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70화
“잊으라고?”
[시간이 되돌아왔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이제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일들은. 그러니 그걸 굳이 안고 있을 필요가 있는가? 고통스러운 기억이지 않나.]
랑기오사의 말대로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되새길 때마다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꿈이라 치부하며 잊어버리려 노력한 기억들.
만약 성검이 사관생도 선발시험 이전에 깨어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는 진지하게 잊어버리는 것을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버렸다. 그녀를 본 순간 휘몰아쳤던 감정들이 아직도 그의 내부에 남아 있었다.
참혹한 끝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대해 잊어버리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특히 그녀를 지켜보았던 기억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그녀의 사투를, 그 처절한 시간들을 그마저 잊어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그런 비극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있는 게 낫다.”
[말했지, 앞으로 그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마검의 악마는 사라졌고,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너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잊어버리는 게 낫다.]
성검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확실히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악마였던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마검과 관계없는 사관학교 응시생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계속 잠들어 있었던 성검은 모르는 게 정상인 사실이었다. 유리엔은 의심스럽게 황금빛 문양을 응시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지금 마검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들리는데.”
[…….]
성검이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은 잠시 기다리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랑기오사. 뭘 숨기려 하는 거냐? 내가 죽은 이후 무슨 일이 있었지?”
[…….]
“혹, 기오사를 모아서 시간을 돌린 자가…….”
그는 뒷말을 내뱉기 전에 숨을 멈추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간신히 그 이름을 발음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인가?”
[너, 그 여자의 이름은 어디서 들었지? 넌 그녀의 이름을 몰랐잖아.]
“그녀가 사관학교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이런…….]
성검은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몹시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와 네가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주인은 너고, 너는 그녀 탓에 죽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니.”
[그래, 아니지.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었어. 너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녀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랑기오사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잠깐 말을 멈췄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이어 말했다.
[정말로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그와 별개로 그녀에 대해 알게 될 네가 걱정된다.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았고, 많은 인간을 보았고, 여러 주인을 거쳤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
“랑,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린애가 아니라서 걱정하는 거다, 주인.]
“대체 뭘 걱정하는 건가.”
[대대로 내 주인들은 곧았다. 곧은 만큼, 엇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지. 네가 그렇게 되는 건 보고 싶지 않군.]
유리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경고조로 말했다.
“그게 어린아이로 보는 것과 뭐가 다르지? 너는 내 부모가 아니고, 나는 너의 주인이다. 랑기오사, 나를 제한하려 들지 마라.”
[너를 제한하려는 게 아니라…….]
“선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면서 네가 원하는 대로 나를 유도하는 것이 제한하려는 게 아니면 뭐지?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건 아니지. 미안하다.]
성검은 순순히 사과했다. 랑기오사가 그를 아끼는 마음으로 저러는 것은 알아서, 유리엔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사실대로 알려다오. 시간을 되돌린 게 그녀인가?”
성검은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이 대답했다.
[그래.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인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시간을 되돌렸다.]
“어떻게?”
유리엔은 마지막으로 본 그녀를 떠올렸다. 악의에 얽매여 울부짖던 모습. 그리고 어제 보았던, 태양처럼 빛나는 그녀의 모습.
그녀라면 언젠가 이겨내리라고 믿긴 했지만, 어떻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기적을 대체 어떻게 일으킨 거지?
[말로 하기엔…… 어렵군. 내 기억을 공유해 주마.]
“기억을 공유한다고? 그런 것도 가능한가?”
[영혼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냥 직접 봐라.]
성검은 포기한 듯이 말했다. 동시에 손바닥의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황금빛 마나가 일어나 그를 휘감았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자, 시야가 한순간에 새카맣게 물들었다. 어딘가로 훅 빨려드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어둠이 찾아왔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길고 가느다란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이 정도 빛으로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는데, 지금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엔은 자신이 성검 랑기오사가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는 랑기오사의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거겠지만.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위에서 빛이 쏟아졌다. 상자 같은 것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뚜껑이 열렸다. 눈이 부셔서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찾았다.”
가늘고 맑은 여자의 목소리. 지친 듯 숨을 몰아쉬며, 벅차오른 설렘을 담고 흘러나온 혼잣말.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목소리일 터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는 온 정신을 기울여 그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드디어…….”
