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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3화 (73/211)

검을 든 꽃 73화

1629년 4월 18일.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사관생도가 되었다. 그녀의 입학과 동시에 유리엔은 발령장에 도장을 찍었다. 공고까지 걸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초조하게 서성였다.

[뭐가 그리 불안하지?]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흠. 하긴 그 마검의 주인은 네게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할 테니.]

“……뭐?”

유리엔이 서성이던 걸음을 뚝 멈췄다. 랑기오사는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

[음? 몰랐느냐?]

“나는…… 당연히 그녀가 알 거라고…….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를 깨웠지 않나. 마검이 너에 대해 그녀에게 알려줬을 테니…….”

[바르데르기오사는 내가 늘 깨어 있는 검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어. 기오사들은 의외로 서로를 잘 모른다. 기오사끼리 자아가 깨어난 상태로 만날 일이 흔할 것 같으냐?]

“…….”

[그나마 나야 항상 깨어 있으니 다른 기오사들을 제법 아는 편이지만……. 바르데르기오사는 각성한 게 이번이 두 번째일 거다. 나에 대해 모를 수밖에.]

유리엔은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미처 몰랐다. 그는 당연히 그녀가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럼 그녀는, 내게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란 건가?”

[그렇겠지. 생각해 봐라, 그녀가 너에 대해 안다면 네 앞에 이리 순순히 나타나겠느냐? 자신이 죽였던 사람인데?]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에키네시아에게 자신이 악몽을 자극하는 방아쇠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있는 곳으로 왔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앞에 스스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스콰이어로 지명하기로 결정한 거였는데.

[그토록 애써 지운 과거다. 네가 그 지워진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성검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그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성검의 말대로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안다면 그를 피하는 게 정상이었다.

괜찮아서 아젠카에 온 게 아니라 모르니까 온 것이다.

정안이 있는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알아보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기억이 있더라도 자신을 못 알아볼 거라 생각하면서 아젠카로 왔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니콜 시즈튼이 악마가 된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알아 보지 못했던 것처럼, 정안이 없었다면 그도 그녀를 이리 쉽게 알아보진 못했을 텐데도.

‘스콰이어 지명 자체가 실수였나?’

유리엔은 멍하니 책상 위를 보았다. 스콰이어 지명은 이미 나갔다. 이제 와서 돌이키긴 어렵다. 이미 그녀는 들었을 거다.

다 알고 아젠카로 왔으리라 여겼기에, 그녀가 도망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해 보지 못했다. 스콰이어 지명을 통해 그가 그녀를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안심하지 않을까, 그녀와 그의 관계가 달라지리라고 여기지 않을까,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관생도가 될 이유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아젠카로 왔을 뿐, 그의 앞에 나타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면. 그는 모를 거라 여기고 안심하고 있는 상태라면.

‘……간신히 지워버린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알게 되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정말 달아나 버릴지도.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그녀는 마스터 위의 경지, 제니스다.

그녀가 작정하고 그를 피해 숨는다면 그는 그녀를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겨우 손닿는 곳에 존재하게 된 사람을 지켜보지도 못하게 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스콰이어 지명을 하지 않았을 텐데.

기억이 있다는 티를 낸 거나 다름없지 않나. 좀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야 하는데. 그녀가 가진 상처의 깊이를 잘 알면서도 성급했다.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이 와중에도 다가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괜찮을 수도 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우선 그녀를 직접 만나봐야 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 나 지금 그녀를 찾아가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상태인데 그가 지명하자마자 그녀를 찾아가면 괜히 더 자극하게 되는 게 아닐까.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그녀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세웠던 계획들이 전부 엉망이 되었다. 유리엔은 단장실 안을 초조하게 오가다가 창가에 멈춰 섰다.

단장실은 꽤 높은 층에 있었다. 창천기사단 본부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언뜻 분홍색이 눈가를 스쳤다. 유리엔은 곧바로 정안을 떴다. 눈부시게 빛나는 혼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성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아젠카는 시 전체를 감싼 외성이 있고, 중앙보다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내성이 있었다. 원래 내성만 있었으나 도시가 발전하며 확장되어 외성이 새로 지어진 경우였다.

창천기사단 본부나 대신전, 사관학교 등은 모두 내성 안쪽에 있었다. 보통 아젠카에서 ‘아젠카 성’이라거나 ‘성 안쪽’이라고 하면 내성 안을 일컬었다.

그녀가 그 내성 밖으로 향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전신에 차올랐다. 스콰이어로 지명된 것을 듣고,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나. 그래서 이대로 떠나 버리려는 건 아닌가.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유리엔은 후드를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단장실을 벗어났다.

