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72화
7. 지켜보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
유리엔이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자신의 스콰이어로 지명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로아즈 가문에 대한 보호였다.
학살을 일으켜야 할 마검이 아무 일 없이 사라져버린 지금, 황제와 2황자는 의심스럽게 로아즈를 지켜보고 있을 터다.
그 의심을 당장 지울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고작 쇼의 일환으로 마검을 이용해 학살을 일으키려던 아비와 형제다. 의심하던 끝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마검이 증발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다.
그 이유가 유리엔 자신이 되면 된다. 그가 로아즈에 보내진 마검을 어떻게든 처리했으리라고 생각하도록.
순전히 유리엔이 보인 관심 때문에 선택된 거나 다름없는 희생양인데, 몰살을 피해갔으니 어차피 로아즈는 유리엔과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정쩡하게 두는 것보다는 공식적인 관계를 만들어 버리는 게 나았다.
그녀를 스콰이어로 삼는 건 가장 빠르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가 있는 가문이라고 알려지면 되레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워질 테니까.
두 번째는 마검에 대한 감시였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가 마검에 누적된 살의에 휘둘려 우발적인 살인을 한 것을 몇 번 보았다.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마검을 통제했으나 감정적으로 흔들리면 실수를 했다. 그리고 실수를 할 때마다 지독히 후회하고, 자해를 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마검에 익숙해지며 그런 일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살의는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그녀가 마검과 대화하는 것을 얼핏 들은 덕에 그 상황을 알게 되었다. 마검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만 가지고도 대화는 대략 짐작이 되었다.
사람이 언제나 완벽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녀를 막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가까이에 있어야 했다. 스콰이어로 삼으면 곁에 두고 계속 지켜볼 수 있으니 유리했다.
성검의 주인으로서 우발적 살인을 방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녀가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녀가 이성이 나갈 정도로 분노해서 살의에 물들 정도면 사실 피해자도 무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그가 본 사례들은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죽이는 게 괜찮다는 소린 아니지만, 어쨌든 유리엔은 그녀가 그런 일로 제 손을 베는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랑기오사가 알았다간 주인이 미쳐간다고 기겁할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큰 이유는, 결국, 그의 욕망이었다.
좀 더 가까이에. 첫 번째 삶에서는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고 싶지 않아서.
사흘간의 번민 끝에, 유리엔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입학하자마자 스콰이어로 지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직 선발시험 결과도 나오기 전의 일이었다. 부단장 바론은 어이없어했지만 절차상 큰 문제는 없었다. 서류 준비는 끝났고, 그녀가 입학자마자 도장을 찍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를 스콰이어로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나자 약간 떨렸다. 아니, 사실 꽤 떨렸다. 내내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과 드디어 만나게 될 텐데, 안 떨리는 게 이상할 것이다.
‘뭔가, 선물이라도…… 준비할까.’
문득 든 충동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녀에게 줄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곧바로 검이 떠올랐다.
에키네시아는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내내 싸구려 검을 썼다. 이가 나가면 버리고, 또 제일 싼 것을 사고.
무기의 수준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인데다가 최선을 다해야 할 때는 마검을 쓰면 되므로 별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검을 쓰면 더 편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매번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도 성가실 테니.
검은 로드가 스콰이어에게 주는 선물로 가장 무난한 것이라, 사심이 들어간 선물로는 보이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유리엔은 그런 고려를 하는 시점에서 이미 사심이 듬뿍 들어갔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했다.
‘이왕이면 그녀에게 어울리는 수려한 것으로, 검을 볼 때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듯하니, 검을 굳이 손질할 필요가 없도록 마법을 걸어서…….’
랑기오사를 꺼내 세워놓고 멍하니 바라볼 때, 간혹 부서질 듯이 흐려졌던 표정들. 검을 휘두르고 나서 진저리를 치듯 검을 내팽개치는 행동. 손질하려는 목적으로 들어 올렸다가, 묻어 말라붙은 피를 보고 움찔 놀라더니 그대로 검을 버렸던 일.
