣으며 깐죽거렸다. 유리엔은 대꾸도 하지 않고 서류만 넘겼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마물 토벌의 규모를 키우려니 급한 일이 많았다. 토벌단의 보급물품에 대한 예산서를 검토하는데 디트리히가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의외네. 아니, 뭐, 스콰이어 지명 자체도 의외였지만. 질투 안 나?”
“질투?”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디트리히는 소파에 기댄 채 목만 꺾어 그를 돌아보았다.
“난 솔직히 네가 그 애한테 한눈에 반한 줄 알았거든. 아니면 왜 대뜸 스콰이어로 지명하겠냐. 근데 바라하를 붙여주는 걸 보니 네 말마따나 순수하게! 재능에 반한 거였구나, 싶다. 하여간 목석같은 새끼. 넌 검 말고 꼴리는 게 있긴 하냐?”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스콰이어로 지명하면서 유리엔이 댄 핑계가 재능이었다. 그녀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가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것보다 재능에 반했다는 게 훨씬 말이 되는 소리여서, 대부분이 쉽사리 납득했다.
가장 허물없는 사이인 디트리히만이 심상찮은 직감이 들어 의심했다. 하지만 스콰이어 지명을 했을 뿐 유리엔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는 따로 그녀를 불러 본다거나 찾아가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 반한 사람이라기엔 덤덤했다.
그래도 예비 교육 담당에 간섭했다는 소리에 혹시나 했는데, 바라하를 불렀다니. 그냥 재능 있는 스콰이어에게 유능한 선배를 붙여주려는 의도였을 뿐인가. 제 직감이 틀렸나 싶었다.
“바라하를 붙여주는 것에 무슨 의미라도 있나?”
유리엔이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고 있었다. 디트리히도 이제는 저 놈이 정말 순수하게 재능을 보고 그 여자를 스콰이어로 삼은 거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직감은 아무래도 빗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와, 이걸 설명을 해야 알다니. 진짜 관심 없었구나. 율, 내가 너의 순수한 검술성애를 무시해서 미안하다.”
유리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덮었다. 바라하를 그녀의 교육 담당으로 유도한 건 그가 유능한 스콰이어이자 선한 혼이기 때문이었다. 이안 펠레트로가 교육 문제로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봉쇄할 의도도 있었다.
분수대 앞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6일째인 오늘까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건 그녀를 위해서였다. 공포로 떨리던 가는 어깨가 떠올라서 차마 찾아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정식 스콰이어가 되면 계속 마주치게 될 예정이니 코앞에 두고도 그냥 참았다.
그런데 질투가 나지 않느냐니.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소리라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봐야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경청할 태세를 보이자 디트리히가 그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았다.
“아니 뭐, 보통은 좋아하는 여자와 다른 남자가 친밀해질 기회를 일부러 주진 않으니까. 그 다른 남자가 괜찮은 남자이기까지 하면 더더욱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바라하를 그녀의 담당으로 유도한 게, 그녀에게 괜찮은 남자와 친밀해질 기회를 준 게 된다는 소리냐?”
“그래. 이걸 말로 설명하고 있자니 웃기지만.”
“……바라하 이슬라프가 괜찮은 남자인가?”
“괜찮다 못해 아주 좋은 남자지. 젊지, 잘생겼지, 몸 좋지, 검술 뛰어나지, 스콰이어니까 미래도 보장된 거나 다름없고, 성격도 괜찮잖아? 너 여자들한테 바라하가 얼마나 인기 좋은지 모르지?”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늘어놓은 디트리히가 인상을 쓰며 말을 덧붙였다.
“하긴, 넌 모를 수도 있겠다. 평생 인기가 좋았으니 그게 평범해 보였을 수도 있지. 부러운 새끼.”
“…….”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바라하는 성별을 떠나 부단장의 스콰이어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생도였을 뿐이다. 애초에 바라하 이슬라프와 에키네시아 로아즈 사이가 남녀 사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남녀 사이. 그 단어가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미혼의 여자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유리엔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을 본 디트리히가 혀를 찼다.
“어쨌든, 말하는 걸 보니 아예 견제할 염두조차 없었네. 역시 내 착각이었군. 검술성애자가 사랑은 무슨.”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이고 남은 포도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입안 가득한 포도 탓에 웅얼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난 좋아하는 여자 근처에 괜찮은 남자는 씨가 말랐으면 좋겠거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남자라곤 유부남만, 아니다, 남자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어. 여자도 너무 친하면 떨떠름할 판에.”
“그건 좀, 제정신이 아닌 소리로 들리는데.”
“원래 사랑이란 게 사실은 정신병의 일종이라더라.”
“과장이 심하군.”
“해보면 알게 돼, 새끼야. 그런 의미에서 정신병자인 난 테레사 보러 간다.”
디트리히가 킬킬 웃고는 단장실을 나갔다. 유리엔은 망연히 앉아 그가 던지고 간 말들을 곱씹었다.
‘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그녀는 특별하다.
더없이 특별해서, 누구도 그의 안에서 그녀를 대신할 수 없었다. 그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지탱해 주고 싶었다.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었다. 참기 어려운 그런 욕망이 그녀를 향한다.
그녀를 향하는 것에는 죄책감도 있었다. 차마 고백하지 못한 깊은 죄책감.
두려움도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가 욕심내었던 것들이 모두 부서지거나 빼앗겼듯이, 아끼던 새가 화살을 맞고 죽었듯이, 욕심을 내었다가 망가질까 봐.
실제로 이미 한 번 망가졌었다. 망가졌던 것을 그녀가 되살려냈다.
뒤엉킨 감정이 깊고 짙어서 규정하기 어려웠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엔은 서류를 덮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실 밖으로 향했다.
찾아가지 않았을 뿐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계속 듣고 있었다. 창천 내에는 기사단장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정보원들이 존재했고, 유리엔은 그들로부터 자신의 스콰이어가 될 예정인 그녀의 행적에 대해 매일 보고받았다.
스콰이어가 될 생도라는 이유로 아슬아슬하게 공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보고였다.
그 보고에 따르면 오늘은 분명 말을 돌보는 법을 익힌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마구간에 있겠지.
[응? 갑자기 어디로 가나?]
성검이 약간 당황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유리엔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예민하게 일어선 감각에 마구간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렸다.
“바라하 선배님, 갈기도 그냥 빗으면 되나요?”
“아니, 손가락으로 먼저 엉킨 걸 풀어줘야 해. 안 그러면 끊어지거든. 보여주지.”
에키네시아의 목소리는 밝고 가벼웠다. 유리엔과 대화를 할 때처럼 긴장하고 떨리던 음성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엉킨 것들을 풀고 나서 빗질을 해.”
“그렇군요. 제가 해봐도 될까요?”
“그래, 쥐어봐. 응, 그렇게.”
약간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기척이 몹시 가까워졌다. 거의 겹치는 것처럼. 그러자 급속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