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5화
그날은 황제 탄신일이었다.
연회는 지루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습관적으로 정안을 뜨고 연회장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었다. 상황에 따라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사람들. 흐릿한 회색 그림자 같은 것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정안을 통해 보는 세상은 무채색에 가까웠다. 본질이 안정되어 있거나 영혼의 심지가 굳을수록 그 흐릿한 형상은 뚜렷해지고 색채를 띠게 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유리엔.”
은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안에 비치는 그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이었다. 다가올수록 검은색이 짙어진다. 그가 유리엔의 앞에 서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연회가 지루한가 보지?”
“아닙니다, 카르엠 형님.”
그는 2황자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였다. 유리엔의 친형제. 그러나 그 사이는 배다른 형제보다도 못했다.
유리엔은 그의 영혼에서 맴도는 악의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아마도 확실히, 그 악의는 자신을 향한 것일 터다.
카르엠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고고한 척하지 말고 빨리 꺼져라. 꼴 보기 싫으니까.”
“……죄송합니다.”
유리엔은 덤덤하게 답했다. 그도 이 자리에 있기 싫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 있지 않으면, 그의 아비인 황제가 제 탄신을 축하할 생각이 없는 거냐고 트집을 잡아댈 것이다.
애초에 그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그것을 가장 먼저 황제에게 고해바칠 자가 눈앞의 형이었다.
상대하는 것 자체가 피로했다. 유리엔은 무어라 시비를 거는 카르엠으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렸다.
코앞에서 일렁이는 악의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저 아무렇게나 움직인 시선에 언뜻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무채색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희미한 불씨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정안은 조절하는 게 가능했다. 의식할수록 선명해진다. 그는 그 혼을 저도 모르게 눈으로 쫓았다. 집중해서 응시하자 점점 확실하게 보였다.
연한 회색의 그림자였다.
여성의 실루엣. 백색에 가까운 엷은 보랏빛이 그 안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손톱만 한 불씨였다. 꺼질 듯 말 듯 일렁이고 있지만, 어쩌면 거대한 불길이 될 수도 있을 법한 씨앗.
[재미있는 혼이군. 타오르면 태양이 되겠어. 물론, 타오를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성검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작은 별처럼 깜박이는 그 빛을 관찰했다. 굳은 의지를 가진 혼은 드물게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 보았다. 저런 흐린 빛이 태양처럼 타오르게 될 수도 있다니. 신기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누구지?’
그는 정안을 거두어 보았다. 그 씨앗을 품은 사람은 연한 분홍빛 머리칼을 치장하여 늘어뜨린 여자였다. 그녀는 하늘색의 드레스를 입고 또래의 귀족영애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여자는 수없이 봐온 영애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예쁘장한 외모에 독특한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그뿐이었다.
유리엔은 다시 정안을 뜨고 그 흐린 빛을 관찰했다. 가능성과 관계없이 현재의 그 빛은 약하고 가느다랬다.
불씨를 품은 것은 평범한 귀족가의 딸이다. 아마도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별일이 없다면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이어갈. 그런 삶이라면 저 불씨는 그저 불씨로 끝나겠지. 짧은 관심이 그렇게 사그라들 찰나.
“너, 내 말을 안 듣고 있군. 대체 누굴 보는 거냐?”
짜증 섞인 말이 귀에 들어와서 유리엔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누구의 앞에 있는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카르엠이 그가 보고 있었던 방향을 확인했다. 분홍색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여자? 네가 여자에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군.”
그렇게 말하는 카르엠의 혼에 악의가 뚜렷했다. 유리엔은 급히 그녀로부터 눈을 떼었다. 그는 덤덤한 표정을 가장했다.
“관심이 아닙니다. 머리 색이 특이해서 잠시 보았을 뿐.”
“아, 그래……?”
카르엠이 말끝을 끌며 기묘하게 웃었다. 관심이 없다고 강조할수록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들릴 것이다. 유리엔은 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연회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그 분홍 머리 여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유리엔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비가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는 어린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분노를 드러내곤 했다. 대놓고 말한 적도 있었다.
