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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1화 (71/211)

검을 든 꽃 71화

랑기오사의 기억은 연속적이지 못했다. 에키네시아는 오너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문양으로 만들 수 없는 기오사들을 짊어지고 다녔지만, 안전한 곳에 두고 다닐 때도 많았다. 각성시킨 기오사는 바르데르기오사 하나인 것 같았다. 오너 조건을 만족시킨 기오사라 해도 쓸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다른 기오사에 비하면 랑기오사는 거의 대부분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종종 손을 댈 수 없는 성검을 기대 세워놓고 멍하니 지켜보곤 했다.

유리엔은 그녀가 성검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띄엄띄엄한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는 그녀가 로아즈 저택을 방문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폐가가 된 저택을 둘러보며 절망으로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결국 모든 곳을 확인했다. 핏자국이 남아 있는 장소까지도.

그러고 나서는 저택의 중앙계단에 앉아 밤을 샜다. 계단에 홀로 앉은 에키네시아는 무표정했다.

그는 차라리 그녀가 우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끝까지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 한 번 외에는 로아즈 저택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에키네시아는 가끔 제국 남부에 세워진 위령비를 방문했다. 그 위령비는 유리엔이 학살 뒷수습의 일환으로 세웠던 것이었다.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그녀는 꼭 그곳에 들렀다.

그때마다 그녀는 위령비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참을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위령비 아래에 꽃을 바치거나 기도를 올리고 갔다. 그녀는 매번 그것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멸망한 아젠카는 일부러 피해 다니는 듯했다. 지도를 보고 계획을 세울 때 그녀는 항상 아젠카를 피해 가는 경로를 잡았다.

에키네시아는 기오사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되도록 합법적인 경로를 통하려 했지만, 사실 기오사 같은 물건을 용병에 가까운 상태인 그녀가 합법적으로 손에 넣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리엔은 그녀가 기오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뒷골목의 조직 간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오물이 묻은 장화로 머리를 짓밟히면서도 그녀는 덤덤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자들이 창천기사단을 비웃는 것은 참지 못했다.

“어지간하면 곱게 거래하고 싶었는데, 빌어먹을 자식아. 그 사람은 네놈이 멋대로 입에 담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결국 조직 전체를 상대하고 피범벅이 된 채로, 그녀는 간부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운 좋게 기오사를 손에 넣은 상인이 기오사를 줄 테니 해 오라며 내 준 임무가 대놓고 거기서 죽으란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기괴한 마물이 많은 곳이었다. 에키네시아는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웬만해선 다치지 않았지만, 마물을 상대할 때는 종종 다쳤다.

사람과 달리 마물은 돌발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난데없이 팔다리에서 산성액을 뿜어내는 식으로.

그녀는 부상을 입어가면서 그 임무를 혼자 해내고는, 상인에게 돌아갔다. 상인은 당연히 기오사를 내 주지 않고 그녀를 독살하려 들었다.

독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그만 중독되어 버렸다. 워낙 강한 독이었던 탓에 한 모금 먹자마자 뱉어 버렸는데도 몸이 휘청거렸다. 에키네시아는 그 상태로도 상인의 저택을 쓸어버리고 기오사를 찾아내었다.

물론 그 뒤로 한동안 중독증세 탓에 호되게 앓으며 사경을 헤맸다. 그녀를 간호해 줄 사람이나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혼자 앓았고 혼자 치료했다.

마나는 육체를 강화하고 보조할 수는 있어도 독이나 병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마나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한 덕분에 그녀는 치사량의 독을 버텨내고 혼자서도 몸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절에 뛰어들어 간 적도 있었다. 기오사 하나가 결절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결절이 생겨난 장소가 사형장 근처라서 결절 내부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에키네시아는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만신창이가 되어가며 모든 마물을 처리하고 나서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결절이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그 안에서 버텨야 하는데, 그녀에게는 식량이 없었다. 결절 내부에 먹을 것이 딱히 있지도 않았다. 결국 마물의 고기를 먹고 마물의 피를 마시며 버티다가 그녀는 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녀가 마스터 위의 경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유리엔은 그녀가 도달한 경지를 무어라 부르는지 알았다.

제니스(Zenith).

검의 달인을 넘어서, 검의 정점에 오른 자.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일반인들은 존재도 잘 모르는 경지.

어느 나라에 가도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실력을 가지고도 그녀는 진창을 구르며 기오사만을 모았다.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무너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전하지는 못했다.

유리엔은 그녀가 악몽을 꾸다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는 일이 잦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의 제대로 자지 않았다. 정확히는 몸을 혹사해서 기절하듯 잠드는 게 아니면 악몽 때문에 계속 잠에서 깼다.

마검에 누적된 살의에 휘둘려 의도치 않은 살인을 한 날이면, 그 트라우마는 더 강력해졌다. 그녀는 그것 때문에 자해를 한 적이 있었다.

