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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69화 (69/211)

검을 든 꽃 69화

1629년 4월 10일.

아젠카 사관학교 생도 선발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유리엔은 행정실 근처를 지나가다가 소란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사무관들이 잡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사무관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 설명했다.

“응시생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잠시 농담을 했습니다!”

“특이하다고?”

그가 반문하자 사무관들이 재빨리 물러나며 창가를 가리켰다.

“저기에…… 보면 바로 아실 겁니다.”

유리엔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이 많았다. 습관적으로 정안을 떴다. 뜨자마자 그의 시선은 한 곳에 붙들렸다. 시선이 덫에 걸린 것처럼 가 박혔다.

태양이 거기에 있었다.

잿빛 그림자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타오르는 혼. 홀로 솟구치는 불길 같은 빛. 백색에 가까운 엷은 보랏빛을 광휘처럼 두른,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압도적인 불.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는 여자였다. 모를 수가 없다. 그는 그녀가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더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그녀가 존재한다. 꿈이 아닐까 의심했던, 실존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사람이,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했다. 기억 속에서보다 더 눈부시고, 더 아름답게 빛나며.

그 순간 그에게 휘몰아친 감정은 그 스스로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감정들이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제대로 서 있기가 어려워서 유리엔은 창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잊으려 노력했던 기억들이 범람하며 솟구쳐 올랐다. 피와 시체와 악의로 뒤덮인 악몽들이.

그리고 그 악몽 속에서도 끝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눈에 담고 있었던 광경이.

자그만 씨앗은 악의 속에서 스러지는 대신 타오르며 불꽃이 되었었다.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말갛게 빛나는 태양이 되어 나타났다.

아찔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거센 확신이 찾아왔다. 그 모든 기억들이 고작 꿈에 불과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내부에서 치솟은 감정들이, 그토록 강력했다.

“아젠카의 생도 선발시험에서 드레스 차림의 응시생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옆에서 사무관이 중얼거리는 말이 아주 천천히 귀로 들어왔다.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손아귀에 움켜쥔 창틀의 감촉, 창밖에서 들리는 웅성거림, 뺨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정안에 비치는 그녀의 혼.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응시생?”

“예. 사관학교를 뭐로 보는 건지……. 철없는 아가씨인 모양입니다.”

사관학교 응시생이라니. 응시생?

저토록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곁의 사무관은 그녀가 탈락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무시하는 투에 울컥 화가 났다.

누구도 그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약간 비꼬듯 물었다.

“자네는 저 여자가 탈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 그야……. 아, 아닙니까?”

유리엔은 정안을 감았다. 맨눈으로 그녀가 예선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아는 미래대로라면 이 무렵 악마가 되어 학살을 하고 다녀야 할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그가 처음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처럼, 드레스를 입은 채 검을 뽑아든다.

“나라면 그녀가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한다는 쪽에 걸었을 거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악의에 휘감겨 울부짖는 혼도 아니고 검은 머리에 지저분한 몰골의 몸뚱이도 아니었다. 거리가 멀었으나 마스터인 그에게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얼룩이 남아 있지 않은 뽀얀 피부 위로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팔랑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생기를 담고 반짝였다. 발긋한 입술이 살짝 휘었다.

혼과 일치된 몸.

그가 내내 알고 싶었던 본래의 그녀가 그 곳에 있었다.

정안을 뜨고 있지 않은데도 눈이 부셨다. 창틀 너머로 저절로 몸이 기울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마주보고 싶다.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그는 그녀의 음성을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마검에 물들어 으르렁거리는 게 아닌, 뜻을 담고 말을 하는 그녀의 음성은 어떨지 몹시 궁금해졌다.

유리엔은 자신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흠칫 놀라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그녀는 지켜보지 않아도 사관학교 선발시험 정도는 장난처럼 통과할 터다. 환상이 아니니 어딘가로 사라질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응시생이라고 했다. 그녀가 사관생도가 되면 그와 가까운 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철문 너머에서 발버둥치는 닿지 못할 혼 대신, 살아 숨 쉬는 그녀가 그의 도시에 존재하게 된다.

심장이 기묘하게 술렁였다. 간신히 요동치는 마음을 잠재우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그대로 나가려다 말고,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무관에게 명령했다.

“지원서를 가져와라.”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조사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것 같아 알아보지 않았다. 실제로 시선 한 번에 그 사달이 났으니 그의 두려움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응시생의 지원서를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곳은 제국이 아니라 아젠카, 그의 영역이므로.

사무관들이 서류더미를 뒤져 그녀의 지원서를 찾는 동안, 유리엔은 그저 덤덤하게 서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격동이 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곧 알게 될 테니까.

