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7화
유리엔은 그녀를 창천기사단 본부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봉인구를 채우고 사지에 사슬을 달고 이중문을 설치했다.
황제는 격노하여 악마를 당장 내놓으라 명했다. 유리엔은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정면에서 거역했다. 황제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토벌단 몰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제국은 아젠카를 건드릴 수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아젠카와 제국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서한이 쉼 없이 오가고 물밑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당장은 창천기사단이 악마로부터 제국을 구한 구원자로 여겨져서 조용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들의 불만이 커져갈 것이다. 왜 악마를 처형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유리엔은 시간이 빌 때마다 지하 감옥을 찾아갔다.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철문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그녀의 몸뚱이는 가둬진 마물처럼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정안을 뜨고 있는 그에게는 다른 것이 보였다.
부글거리는 검은 악의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빛. 조그만 불씨에서 불길이 된 그것이 조금씩 강렬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스러져버릴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불. 그 애처롭고 처절한 발악을 그는 내내 지켜보았다.
[처음 봤을 때 태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정말 그리 될 확률은 지극히 낮았는데 말이다. 솔직히 미치지 않는 게 신기하군.]
“그녀는 이겨낼 거다.”
유리엔은 작게 중얼거렸다. 한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다. 제대로 눈을 마주쳐본 적도 없다.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켜볼수록, 점점 더, 응원하게 된다. 승리하는 것이 보고 싶었다. 이겨내 주었으면 좋겠다.
저 악의를 극복하고 몸을 되찾은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알고 싶어졌다. 진짜 그녀를.
악의 너머로 어른거리는 불꽃이 또 위태롭게 흔들렸다. 피처럼 튀는 불티. 꺼질 듯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구친다. 짓누르는 악의 아래에서 몸부림친다.
그 일렁이는 모습에서 그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읽어냈다. 유리엔은 이를 악물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도울 방법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러나 그에게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시련이었다.
유리엔은 가만히 철문에 손을 대었다. 그 너머로는 손을 내밀 수가 없어서 그저 문에만 닿았다. 손끝에 닿는 쇠는 차가웠다.
“준비를 해야겠다.”
[뭘 말이냐?]
“그녀가……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는 그녀가 몸을 되찾았을 때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기 시작했다. 홀로 싸우고 있는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악마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 사망자들을 위한 예식을 치렀다. 위령비를 세우고 피해 복구에 협조했다.
이어 제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황제와는 협상이 불가능했기에, 협상은 황태자와 진행되었다. 몇 차례 서류가 오가고, 비밀 회동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그는 절대 그녀가 분홍 머리칼의 제국 귀족가문 영애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체를 파헤치는 짓도 하지 않았다.
제국의 공적이 되어버린 그녀의 가문이 밝혀져서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그녀와 관계된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녀의 정체가 알려졌을 때 엄청난 피해를 입을 테니까.
사실 이름은 몹시 알고 싶었다.
그녀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그녀가 저 악의로부터 승리하고, 몸을 되찾으면, 그때 그녀에게 직접 이름을 들으면 된다.
그렇게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 * *
1632년 가을, 유리엔은 아젠카를 떠나 제국의 수도에서 크루엔 황태자와 비밀리에 만났다. 이제 권력의 추는 확실하게 황태자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네 덕분이 크지. 남은 2황자 파와 황제 폐하께서는 내 어린 조카를 밀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 젖먹이를, 하.”
하얀 사자를 상징으로 삼는 키리에 제국의 하르덴 황족은 대부분 은발이었다. 크루엔 황태자 역시 은발에 유리엔처럼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눈동자였다.
2황자 카르엠은 황후로부터 녹색 눈을 물려받았고, 카르엠의 어린 아들 역시 그 눈을 물려받았다.
황제는 황후와 같은 그 초록빛 눈동자를 사랑했다. 저를 닮은 푸른 눈의 아들들보다 훨씬.
“장인어른께선 네가 제일 위험하다며 지금도 널 경계하고 있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황위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지?”
크루엔이 빙긋 웃었다. 유리엔은 무표정했다.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아바마마의 시대를 끝낼 때가 되었다. 협조해 다오.”
“……무슨 협조를 원하십니까?”
“창천기사단을 파견해 줘. 황궁을 치겠다.”
유리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황태자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내가 명분도 없이 일을 추진할 것 같으냐? 창천기사단이 나서기에 충분한 이유가 여기 있으니, 너는 그저 내 칼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이게 뭡니까.”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황실이 입수하고, 이용한 경위.”
유리엔의 눈이 커졌다. 그가 급히 서류를 집어 들자 크루엔의 미소가 깊어졌다. 황태자는 느긋하게 깍지를 끼고 서류를 읽는 유리엔을 지켜보았다.
그 한 장의 서류에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이용하여 황실의, 정확히는 2황자의 위명을 드높일 계획이 적나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몇 해 전, 황제의 별장 근처 마을이 몰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침 별장에 머물고 있던 황제는 근위대를 출동시켜 살인범을 잡았고, 범인이 들고 있던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발견했다.