〈저 역겨운 것을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라.〉
유리엔에게 황제의 증오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준 건 유모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어서, 그래서 황제가 그를 꼴도 보기 싫어한다고 들었다.
〈그럼, 아바마마는 나를 싫어하시는 거야? 앞으로도 계속?〉
어린 3황자의 질문에, 유모는 차마 냉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면, 폐하께서도 황자 전하를 돌아봐주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유리엔은 노력했다. 황족에게 주어지는 모든 의무와 교육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고, 나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한 증오를 불러왔다.
〈유리엔 전하께서는 정말 탁월하십니다.〉
〈2황자 전하도 검에 소질이 있으시다던데.〉
〈3황자 전하에 비하면 솔직히…….〉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비교, 유리엔이 스승들에게 칭찬을 받고 눈에 띌수록, 2황자는 가려졌다.
하필 2황자가 재능을 보이는 분야는 검이었다. 유리엔의 많은 재능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분야. 게다가 유리엔은 검을 좋아했다.
소년은 유흥을 즐기거나 오락거리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수도사처럼 정해진 생활을 소화하며 취미 대신 검에 몰두했다. 2황자는 두 살 어린 동생의 벽을 절대로 넘을 수 없었다.
황제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든 유리엔의 흠을 찾아내려 애썼다. 극히 사소한 실수나 오점이라도 한없이 부풀려져 질책을 받았다. 유리엔은 책잡히지 않기 위해 더욱 강박적으로 정도를 지켰다.
때로 황제는 2황자에게도 화를 내었다.
〈이토록 너를 지원해 주는데, 너는 왜 그놈을 이기질 못하는 게냐!〉
2황자 카르엠은 유리엔을 증오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빼앗아간 동생이 존재만으로도 자신을 괴롭혔다. 카르엠은 늘 열등감과 증오가 범벅이 된 눈으로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배다른 형제인 1황자 크루엔은 그 관계에서 비껴나 있었다. 굳건한 외가의 비호 아래 태어나자마자 황태자가 된 그는 모든 것을 방관했다. 일찍이 학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덕에 유리엔에게 그다지 열등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정확히는 무관심했다.
유리엔은 그 무관심이 차라리 고마웠다.
카르엠은 유리엔에게 관심이 많았다. 유리엔이 저지른 실수, 유리엔이 좋아하는 것, 유리엔이 관심을 둔 것. 그 모든 것이 카르엠을 통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실수는 처벌로 돌아왔고 좋아하는 것은 빼앗겼으며 관심을 둔 것은 망가졌다.
정을 주고 기르던 새가, 분명히 잘 닫아놓았던 새장에서 빠져나가 황제의 정원을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카르엠의 화살을 맞고 죽었던 적이 있다. 유리엔은 그 후부터 특별히 무언가를 아끼는 티를 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같은 맥락이었다. 연회가 끝난 이후, 유리엔은 그 여자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그녀의 이름을 찾아보지도 않았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젠카로 돌아와 그녀를 잊었다. 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강렬한 인상도 아니었다. 그리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여자가 불씨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게 약간 신기했을 뿐.
유리엔은 곧 그 여자에 대한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시선을 준 것. 그리고 그 시선을 형제에게 들킨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 * *
마검의 악마가 처음 등장한 건 1629년 3월이었다.
악마는 등장하자마자 성 세 곳을 몰살시키고 근처에 머물던 현자의 제자인 니콜 시즈튼과 충돌했다. 니콜 시즈튼은 사망했으나 악마에게 상당한 부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부상 이후 한동안 실종되었던 악마는 간헐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날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창천기사단은 지속적으로 악마를 토벌하겠다는 의사를 보냈으나, 제국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국은 직접 악마를 추적했지만 번번이 놓치거나 추적대가 죽어나갔다.
그러기를 2년 여, 결국 1631년 겨울에 대규모의 토벌단이 꾸려졌다. 마탑과 근위기사단 거의 전체가 동원된 토벌단이었다. 2황자 카르엠이 그 토벌단을 지휘했다.