말을 할수록 물기가 묻어났다. 그리고 물방울이 하나 툭 떨어졌다. 빛에 익숙해지며 시야가 차츰 선명해졌다. 유리엔은 손을 뻗어오는 그녀를 보았다.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맨얼굴, 낡고 해진 가죽옷. 그 위로 양동이로 쏟은 것처럼 피가 가득했다. 그녀의 피인지, 타인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밀어지는 손과 팔에 흉터가 있는 게 보였다. 옷 밖으로 드러난 곳에 상처가 많았다. 화상 같은 것, 눌러 붙은 자국, 멍, 베인 상처.
그 손이 랑기오사에 닿았다. 아니, 닿지 못했다.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무언가가 튀었고, 에키네시아는 손을 움츠렸다. 그녀는 몇 차례 더 성검을 쥐려 했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멍했다. 그리고 서서히 일그러진다. 자신이 왜 랑기오사를 쥐지 못하는지 깨달은 것처럼.
유리엔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마침내 흘러넘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상자를 붙들고 주저앉아, 숨 가쁘게 울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상자를 쥔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뺨에 묻어 있던 피가 눈물에 씻겨 내려갔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억눌린 울부짖음.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저릿할 정도로, 가슴을 울려서. 유리엔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호흡조차 잊고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울고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그녀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두건 같은 것을 풀어 내렸다.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짧은 분홍 머리가 흐트러지며 드러났다.
그녀는 그 천으로 손을 감싸 랑기오사를 쥐었다. 손잡이를 천으로 둘둘 두르고 들어 올렸다.
유리엔은 비로소 상자 밖을 보게 되었다. 횃불로 밝혀둔 동굴이었다. 제단 같은 것이 보이고 그 위로 해체된 인간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신관 비슷한 옷을 입은 자들과 무장한 인간들이 사방에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어떤 곳이었는지 대강 짐작되었다. 인신공양을 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예배당 같았다. 랑기오사가 어쩌다 이런 곳에 있게 되었나. 의아해졌다가 곧 납득이 갔다.
마검의 악마는 기오사 오너를 죽이는 데에 관심이 많았지만 남아 있는 기오사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전의 행동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주인 잃은 기오사들을 내버려두고 죽일 인간을 찾아 그냥 떠났을 듯했다.
아젠카는 소속된 국가가 없기에, 폐허가 되어 버려진 아젠카를 발견하고 약탈한 자들이 여럿일 터다. 그로인해 기오사는 뿔뿔이 흩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수호할 창천기사단이 없어졌으니 기오사를 탐하는 자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떠돌게 되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키네시아가 랑기오사를 눕혀 들었다. 그녀는 눈물이 흠뻑 남은 얼굴로 망연히 하얀 칼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눈. 바스러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처럼 약해진 표정. 메마르고 튼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유리엔.”
그의 이름이었다. 이 순간에 이곳에서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름. 유리엔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그녀가 손끝으로 칼날을 더듬었다. 닿지 못해서 칼날 바로 위를 스치듯 쓸어내려 간다. 간신히 진정되었던 얼굴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나를 믿어준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까처럼 오열하지는 않았다. 소리 없이 솟구친 눈물만 칼날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닿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물은 성검에 닿을 수 있었다. 랑기오사의 날을 타고 그녀의 눈물이 흘렀다.
“반드시, 증명할 테니까……. 반드시…….”
유리엔은 허무하게 빈 것처럼 보이던 그녀의 눈에 서서히 빛이 깃드는 것을 보았다. 흐릿하게 풀려 있던 보라색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며, 눈빛이 점점 뚜렷해진다. 그 눈은 그녀의 혼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뒷말은 입속으로 웅얼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랑기오사를 천으로 감싸 품에 안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선 그녀는 부서질 듯 약해 보이던 표정을 완전히 지우고,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진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뎠다.
유리엔은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정안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혼이 타오르는 환상이 보였다. 랑기오사의 기억 속이라 숨을 쉴 필요도 없고, 몸도 없는데도,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가 벅차오르며 동시에 애처롭도록 아려왔다. 존재하지 않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박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