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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68화 (68/211)

검을 든 꽃 68화

아젠카로 다가갈수록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겼다. 그 악취를 맡는 순간 유리엔은 어떠한 예감을 느꼈다. 피칠갑을 한 성벽에 늘어진 시체를 보면서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그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악마는 적나라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엔은 말에서 내려서 걸었다.

그는 16살에 황궁에서 쫓겨나듯 보내져 아젠카에 도착했었다. 그때부터 줄곧 아젠카에서 살았다.

사관학교의 최소 입학연령인 18세까지는 혼자서, 이후 사관생도로서, 그 다음에는 바론의 스콰이어로서, 기사로서, 기사단장으로서. 그렇게 15년을 아젠카에서 살았다.

발치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지와 내장이 나뒹굴었다. 시체가 썩어 가는 악취에 코는 이미 마비되었다.

말라붙은 핏자국,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직도 마르지 않은 피 웅덩이. 죽어간 사람들의 파편. 살해된 자들의 몸뚱이.

그가 자라나고 뿌리를 내린 도시이자, 그가 지키며 가꾸었던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유리엔은 죽어가는 영혼처럼 그 지옥을 가로질렀다. 사방이 고요한데도 귀에는 생생한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중앙광장에 도달했다. 분수대의 가운데 있는 신검을 든 천사상이 물 대신 피를 흘렸다.

천사상의 꼭대기에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시체들이 걸려 있었다. 유리엔은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의 친구와 친구가 좋아하던 여자. 두 명의 기오사 오너가 천사상 위에 있었다. 분수대 아래에서 썩어 가는 커다란 덩치의 시체는 한때 그의 로드였던 부기사단장이었다. 일부러 끌어다 놓은 것처럼 그 시체들은 그렇게 전시되어 있었다.

1632년, 가을, 아젠카.

피로 물든 분수대의 앞에서.

유리엔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파괴한 여자를 마주했다. 검게 물든 머리를 흩날리며 여자는 웃었다. 새카만 마나가 그녀의 주위에서 휘몰아쳤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는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분노할 수도 없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그녀를 증오할지라도 그는 그녀를 증오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악마가 된 것이 그 때문인데, 어떻게 감히, 그가, 그녀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그저 막막한 절망. 호흡을 따라 악취처럼 슬픔이 들어왔다. 그것이 목을 태우며 내려가 가슴을 파헤쳤다. 너무나 아득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연회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젠카를 떠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의미한 가정들이었다. 이미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정안을 떠 보았다. 일렁이는 악의 너머로 그녀의 혼은 울부짖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희미한 씨앗에 지나지 않았던 불씨는 이제 환하게 타오르며 그녀의 혼을 채웠다.

그 빛나는 영혼이 양뺨을 눈물로 가득 적신 채 몸부림친다.

그토록 강렬해졌음에도 늪 같은 악의가 더 짙었다. 시커먼 악의가 그 목을 조르고 사지를 얽어 제 안으로 삼킨다.

그 처절한 발악이 낱낱이 보였다. 무너지는 대신 타오르는 것을 택했기에 그녀는 여전히 고통에서 놓여 나지 못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리면 편해질 텐데.

제 앞에 서 있는 자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원흉인 줄도 모른 채, 절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유리엔은 눈을 감았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온 몸에 남아 있는 피라는 피는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전신이 차가웠다. 아직 살아 있음에도 시체가 되어버린 듯했다. 아니, 이미 자신은 시체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벌어진 입 밖으로 신음처럼 말이 새었다. 그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내가 그대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그대의 삶을 망가뜨렸다. 이 지옥은 결국 내가 불러낸 것이다. 그대는 죄가 없다. 그저 내가 그대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이다. 작은 호기심이었다. 그것이 이런 비극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것이 그대를 악마로 만들어버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나는 그 일을 금세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된 게 누구 때문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감히 그대를 연민했다. 그대에게 기회를 주겠다니, 베푸는 듯이 굴었다니, 지독히도 오만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무지하고 멍청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말로. 그대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사죄가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미안하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심장이 지져지는 듯한 감각.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 무언가가 꽉 틀어박힌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성검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저 여자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여기선 일단 빠져라, 너 혼자선 그녀를 이기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대응해라.]

유리엔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미 전부 부서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랑기오사를 뽑았다.

[이 멍청이가, 죽는단 말이다!]

성검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로 차분한 성검답지 않은 일이었다. 유리엔은 그 말을 무시하며 하얀 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이 검을 쥘 수 있다는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정의라니. 정의는 무슨. 여기에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들고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유리엔은 정안을 치켜떴다. 너무 짙은 악의라 정안을 뜨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전투에 방해되었지만, 그는 정안을 감지 않았다.

싸우는 내내 그는 그녀를 정안으로 바라보았다.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름조차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알지 못할 그녀의 노력은 알고 있다. 외면할 수도 없었고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눈 안에 새겼다.

