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6화
마검의 악마를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토벌단을 몰살시킨 악마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졌는지 대놓고 학살을 벌이고 다녔다.
유리엔과 기오사 오너들은 1632년 초에 마검의 악마와 마주쳤다.
눈이 조금씩 내리다 멎은 날이었다. 하늘은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흐렸다. 메마른 들에 악마는 발자국처럼 시체와 피를 남겨두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꼬리처럼 이어졌다.
“저기 있군요.”
부기사단장 바론이 앞을 가리켰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누더기 같은 것을 걸친 여자는 먼지와 피와 오물로 엉망이 된 몰골로 웃고 있었다.
여자는 오른손에 검은 마나가 일렁이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쥐고 휘청휘청 걸었다. 지저분한 맨발이 잘린 인간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유리엔이 앞장섰다. 기척을 느낀 악마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지독하군.]
성검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정안으로 그녀를 본 유리엔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지독했다. 무저갱 같은 검은빛이 기포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것에 가려져서 원래의 혼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혼을 뒤덮은 그것들은 유리엔이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악의보다도 짙고 추하고 섬뜩했다.
[바르데르기오사에 물든 인간은 몇 번 봤었지만, 유난히 악의가 짙은데. 물든 기간이 길어서 그런가? 3년째였지, 아마. 보통 인간이면 이미 망가져도 진작 망가졌을 시간인데 버티고 있어서 그런가 보군. 조심해라.]
성검이 경고했다.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고 그 불운한 여자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마검에 물든 자여.”
저 여자는 아마 무고한 피해자일 것이다. 운이 나쁘게 마검에 물들었을 뿐. 인간적인 연민이 들었으나 구해줄 방법은 없었다.
정안으로 본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이었다. 너무 짙은 악의로 인해 눈이 약간 시릴 정도였다. 유리엔은 정안을 감아버렸다.
“기오사를 수호하는 창천기사단으로서, 그대를 토벌하겠다.”
그는 랑기오사를 겨누었다. 여자가 바르데르기오사를 들어 올린다.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검과 마검이 맞부딪혔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검을 맞댈수록 유리엔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재였다. 어린 시절부터 또래 중엔 적수가 없었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스승을 해줄 만한 사람조차 사라져갔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그는 급속도로 강해지며 모든 사람을 뛰어넘었다. 당연한 듯이 마스터가 되었다. 단 한 번도 벽을 느껴본 적이 없다. 이길 수 없다는 기분을 느껴 본 적도 없다.
아직 검을 배우던 시절에 패배할 때조차, 언젠가는 이 상대를 넘어설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늘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유리엔은 처음으로 벽을 만났다. 최초로 느껴보는 패배의 예감. 승리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받아치며, 미세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버티기도 힘들어진다.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안 돼, 다른 오너들과 협력해라. 너무 강하다.]
마침내 랑기오사가 끼어들었다. 홀린 듯이 검을 휘두르던 유리엔은 그 경고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여자는 사람 같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실로 안타깝다.”
들썩이는 어깨 아래에서 심장이 뛰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난생처음 만난 자신을 압도하는 상대가 토벌해야 할 악마라니.
왜 하필, 이토록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가 마검의 악마가 된 걸까. 다르게 만났다면, 몇 번이고 대련을 하며, 더 높은 경지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절로 입이 움직였다.
“그대가 기사였다면…… 진심으로 검을 나누었을 텐데.”
“유리엔 단장.”
디트리히가 경고하듯 그를 불렀다. 네가 검 말고는 집착하는 게 없다는 건 자알 아는데, 여기서까지 그러면 안 되지, 또라이야. 그 부름 속에서 압축된 디트리히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유리엔은 쓰게 웃었다.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다.
“안다. 이것은 대련이 아니라 토벌이지.”
“슬슬 합류할까요?”
“그래.”
바론의 물음에 그가 긍정했다. 바론의 광검 살릭기오사, 테레사의 수호검 디몽기오사, 디트리히의 정복검 레밍기오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챈 여자가 털을 세우는 짐승처럼 바르데르 기오사를 들어 올렸다.
그 뒤로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여자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죽일 목적으로 싸우는 네 명의 기오사 오너를 상대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 버렸다.
그러나 영원히 버틸 수는 없었다. 악마는 마침내 패배했다.
유리엔은 그녀를 쓰러뜨리고 올라타 목을 검으로 짓눌렀다. 정확히는 바로 목을 베어버리려 했으나 그녀의 새까만 마나가 일렁거리며 목을 감싸고 버텨서 그러지 못했다.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희생자의 피로만 젖어 있던 악마는 이제 저 자신의 피로 칠갑을 한 채 짐승처럼 버둥거렸다.
진이 빠진 기오사 오너들이 주위에서 무어라 투덜거렸다. 부단장 바론이 중얼거리는 말이 유리엔의 귀에 들어왔다.
“아깝군. 단장님 말대로 기사였다면 훌륭했을 텐데, 저 재능으로 마검 따위에 손을 대다니.”