유리엔은 제 오른손을 칼로 그어 버리는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644년.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아젠카에 발을 들였다. 신검 카이로스기오사를 마주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과거로, 나를 돌려보내 줘.”

“살려내고 싶으니까. ……내가 죽인 사람들을.”

“지금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지금의 나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으니까. 마음 편히 잠들 수조차 없어서…….”

카이로스기오사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만으로도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쉰 목소리로 그녀가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말들이 뚜렷한 궤적을 그리며 그의 내부에 와 박혔다.

그녀는, 그 긴 고통 끝에서야, 비로소 기적을 얻었다. 신검이 그녀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트러진다. 세계가 되감겼다.

그와 동시에 유리엔은 눈을 떴다.

이른 아침이었다. 갓 떠오른 햇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가슴께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호흡이 엉망이었다.

“컥…….”

[하룻밤 만에 많은 기억을 봐서, 좀 어지러울 거다. 괜찮나?]

성검이 혀를 차며 물었다. 유리엔은 쾅쾅 울리는 머리를 짚었다. 흐릿하게 떠진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가 지켜본 그녀의 모습들이 그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지금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그녀가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기적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알았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속이 후벼 파이고 짓이겨지는 듯한. 세상이 송두리째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는 것처럼.

그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혔다. 고개를 젖히자 스스로도 모른 채 고여 있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에키네시아.

아, 정말로, 나는.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유리엔이 평생 봐온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지만, 신은 아니었다. 새카맣고 깊은 상처가 그녀의 안에 남아 있었다.

유리엔은 감히 그 상처의 깊이를 잴 수 없었다. 그 상처의 시작이 바로 그였다. 그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저 평범한 백작가의 딸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을 그녀가 알면 어떻게 될까. 지독한 죄책감. 그녀에게, 그녀의 삶이 고작 그의 시선 때문에 망가진 거라고 고백하면, 그녀는 분노할까. 자신을 증오하게 될까.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사죄하는 길이 될까. 사죄할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그녀는 제 죄가 아님에도 끝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며 제게 희생된 모든 이들에게 사죄를 했다. 태양이 되어, 결국 기적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녀의 희생이나 노력을 알지 못한다. 알아줄 수도 없었다. 그 시간들이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되었기 때문에. 성검을 통해 본 그조차 일부만을 알 뿐이다.

그 외롭고 긴 인고의 세월을 보상해 준다는 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그녀가 그 고통을 겪으며 겨우 얻어낸 이 기회를, 그가 다가갔다간 망가뜨리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왜…….’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지는가.

그 기억을 지켜보는 내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 닿고 싶어 몸부림쳤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악몽을 꾸며 일어나는 그녀를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홀로 앓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혼자 싸우지 않도록 함께 검을 들어주고 싶었다. 마검에 휘둘렸을 때 자책하지 않도록 막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마검의 악의와 그녀가 싸우던 시절에도, 그녀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에도,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시 시작된 지금은?

그녀는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사관생도가 되려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원한다면 언제든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

다가간다면. 그가 그녀에게 접근한다면. 지금의 그녀에게, 그는 어떤 존재일까.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악몽을 상기시키는 방아쇠가 되는 것 아닐까. 간신히 모든 것을 되돌린 그녀 앞에 그가 나타나면, 그녀의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도. 그럼에도, 혹시나. 어쩌면. 그녀가 얻어낸 이 두 번째 삶에서는 모든 것이 바뀔 테니까. 그와 그녀의 관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욕망과 공포가 번갈아 뇌리를 장악했다. 다가가고 싶은 욕망. 비극이 재현될까 봐 두려운 공포. 그리고 짙게 넘실거리는, 비합리적인 죄책감.

어지러웠다. 유리엔은 성검이 무어라 말을 거는 것조차 듣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번민했다.

그는 그날부터 사흘간 기사단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론이 걱정을 내비치고 디트리히가 찾아왔지만 휴가만 내어놓고 사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흘 후, 유리엔은 창천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노크조차 없이 바론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여태껏 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온 적이 없어서 바론은 깃펜을 든 채 놀라 굳었다.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리엔은 초췌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반면 하늘색 눈동자는 형형할 정도로 깊었다.

바론의 책상 앞에 선 그가 기묘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관학교 신입생을 스콰이어로 지명하는 것에,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예?”

“스콰이어를 지명하려 한다.”

스콰이어?

임시 스콰이어조차 지명한 적이 없어서 생도 순위대로 교체되게 내버려두던 단장이, 지금 뭐라고? 게다가 뭐, 신입생을? 아직 선발시험 결과도 안 나왔는데?

경악한 바론은 힘 조절에 실패해서 쥐고 있던 깃펜을 부러뜨려 버렸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의 두 번째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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