흔한 약초꾼에 불과하던 남자가 어떻게 마검을 손에 넣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어쨌든 근위대는 간단하게 마검에 물든 약초꾼을 처리했다. 그것을 본 황제는 마검을 이용해서 2황자의 위명을 드높일 계획을 구상해 냈다.
그 계획에는 사람들이, 특히 귀족들이 경각심을 느낄 만한 마검의 희생자가 필요했다.
황제는 주도면밀하게 계산했다. 없어져도 괜찮고, 만만하면서도, 마검이 등장했다는 위기감은 줄 수 있을 만한 가문을 찾았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가문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마검이 너무 강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보군이 몇몇 추려졌다.
그 후보군 중에서 결국 어디가 낙점되었는지는 추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서류에는 그저 후보 가문들 중에 한 곳을 2황자가 골랐다고만 쓰여 있었다. 2황자가 직접 수하를 시켜 그 가문에 바르데르기오사를 가져다 놓았다고.
황제와 2황자가 미처 몰랐던 건, 하필 그들이 고른 그 가문에 알려지지 않은 검의 천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마검을 든 약초꾼은 쉬웠으나, 마검을 든 불세출의 천재는 재앙이 되었다.
유리엔은 멍하니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2황자가 골랐다고. 카르엠 형님이. 그 순간 탄신 연회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자? 네가 여자에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군.〉
그렇게 말하던 카르엠의 혼에 뚜렷하던 악의. 우연이라기엔 지나치 게 공교롭다.
설마. 설마.
카르엠이 후보 가문들 중에서 하나를 택한 게, 설마. 그녀가 마검을 쥐게 된 것이, 설마.
‘내가, 그녀를, 보았기 때문에…….’
시야가 아찔해진다. 속에서 역한 것이 치솟았다. 유리엔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때, 기오사를 수호하는 창천기사단으로서 당연히 나서야 할 일 아니냐?”
그가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크루엔은 태연히 말했다. 유리엔은 서류를 우그러질 정도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엔?”
“대……답은, 추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는 간신히 대꾸하고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방을 벗어났다. 나가는 걸음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 * *
아젠카로 돌아오는 내내 유리엔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자신 탓이라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원흉은 그의 아비와 형이다. 하지만 그자들이 그 음모를 꾸미고, 그 희생물로 그녀를 선택한 것은 온전히 자신 때문이었다.
평탄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여자가 나락으로 떨어진 계기가 고작 자신이 주었던 시선이라니. 심지어 그는 그 일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고, 금세 잊어 버렸었는데.
그가 잊고 있는 동안 그로 인해 비참해진 여자는, 3년, 3년이나, 악마가 되어 지옥 속에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지옥 속에 있었다. 그녀를 그리 만든 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미쳐버릴 것 같아서 마차나 열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탔다. 숨이 끊어질 정도로 말을 몰았다. 말이 지쳐나가떨어질 때까지 달린 다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고, 해가 뜨면 다시 말을 탔다. 성검은 잠들지 못하는 그를 향해 나직이 말을 꺼냈다.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건 네 죄가 아니다. 인간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정의로 만들어진 내가 내린 판단이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럼 그녀는?”
마검에 물들어, 원치 않는 학살을 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럼에도 아직도 놓여나지 못해서, 그 늪 같은 악의 속에서 혼자 발버둥치고 있을 그녀는, 대체 뭘 잘못했는가. 그런 그녀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은 또 무엇을 잘못했는가.
죄 없는 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참극에 말려들었고 죄 있는 자들은 멀쩡히 살아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움켜쥔 유리엔의 손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길게 침묵하던 성검이 답했다.
[……그 여자도 죄가 없지. 죗값을 치러야 할 자는 따로 있으니. 하지만 주인, 그자는 그 여자의 손에 죽었다. 이미 제 죄로 벌을 받은 게다.]
“하나는 남아 있지 않나.”
조용히 대꾸하는 유리엔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랑기오사는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래, 네 아비는 살아 있지. 허나 그자는 네 아비다. 그자가 너를 죽이려 한 게 아닌 이상, 네가 그를 건드리면 패륜이란 말이다. 정의는 심판이지 복수가 아니니까.]
“그래서, 패륜을 저질러서는 안 되니 참고 있으라? 그 따위 것이 정의라고?”
되묻는 유리엔의 음성은 내용과 달리 평온했다. 성검은 그 평온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참으란 소리가 아니다. 절차를 지키란 뜻이지. 차라리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마검의 음모를 밝히고 황제를 공식적으로 끌어내려 처형하는 거다. 그건 정의로운 일이니까.]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말에 올라탔다.
아젠카로 돌아가자마자 지하감옥에 있을 그녀를 찾아가려 했다. 찾아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지금 그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음을,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음을,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모든 결정은 그 뒤로 미뤘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지금까지보다 더 잔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