그 말에 유리엔은 약간 화가 났다. 마검이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일부러 쥘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말마따나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마검을 휘두르고 있는 건 이 여자가 아니라 정안으로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정도로 짙고 추한 인간의 악의인 것을.
“그녀라고…… 원해서 이걸 쥐었겠나.”
그녀의 사지를 억누르고 가느다란 목을 향해 검을 짓누른 채, 유리엔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동공이 구별 가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 같지 않은 눈. 살의로 번들거리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
그 재능이 아까워서였는지, 그저 불운한 여자에 대한 동정이었는지. 유리엔은 충동적으로 그 눈 안에서 인간적인 무엇을 찾아내려 했다.
싸우는 내내 닫고 있었던 정안을 개방했다. 본래의 혼이 어떤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뒤덮인 악의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나직이 말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
그 순간. 그의 말이 그녀에게 가 닿은 순간.
기포가 올라오는 늪처럼 흐물거리는 새카만 악의들 너머로 불타오르는 무언가가 언뜻 보였다. 그 빛은 울부짖듯 꿈틀거리며, 제게 들러붙는 검은 것들을 헤치고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것이 악의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팔을 뻗었다.
유리엔은 숨을 잊었다.
얼어붙어 버렸다.
엷게 타오르는 보랏빛 실루엣. 실제의 사람만큼 뚜렷하지는 않아도, 그는 그 혼을 알아보았다. 잊고 있던 기억이 그녀를 보는 순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연회 때 스치듯 보았던 여자. 불씨를 품고 있던 혼. 손톱만 하던 그 씨앗이, 여기에서,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악의를 헤치고 튀어나온 그녀의 혼이 그를 응시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본질이 악의를 누르고 제 자리를 찾아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그 혼은 울고 있었다. 혼을 따라 그녀의 몸뚱이도 울었다. 그저 살의만 그득하던 눈동자에 습기가 퍼져 나가고, 딱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맙소사, 저 속에서 버티고 있다고? 심지어 몸을 잠깐 되찾기까지 해?]
성검이 신음을 섞어 감탄하는 것을 굳이 듣지 않아도, 보자마자 알았다. 그저 한 방울이지만 그 눈물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시커멓게 죽은 고목에 돋아난 새 잎사귀 같은 것.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눈물.”
“단장?”
“울고 있다.”
“……누가요? 설마.”
유리엔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말을 하는 사이 그녀의 혼은 다시 악의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씨앗은 개화했으나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정안은 그녀가 미친 듯이 발악하다가 결국 그 늪 같은 악의에 삼켜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빛이 부글거리는 어둠 안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렇게 발버둥치고 있는데.
저 속에서도 살아 울부짖고 있는데.
그 작던 빛이 저렇게 타오를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도와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저, 보기만 해야 했다.
가늘게 떨리던 하얀 손끝마저 완전히 잠겨들어 부글거리는 악의만이 남았다.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파고 드는 기분이 들었다. 먹먹함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마검한테 잡아먹히면 자아 따윈 남지 않는다며. 단장, 저건 그냥 마검이 휘두르는 몸뚱이야.”
디트리히가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아니,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 있다. 그는 보았다. 보고 말았다. 유리엔은 고개를 젓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대꾸했다.
“남아 있군. 싸우고 있는 거다.”
“싸워? 뭐랑?”
“마검과, 그녀의 의지가.”
입 밖으로 말을 내어놓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작던 불씨가, 저 끔찍한 악의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싸우고 있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성검이 망설이며 말했다.
[……예전에, 마검을 이겨낸 인간이 있었다. 저것을 극복하고 바르데르기오사를 각성시켜서 몸을 되찾은 인간이. 이 여자 역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악의만이 남은 여자의 몸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유리엔은 날뛰는 그 몸뚱어리를 누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기적이 남긴 흔적.
손아귀에 잡혀 있는 그녀의 양손목은 가늘었다. 검게 물든 피투성이 여자 위에, 유리엔은 처음 보았던 그녀를 겹쳐 보았다.
연회장 안에서 또래의 영애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녀를. 그저 평탄하게 살아가리라 여기고 잊었던 여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이토록 강렬하게. 그 흐리던 빛을 싹틔워서.
“거 찝찝하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의식이 남아 있다 쳐도 상관없잖습니까.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디트리히와 테레사가 그를 재촉했으나 유리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동정은 가지만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그녀의 혼을 본 이상, 그는, 도저히 그녀를 죽일 수가 없었다.
성검을 쥔 오른손이 잘게 떨렸다.
[마검의 악마는 악이지만, 이 여자에게는 죄가 없다. 심판하든, 이겨낼 기회를 줘보든, 어느 쪽이건 정의다. 그러니 판단은 네게 맡기마.]
성검이 조용히 속삭였다. 판단, 판단이라. 그의 판단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능성이 있는데, 저렇게 발버둥치고 있는데, 제 손으로 끊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를 보았는데도 짓밟아 꺼버리라니.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순 없다.”
그는 그녀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