그런 그녀를 지켜본 그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검 자체가 싫다기보다, 검을 볼 때 상기되는 악몽들이 싫은 것일 터다. 자신이 무엇보다도 잘하는 일을 진심으로 싫어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유리엔은 마탑에 특별히 의뢰를 했다. 제국의 마탑은 꺼려져서 남부 왕국의 마탑에 마법세공을 요청하고, 대장장이를 고용하여 직접 도면까지 참견해 가며 검을 만들게 했다.
예산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에 굉장한 비용이 들어갔지만, 그동안 딱히 무언가를 탐내거나 사치를 부려 본 적이 없어서 고스란히 모여 있던 재산이 상당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돈을 물 쓰듯 써 보았다.
[……너, 좀 변한 것 같군.]
성검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태연히 대꾸했다.
“변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네가 내게 그 기억들을 보여주기 망설인 것도 그 탓 아니었나?”
그는 평생 살아오면서 그녀처럼 대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빛나는 존재인데, 그녀를 알기 전과 그녀를 안 후가 같은 것이 더 이상했다.
누구든 그녀에 대해 알게 되면 매혹될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랑기오사는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검의 제작까지 맡기고 나자 유리엔은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사관생도가 된 까닭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대체 왜 그녀가 아젠카로 온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검의 주인답지 않은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뒷조사를 하겠다는 거냐.]
“예전처럼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고 싶지는 않다.”
[핑계는 좋은데, 그래봤자 뒷조사잖나. 조직까지 활용해서.]
“왜, 악한 짓인가?”
[……악행까지는 아니지만.]
성검이 못마땅한 듯 구시렁거렸다.
유리엔은 조용히 항구도시 올라바트를 방문했다. 올라바트는 ‘쐐기’라고 불리는 제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은밀한 조직의 본부가 자리 잡은 도시였다.
유리엔은 원래 이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존재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의뢰를 하는 법이나 구성 따위는 몰랐다. 창천기사단은 쐐기 같은 조직을 신경 쓰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집단이었고, 유리엔 자신은 지나치게 바른 길만 걸어와서 지저분한 뒷세계와 엮일 일이 없었다.
그가 쐐기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랑기오사가 보여준 에키네시아의 기억 덕분이었다. 지워진 시간에, 그녀가 기오사의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갔던 조직이 바로 여기였으니까. 창천기사단을 모욕하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녀에게 박살이 났던 바로 그 조직이다.
이전까지 유리엔이 쓸 수 있었던 정보 획득 수단은 황실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인맥과 임무를 나간 단원들, 기사단에 소속된 정보원들, 아젠카의 상인들 등을 이용하는 식이었으므로.
하지만 뒷골목의 조직은 다르다. 대가만 확실하게 주면 황실에게 들킬 일 없이 조사를 의뢰할 수 있었다.
[내 주인이 뒷골목 조직을 토벌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의뢰하러 가다니. 내가 오래 사니 이런 꼴도 보는구나.]
유리엔은 랑기오사의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며 조직을 찾아갔다. 후드를 눌러쓰고 뒷골목의 주점에 들어가 혼자서 맥주 두 잔과 구운 감자를 시켰다. 감자에 쐐기 모양 칼집을 낸 다음, 종업원을 불러 감자가 덜 익었으니 새로 달라고 요구했다.
“설익은 감자를 내어드려 죄송합니다. 주방장이 직접 사과를 하고 싶다는데요.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쐐기의 초대였다. 조직을 찾고 의뢰하는 과정은 에키네시아가 고생하며 알아낸 것을 본 덕에 매우 쉬웠다. 게다가 그때의 그녀는 돈이 별로 없었기에 의뢰하기가 힘들었지만, 유리엔은 돈이 아주 많았다.
쐐기는 많은 돈을 내는 의뢰인에게 몹시 관대했다. 후드를 눌러쓴 의뢰인의 정체를 캐려 들지도 않았다.
유리엔은 그들에게 몇 가지 조사를 의뢰했다.
첫 번째는 물론 로아즈 가문에 대해서. 가문의 내력과 직계 혈족들, 현재 가문의 대략적인 상황까지도.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유리엔은 그녀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전체적인 조사를 요구했다.