유리엔은 그녀의 지원서를 받아들었다. 다른 모든 사항보다 뚜렷하고 커다랗게, 그녀의 이름이 눈에 들어 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분홍색 꽃의 이름. 관상용 화초임에도 불구하고 들판에서도 잘 자라는 꽃. 읽는 순간 그의 안에 깊숙하게 새겨졌다.

줄곧 알고 싶었던, 하지만 알아내선 안 되었던, 그래서 언젠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면 그녀에게 직접 듣고 싶다고 내심 바라며 기다렸던,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면서 이제 영원히 알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런 이름이었다.

“에키네시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자 심장박동이 약간 빨라졌다.

이름이 있었다.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있었던 여자는.

‘……마검은 어떻게 된 거지?’

그가 아는 ‘미래’, 꿈인 줄 알았던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사관생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악마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서는 늪 같던 악의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본질은 처음 보았던 불씨도, 마지막에 보았던 불꽃도 아닌 압도적인 태양으로 변화했다.

마검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녀는 어째서 저토록 강렬한 혼이 되어 이곳에 나타난 걸까.

“달라졌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수고하도록.”

모든 것이 달라졌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유리엔은 지원서를 돌려주고 행정실을 나왔다.

* * *

성검 랑기오사는 그 다음날 늦은 밤에 깨어났다. 유리엔은 어제 하루 종일 정리해 놓은 그가 아는 미래에 대한 기록을 침실에서 들여다보다가 랑기오사의 부름을 들었다.

[주인.]

“……랑기오사?”

[지금이 며칠이지?]

“1629년 4월 11일이다.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가?”

[거의 기절이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헝클어진 기억들을 정리하느라……. 두 번째 겪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질 않는군.]

“두 번째?”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말이다.]

유리엔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것 외에는 현재와 그의 기억 사이의 괴리가 설명되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연한 짐작과 당연하다는 듯한 확답을 듣는 것은 꽤 다른 일이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시간이 되돌아간 거였나? 3년 반 전으로?”

[3년 반? 아니, 15년일 텐데……. 아, 그렇군.]

“15년?”

이해할 수 없는 숫자가 나왔다. 유리엔이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성검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유리엔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라는 건 무슨 소리지?”

[시간이 되돌아간 게 처음이 아니거든. 몇백 년 전에도 한 번 시간이 되돌려진 적이 있었다. 카이로스기오사의 힘이었지.]

신검 카이로스기오사는 시간을 재료로 만들어진 검이다.

기오사를 수호하는 창천기사단의 단장인 유리엔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오사 전설을 떠올렸다. 인간이 만든 열 자루의 기오사를 모으면 신검이 힘을 빌려준다던 전설.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나.”

[잠깐 기다려라. 나도 막 깨어난 참이라. 네게 어디까지 알려줘도 되는지 판단이 안 서는군.]

“……그건 내게 감춰야 하는 일이 있다는 소린가?”

[감춘다기보다…….]

성검은 망설였다. 그러곤 내키지 않는 투로 뒷말을 이었다.

[사후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애매해. 지난번에 시간이 움직였을 때엔 내게 주인이 없었단 말이다.]

그가 죽은 후에 있었던 일.

3년 반이 아니라 15년.

기오사를 모으면 신검이 힘을 빌려주는 전설.

카이로스기오사.

성검이 흘린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기묘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설마.

유리엔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기오사를 모아서 신검의 힘으로 시간을 되돌렸나.”

[정확하다. 기오사들에겐 그 되돌려진 시간들이 새겨져 있지. 따라서 기오사를 각성시킴으로써 혼이 기오사와 연결된 오너는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너를 통해 내 기억이 유지된단 뜻인가?”

[그래. 다른 기오사들도 지워진 시간들을 알고 있으니, 네가 만약 나 외의 다른 기오사를 각성시킨다면 내가 없어도 그것을 통해 기억이 유지될 거다. 반면 기오사를 각성시키지 않은 자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를 버리면, 너는 그 시간들을 잊게 돼.]

랑기오사의 설명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직 기오사 오너가 아닌 디트리히를 제외하더라도, 1632년에도 기오사 오너였고 지금도 기오사 오너인 테레사나 바론이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이유. 자신의 기오사를 각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운이 좋은 경우로군.”

랑기오사는 언제나 각성 상태인 기오사다. 악행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따로 각성시킬 필요가 없는. 유리엔의 말을 알아들은 랑기오사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글쎄, 기억하고 있는 게 좋은 일인가? 나는 모르겠군. 잊는 게 낫지 않겠나?]

잊는 게 나은 기억 아니냐고?

유리엔은 당황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랑기오사는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잊는 건 간단하다. 나를 버리고, 다른 기오사를 들여라. 창천기사단장인 너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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