“몰살당했단다, 그 여자 하나한테.”
디트리히 사루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레밍기오사의 오너이자 사관학교 시절부터 유리엔의 벗이었던 그는 단장실을 제 방처럼 드나들었다.
유리엔은 서류를 살피다가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디트리히는 손에 들고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흔들면서 물었다.
“율, 토벌단을 지휘한 형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 궁금해?”
“보고서를 가로채서 보지 마라, 디트.”
“하여간 꼬장꼬장하기는.”
디트리히가 양피지를 그를 향해 던졌다. 유리엔이 그것을 잡아채어 펼치는 사이 그가 말했다.
“토벌단은 안타깝지만, 네 형인지 뭔지 모를 그 새끼는 잘 죽었다 싶다.”
“……카르엠 형님까지 전사했나?”
“악마가 공평하게 썰어줬지.”
유리엔은 보고서를 훑었다.
- 생존자 없음. 토벌단의 소식이 끊겨 뒤늦게 파견한 정찰대가 2황자를 포함한 토벌단의 전원 사망을 확인함.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이었나.
유리엔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를 평생 괴롭혀온 형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리 애석하진 않았다. 황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할 뿐.
“다 죽어 버렸으니 망할 놈의 제국이 드디어 파견을 요청하겠군. 바르데르기오사가 저지른 학살 중에서도 역대급 아니야, 이거? 미친 새끼들. 진작 우릴 부를 것이지.”
디트리히가 혀를 찼다. 유리엔은 착잡하게 보고서를 덮었다. 악마가 처음 등장한 1629년 봄부터 지금, 1631년 겨울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듯해서.
황제는 창천기사단장이 유리엔이기 때문에 창천의 개입을 거부했다. 표면적으로는 제국을 무시하느냐, 창천의 간섭이 지나치다는 등의 이유들을 댔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그것일 터였다.
[그렇다고 그 죽음들이 네 책임은 아니다. 실제로 학살을 저지른 건 마검에 휘둘린 악마고, 그 학살을 방조한 건 황제니까. 황제가 그런 선택을 한 게 네 탓이라 해서 네게 죄를 묻는 건 정의에 어긋난다.]
랑기오사가 깐깐하게 말했다. 성검 나름의 위로였다. 유리엔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쓴웃음을 띠었다.
조만간 제국에서 정식으로 파견 요청이 올 듯했다. 그러니 이제 마검의 악마를 토벌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악마에 대해서는 젊은 여성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들려온 소식들만 봐도 지금까지 등장했던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들과 차원이 다르게 강할 게 틀림없었다. 대비가 필요했다.
‘역시, 기오사 오너 전원이 가야겠군.’
유리엔은 악마의 기록들을 살피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으나, 토벌을 목적으로 다시 살피니 새삼 소름이 돋았다. 무지막지했다. 유리엔 자신이 마검에 물든다 해도 이 정도 피해는 나지 않을 터였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도 다시없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괜히 역대 최연소 마스터에 최연소 창천기사단장이 된 게 아니다.
틀림없이 마검의 악마는 그런 그보다도 뛰어날 터였다. 이 정도 재능을 가진 자가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유리엔은 악마에 대한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젊은 여성. 검은 머리, 검은 눈, 피부에 검은 얼룩이 번져 있음. 그게 다였다. 악마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는데,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디트리히가 서류를 뒤적이는 그를 향해 물었다.
“토벌대는 어떻게 꾸릴 거냐?”
“너와 나를 포함해 기오사 오너 네 명 전원이 간다. 다른 단원은 위험하기만 할 듯하니.”
“좋아, 테레사한테는 내가 말한다?”
디트리히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단장실을 나갔다. 유리엔은 산더미처럼 쌓인 악마 관련 기록들을 흘깃 보았다.
문득 악마가 되기 전의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의미 없는 호기심이었다. 마검에게 잡아먹힌 시점에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므로.
누군지 몰라도 무척이나 불운한 여자로군. 그 가벼운 연민을 끝으로, 그는 그 여자에 대한 관심을 접고 악마를 토벌할 방법에 대해서만 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