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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4화 (74/211)

검을 든 꽃 74화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면 절대 할 수 없을 말. 모른다.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회귀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난데없이 스콰이어 지명을 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봐 긴장했던 마음에 급격히 안도감이 들었다. 유리엔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더니, 허둥지둥 눈을 돌렸다. 뺨이 옅게 붉어졌다. 왜 저러는지 의아해졌다가 비슷한 태도를 본 적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는 잘 웃는 편은 아니었지만, 드물게 웃으면 상대방이 여성일 경우 대체로 저런 태도를 보였다. 혹은 대놓고 감탄하며 반짝이는 시선을 던지거나. 심지어 가끔 남성이 저러는 경우도 있었다.

수많은 찬사를 들었으니 자신의 외모가 뛰어난 편인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는 제 외모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주목을 끌게 되어서 황제나 2황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이 기뻤다. 그녀가 그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그는 들뜬 채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그대는 알 텐데. 본 적이 있지 않나.”

“네?”

에키네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유리엔은 급히 뒷말을 이었다.

“작년 여름, 탄신 연회 때 말이다.”

“……아.”

그녀는 약간 안심한 듯이 보였다. 유리엔은 내심 씁쓸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르고 있고, 모르길 원하는 거다. 그토록 힘들게 지워버린 과거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길 바란다면, 그는 감히 그것을 들출 수 없었다. 비극을 시작한 건 그였고, 비극에서 끝나지 않도록 두 번째 삶을 얻어낸 건 그녀인데 어떻게 그가 감히.

“탄신 연회에서, 저를…… 보셨었어요?”

“그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대를 본 기억은 있지. 그대는 나를 보지 못했었나?”

“다, 단장님이셨군요! 늦게 알아차려서 죄송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말을 맞추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탄신 연회 때 그녀를 본 건 사실이니까.

겉도는 대화라 해도 그녀와 최초로 나누는 대화였다. 그녀를 마주보고 대화를 하게 되다니. 정말로 현실 같지가 않았다.

“단장님이라…….”

그 와중에 호칭이 거슬렸다.

그녀와 그 사이가 아무것도 아닌 타인 같지 않나. 아니, 실제로도 타인이고, 뭔가 관계가 있진 않지만, 심지어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도 모른 척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름으로 부르도록. 내 이름은 유리엔이다.”

그녀 앞에서 황족의 성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황족인 탓에, 황제가 그의 아비이고 2황자가 그의 형인 탓에,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되었으니까. 그저 유리엔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전 사관생도입니다, 단장님. 어떻게 감히.”

“사관생도. 그렇군.”

에키네시아는 빠르게 거절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기억이 없는 척하려면, 결국 그와 그녀는 기사단장과 사관생도 사이일 뿐이었다.

까마득히 먼 거리.

그 사실을 인지하자 스콰이어로 지명한 게 몹시 다행으로 느껴졌다. 단장님보다는 로드가 훨씬 나았다.

진심은 역시 그녀가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싶지만. 랑기오사의 기억 속에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전율했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마 그 감각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유리엔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속에서 치민 물음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내내 궁금했던 이유.

“그대는 왜 사관학교에 지원했나?”

“기사가 되고 싶어서요.”

“왜 기사가 되고 싶지?”

“……검을 좋아하니까요.”

저건 거짓말이다.

유리엔은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에키네시아는 피하지 않았다. 굳은 채 그에게 잡혔다.

손바닥의 굳은살을 확인하고 그녀를 추궁하려던 유리엔은 그녀의 손을 쥐자마자 일순 넋이 나갔다.

부드럽고 작았다. 세게 쥐면 부서질 것같이. 곱게 자란 레이디의 손이었다. 그럴 거라 생각하며 쥐었음에도 그것이 속이 덜컹거릴 정도로 아려왔다.

마검에 물들어 있을 때 이 손은 거칠고 지저분했고 물집이 잡혔다 터지길 반복한 상태였다. 랑기오사의 기억을 체험하던 중에 본 손은 상처투성이였고 손톱의 모양까지 이상했다.

이 보드라운 손이 그렇게 되기까지 겪었을 고난들이 새삼 치밀어 오른다.

유리엔은 엄지로 그녀의 손바닥을 쓸어보았다. 매끄러운 장갑의 감촉 아래로 말캉한 살이 느껴졌다. 오른손이니 이 장갑 아래에는 마검의 문양이 있을 것이다.

‘다시는…… 그대가 이 손을 망가뜨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두 번 다시 괴로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상처 입힐 것 같다면, 모른 척하자.