[음? 갑자기 왜 그러느냐?]

성검이 당황한 듯 물었지만 무시했다. 달리면서 후드를 걸쳤다. 계단을 전부 내려갔다간 늦을 것 같아 중간에 복도의 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미친 듯이 달려서 그녀가 향한 곳을 쫓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따라잡았다. 에키네시아의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유리엔은 멈춰서 숨을 골랐다.

더 접근하면 그녀가 알아차릴 터였다. 딱히 주위를 탐지하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그녀의 감각은 틀림없이 그보다 넓을 테니까.

유리엔은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달아나는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옷차림과 태도로 느리게 걸었다.

처음에는 목적지가 없는 듯 아무렇게나 걷다가, 어느 순간 한 곳을 목표로 걷기 시작했다. 중앙광장 쪽이었다.

[너……. 지금 좀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성을 몰래 미행하다니.]

성검이 몹시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악한 짓이라고 경고한 게 아니었으므로 유리엔은 랑기오사의 말을 무시했다.

그사이 에키네시아는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가득 찬 사람들을 거슬러 그녀가 분수대 앞에 섰다.

지워져버린 1632년 가을, 그녀가 그를 맞이했던 분수대의 앞. 그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곳. 그의 이전 삶이 끝났던 장소.

그녀가 분수대의 천사상을 올려다보았다. 뒤에 있는 그는 그녀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정안을 떠도 고요히 타오르는 불빛만이 보였다.

유리엔은 소용없는 정안을 감아버리고 맨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짧은 망사가 달린 생화 장식 모자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며 저 분수대를 보고 있는 걸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보았던 혼처럼 울고 있을까 봐.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책하고 있을까 봐. 절로 걸음이 움직였다.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감싸인 하얀 얼굴.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된 여자는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보다 아름다웠다.

아니, 그냥 외모가 예쁘다기보다, 무언가, 눈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홀린 듯이 다가가다가 너무 가까워져서 놀라 멈췄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본다. 그의 턱에 겨우 닿는 키. 가느다란 목 아래로 보이는 여린 어깨. 그토록 강한 혼을 품고 있다고 믿기 어려운 가냘픈 몸.

처음 연회에서 보았을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마검에 물들어 있던 몸과 타오르는 혼을 볼 때와도 달랐다. 멀리 연무장에서 예선 시험을 치르는 것을, 태양이 된 혼을 볼 때와도 달랐다. 랑기오사의 기억 속에서 볼 때와도 완전히 달랐다.

다른 것에 물든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통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연의 눈으로 자신을 마주한 그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로 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저렇게 가는 몸으로 그 모든 시간을 견뎌내고 기적을 이루었단 말인가. 그저 평범하게 자란 백작의 딸이던 여자가.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 찾아든 깨달음.

아, 여자, 였었지.

이제야 그것을 완전히 깨닫는다. 가까워지고 싶다고, 다가가고 싶다고,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애타게 바라면서도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

망사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투명했다. 망사를 걷어내면, 더 맑고 또렷하겠지. 저 눈이 의지를 담을 때면 황홀할 정도로 강렬하다는 것을 안다.

그 강렬함을 감싼 것들은 한없이 여리다. 녹을 듯이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희게 드러난 목과 어깨의 선.

어깨가 호흡을 따라 조금씩 들썩인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붉고, 젖어 있었다. 입 안쪽으로 혀가 살짝 보인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켜보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아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는 생각했을지도 몰랐으나, 자각하지 못했던 것.

유리엔은 난생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 일순 전신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감각. 그 적나라한 욕망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는 그것을 애써 가라앉혔다.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엔은 다시 그녀가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그의 앞에 있는 여자는.

“……에키네시아 로아즈.”

로아즈 백작 영애. 마검의 악마. 위대한 검의 경지, 제니스를 달성한 검사. 자신으로 인해 나락에 떨어졌던 여자.

불씨를 태양으로 싹틔워낸 혼. 기적을 일으킨 사람. 그를 죽이고, 다시 살려낸 자. 그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강인하며, 가장 위태롭고, 가장 매혹적인 존재.

하지만 그가 그녀를 어떻게 여기든, 현재 그녀의 공식적인 신분은 그저 사관생도였다.

“생도.”

뒤늦게 호칭을 붙였다. 에키네시아가 화들짝 놀란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당황한 것처럼 보여서 유리엔은 망설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정말로 그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나?

입안에서 몇 번이나 발음을 해보다가 간신히 질문을 꺼냈다.

“나를 아는가?”

에키네시아는 흠칫하더니 눈을 내리깔고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녀가 시선을 피한 채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잘 모르겠어요. 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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