결국 패배하고, 성검을 떨어뜨리고, 마검에 꿰뚫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 * *

긴 암흑이었다.

1629년 3월 17일 새벽.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자신의 침실에서 눈을 떴다. 그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익숙한 천장이 한없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는 몇 차례 눈을 깜박이고, 천천히 손을 올려 들여다보았다.

창 밖에서 어스름한 달빛이 새어 들었다. 말끔한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손바닥에 익숙한 황금빛 문양이 뚜렷했다.

유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찔렸었던 가슴께를 더듬고, 멀쩡한 것을 확인한 다음, 침대에서 벗어났다. 등잔에 불을 붙였다. 빛이 확 퍼지며 방 안을 밝혔다. 몇 년을 머물렀던 아젠카의 단장용 사택 침실이었다.

‘……사택이라니?’

창천기사단에는 어지간한 귀족의 저택보다 호화로운 숙소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꾸며져 있다 해도 숙소는 결국 단체생활이라, 대부분의 기사들은 아젠카 내에 저택을 구해 거기서 출퇴근했다. 숙소에서 사는 기사는 집에 별 관심이 없는 소수뿐이었다.

유리엔은 기사 시절에 그 숙소에서 지내다가 단장이 되자마자 대대로 단장들에게 제공되는 저택으로 옮겼다. 그게 지금 그가 있는 이 사택이었다. 그는 단장이 된 이후로 죽 여기에서 살았다.

하지만 1632년 초부터는 사택을 떠나 숙소에 있는 단장용 방에서 지냈다. 기사단 내부 숙소에서 머물면, 그녀가 갇혀 있는 지하감옥에 더 자주 방문할 수 있었으므로.

사택을 쓰지 않은 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왜 여기에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어떻게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죽었었다.

유리엔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가슴께를 확인했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바르데르기오사에 꿰뚫렸던 심장은 멀쩡히 살아서 박동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성검을 불렀다.

“랑기오사.”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크게 성검을 불러보았다.

“랑, 일어나라.”

몇 차례 더 불러보아도 성검은 침묵하기만 했다.

유리엔은 검을 뽑아냈다. 자루와 칼날이 하나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순백색 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검을 쥐어보고, 마나를 증폭시켜 보았다. 정안도 발동해 보았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고 유리엔은 여전히 성검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랑기오사는 잠든 것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유리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이 1629년 3월 17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32년 가을에 죽었는데, 눈을 떠 보니 근 3년 반에 가까운 시간이 되돌아가 있었다.

지옥 같았던 아젠카는 활기찬 일상 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직 기오사 오너가 아닌 디트리히가 오늘 왜 이렇게 넋을 빼놓고 있냐며 그를 보고 혀를 찼다.

테레사는 임무를 떠났고, 바론은 스콰이어인 바라하와 함께 대련을 했다. 모두 죽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가장 먼저 찾아본 건 마검의 악마에 대해서였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부기사단장 바론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바르데르기오사는 행방불명이 된 지 오래잖습니까.”

“……나타나지 않았나?”

“주기적으로 단원들이 기오사 순례를 다니긴 해도, 바르데르기오사 관련 소식은 10년이 넘게 한 번도 없었던 걸로 압니다. 뭔가 들으신 게 있습니까?”

유리엔은 망연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결재를 위해 바론이 가져온 서류에는 1629년 3월 17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마검의 악마가 처음 등장한 날이 맞았다.

‘나타난 직후라서 아젠카까지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흘러도 마검의 악마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일부러 악마가 등장했던 제국 남부 쪽 정보를 수집해 봤지만, 대량 학살은커녕 의문사 소식도 없었다.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일상은 지극히 평온하게 이어졌다. 성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유리엔은 약간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되어갔다.

‘꿈이었나?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생생하고 긴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지독한 악몽을 말이다. 그런 의심이 들었다.

‘꿈이라면……. 꿈에 불과했다면,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꿈이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뚜렷한 기억들이었다. 되새기는 순간 전신이 차가워지고 심장이 꿰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울 정도로. 사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선명했기에 되레 꿈이길 원했다.

갑자기 성검이 침묵하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꿈인 게 나았다.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일어났었던 일인 것보다는 그저 한갓 악몽에 불과하길 바랐다.

그게 모두 사실이었다면, 곧 다가올 미래라면, 너무나 비참하지 않은가.

이미 악마가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미래는 어그러졌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꿈일 뿐이라 되뇌며 잊으려 노력했다.

잊기 가장 힘들었던 건 ‘그녀’의 존재였다.

그는 그녀에 대해 찾아보지 않았다. 시선 한 번에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그건 1628년의 탄신 연회였기에, 지금도 이미 일어난 일일 터였다.

시선 한 번도 아니고 그가 그녀에 대해 찾아 보기까지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아니면, 어쩌면, 그녀 자체도 그의 꿈속에서만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탄신 연회의 기억도 그 긴 꿈의 일부였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로 환상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 비참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오히려 강렬하게 타오르는 존재가 실존한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평화롭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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