두 번째는 펠레트로 가문에 대해서. 이쪽은 주의가 쏠려도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특정인을 정확하게 지목했다. 이안 펠레트로를 조사해 달라고.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 그가 세운 계획에는 그녀에 대한 것 외의 다른 일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되돌려진 시간은 3년 반. 창천기사단장인 그가 아는 미래의 정보는 꽤 많았다. 그는 그중에서 필히 바꿔야 할 사건들을 추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올해에 있을 마물 토벌이었다. 희생자가 스물이 넘었던, 창천에서는 드문 대참사. 바론의 스콰이어인 바라하 이슬라프까지 그때 죽었다.
갑작스런 스펙터의 습격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겉으로는 그저 불운한 사고였다. 하지만 정안이 있는 유리엔에게는 심증이 있었다. 바라하의 죽음은 참사의 와중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일 거라는 확신.
그에게 바라하의 죽음을 보고할 때, 이안 펠레트로의 혼은 악의로 새카맣게 물들어 기뻐하고 있었으니까.
[증거가 없이 정안만으로 누군가를 처단해선 안 된다. 그건 옳지 않아. 나쁜 마음 정도야 품을 수도 있지, 인간인데. 실행에 옮길 때부터 죄악이 되는 거다.]
이안을 의심하던 유리엔에게 랑기오사가 했던 말이다. 유리엔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은밀히 이안 펠레트로를 조사했지만, 그는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경각심이 들었는지 이안이 유독 몸을 사린 탓도 있었다.
증거 없이 처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유리엔은 이안 펠레트로가 기사로 서임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다. 바라하나 다른 누군가를 해치도록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
쐐기라는 의외의 수단이 생겼으니, 미리 증거를 모아 처리해 버릴 작정이었다. 살인은 막을 생각이니 사형은 무리더라도 퇴학이라도.
이안 외에도 아젠카에서 축출해야 할 자들이 두엇 더 있었다. 그들에 대한 조사도 맡겼다.
악의가 보이는 유리엔은 뻔히 보고도 증거가 없어서 내버려두는 경우가 꽤 되었다. 대체로 아젠카 내에 어느 정도 세력이나 연이 있어서 증거를 잡는 게 쉽지 않은 자들이었다.
쐐기는 그들의 상정 외에 있던 세력이니 쓸모가 있을 터였다. 증거만 있다면 처벌은 어렵지 않았다.
[악을 악으로 잡는 거냐. 뭐, 나쁘지 않군. 그래도 저것들도 질이 나쁜 것들이니 너무 의지하진 마라.]
“주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쐐기에 조사를 맡긴 것과 동시에 믿을 만한 단원들을 이용해 쐐기를 조사하도록 했다.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악행을 저지르는 조직이라면 이용하는 것과 별개로 처리해야 하니까. 조직에 대해 모를 때야 그렇다 치고 알게 된 이상 내버려둘 순 없었다.
[써먹긴 알뜰하게 써먹으면서 뒤로는 쳐낼 준비를 하다니.]
“정의롭지 않은 일인가?”
[아니. 저 조직 자체가 악한 축이라서 그건 또 아니거든. 너도 그걸 알고 이러는 것 아니냐?]
“그럴 거라 생각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네가 내 주인이 아니었으면 꽤 무서운 인간이었을 것 같단 말이지.]
성검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랑기오사가 뭐라 하든 유리엔은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그는 쐐기에게 마검의 음모에 대한 조사는 맡기지 않았다. 조직 따위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황태자 측에서 열심히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있을 거다. 황태자가 3년 반 후에 유리엔에게 보여주었던 그 서류는 단기간에 정리될 만한 자료가 아니었다.
마검에 대해 파고들면 필연적으로 로아즈가 엮여들게 되므로 그런 일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에키네시아가 되도록이면 자신과 얽힌 혼란에 엮이지 않기를 원했다. 그녀는 이미 너무 큰 고통을 받았다.
이번에는 적어도 평온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녀가 신검 앞에서 말했던 대로 행복해지기를.
쐐기에 대한 조사까지 명한 후에 한 것은 이사였다. 본부와 떨어진 사택보다 본부 내의 숙소가 더 가까우니까.
유리엔은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입학하기 전의 며칠 사이에 이 모든 일을 마쳤다. 그리고 그녀가 입학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