그녀가 원하지 않는데 지워진 과거를 헤집지는 않겠다. 언젠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 기다림이 영원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유리엔은 그녀의 손을 쥔 채 속삭였다.

“……그대의 손은 검을 즐기는 손이 아니다.”

에키네시아가 손을 빼냈다. 그는 제 손안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붙잡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다시 묻지. 그대는 왜 기사가 되려 하나?”

계속 궁금했던 것. 대체 왜 그녀는 아젠카에 와서 창천의 매가 되려 하는가. 에키네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혼란한 기색으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그 평범한 말이 그에게 지독히도 깊게 와 닿았다. 그 속에 담긴 것들을 그보다 더 잘 알 존재는 거의 없을 터다.

신검 카이로스기오사 앞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살아갈 거야.〉

〈지금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으니까.〉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진심이에요.”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유리엔은 그것들을 힘겹게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군.”

묻지 않길 원한다면 묻지 않겠다.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는 없을 테니. 그대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드러나지 않게 그대를 지원하기만 하겠다. 아릿하게 미어지는 느낌 속에서 유리엔은 그렇게 결심했다.

에키네시아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대야말로, 입학 첫날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그냥 산책하다 보니 여기였어요.”

평범한 산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확히 이 중앙광장의 분수대로 왔으니까. 어쨌든 아젠카에서 떠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단 뜻이다.

기사가 되려는 게 목표고, 그에게 기억이 없는 거라 여기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녀는 아젠카에 있겠지.

재차 그것을 확인하자 안심이 되어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아,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확실히 티가 났다.

그가 웃자 그녀가 멍해진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된다.

망사를 치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선명한 보랏빛. 그녀가 자신을 본다. 가슴 안쪽이 두근거렸다.

앞으로는 더 자주 웃어야겠다.

“나도 그대와 같은 이유다.”

“산책을 나오셨다고요?”

“……그래.”

에키네시아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저를, 스콰이어로 지명하셨다고 들었어요. 왜 저를 스콰이어로 지명하셨죠?”

“그대를…….”

그대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

그대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대의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그대가 혹 살의에 휘둘릴 때 막아 주기 위해.

두근거림의 여운이 남아 넋 놓고 대답하려다 급히 말을 삼켰다. 말할 수 없다. 기억이 있다는 티를 내선 안 되니까.

그럼 뭐라고 대답할까.

기억이 없는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난데없이 스콰이어로 지명할 만한 이유가 있던가.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유.

이 순간 떠오른 건 그녀의 재능이었다. 그에게 최초의 패배감을 느끼게 만든 검.

“에키네시아 생도. 대련을 청해도 되겠나.”

“대련, 이요?”

“그대와 검을 나눠보고 싶어서.”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욕망이 솟구쳤다. 마검에 물들어 있던 그녀와 검을 맞대면서 안타깝게 여겼던 심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다르게 만났다면 몇 번이고 대련을 하며 더 높은 경지를 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그 바람도 그녀가 이루어냈다. 지금 그들은 다르게 만났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 저는…….”

그러나 그의 설렘과 반대로, 에키네시아는 공포에 질렸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뒷걸음질했다. 그 모습을 보자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준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처가 반드시 낫는다는 보장은 없다. 기다릴 수는 있다. 그러나 놓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엔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들리도록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그대가 괜찮을 때에.”

에키네시아의 드러난 어깨가 떨렸다. 추위가 아니라 공포일 것이다.

제니스의 경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을? 그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두려워하는 거겠지.

자신은 그녀에게 악몽을 자극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 악몽의 시작이 그였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도. 날카로운 칼이 서늘하게 파고들어 와 뱃속을 휘저었다.

유리엔은 그 칼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죄책감이다.

그는 후드를 벗었다.

“왜 그대를 스콰이어로 삼았는지는…… 검을 나눈 후에 답하지.”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후드 망토를 걸쳐주었다. 그녀를 위로할 수도 안심시켜 줄 수도 없어서 그저 후드 자락만 여며주었다.

“밤이 서늘하니 산책은 짧게 끝내도록, 에키네시아 생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길게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기를 원하지 않겠지. 마주하고 있을수록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를지도 모른다. 유리엔은 미련이 진득하게 남은 손을 간신히 그녀에게서 떼고 바로 돌아섰다.

[계속 모른 척할 작정이냐?]

그녀로부터 멀어지자 랑기오사가 조용히 물어왔다. 유리엔은 보이지 않게 이를 사려 물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녀가 지워버린 것들을 되살리겠나.”

[그야 남이 숨기길 원하는 비밀을 드러내는 건 무례하긴 하지.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면 그녀를 속이는 일이 되잖나.]

“……일단 지켜봐야겠다.”

유리엔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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