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64화 (64/211)

검을 든 꽃 64화

유리엔은 그녀가 하얗게 질려 물러나기 직전에 보였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가 고백한 직후, 발갛게 달아올라 눈을 반짝이던 모습을. 어쩔 수 없는 설렘이 종이에 번지는 잉크처럼 번져나가던 찰나를.

“……가능성이 있는 건가.”

그의 혼잣말에 대꾸하는 것이 있었다. 성별도 나이도 짐작가지 않는 음성이 영혼을 울리며 들려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성검 랑기오사였다.

[있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니고? 누누이 말했듯이 너는 그녀가 얽히면 생각이 이상하게 돌아가. 함부로 확신하지 마라.]

“네가 보기엔 어떻지? 내 착각일 뿐인가?”

유리엔은 검은 거인의 잔해를 건너뛰어 그 중앙에 쓰러져 있는 주민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성검은 잠시 침묵하더니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지금까지 인간들의 연애에 끼어 들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데.]

“연애……라. 연애인가?”

[마검의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너는 확실히 그쪽이지. 그러니 나한테 묻지 마라.]

“……이미 끼어들었잖나.”

유리엔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연애라는 두 글자에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고 한숨을 쉰 다음 쓰러져 있는 주동자 남자를 확인해 보았다. 기절했을 뿐 멀쩡히 숨 쉬고 있었다.

유리엔은 남자를 들어 다른 주민들이 있는 곳에 데려다 놓았다. 그 사이 성검이 항변했다.

[그건 끼어드는 게 아니라 주인에게 기오사로서 충고를 한 거지. 네가 범죄를 저질러서 나를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사양하고 싶다. 그리고 연애 소리에 들뜬 거 같아서 충고하는데, 싫다는 사람한테 접근하는 건 정의롭지 못한 짓이다.]

유리엔은 제 팔을 감싼 패티코트 자락을 내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접근하는 데에는 정도란 게 있는 법이지.]

“내가 그 정도 자제도 못 할 것 같은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성검이 코웃음소리를 냈다.

[그럼 솔직히 말해 봐라. 저 여자가 네게 마음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너는 어쩔 작정이었느냐?]

“그녀가…….”

그는 불길을 넘어 완전히 무너진 쉼터 쪽으로 다가가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그를 원한다고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미치겠다. 그는 걸음이 흐트러져 불에 델 뻔했다. 그 꼴을 본 성검이 혀를 찼다. 유리엔은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식히며 대답했다.

“그녀가 나를 원해준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를 얻을 것이다.”

[무슨 수?]

성검이 몹시 꺼림칙하다는 듯 되물었다.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검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분명히 마검의 주인은 원하는 것이 있어도 평온을 희생하지는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녀의 평온을 망가뜨릴 생각은 없다. 모든 건 내가…….”

반사적으로 답하던 유리엔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말하다가 떠오른 것이 있었다.

지금 그의 상황에서 그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삶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 형제와 아비의 올가미 속에서 주도권을 쥘 방법.

예전의 그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유리엔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면 되는 것을.”

그는 그대로 선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랑기오사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날 버릴 거면 말로 해라. 악행을 저지르진 말고.]

“악행이라니. 너는 주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군.”

[그녀 문제만 아니면 넌 여전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주인이었겠지. 내가 겪어온 주인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그런데 요즘은 신뢰가 안 가.]

유리엔은 반박하는 대신 희미하게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너진 쉼터의 잔해를 밀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작점은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허공에 길게 그어진 흠 같은 것.

그는 그것에 시선을 둔 채 기울어진 기둥에 기대섰다. 성검이 그에게 재차 말을 걸었다.

[가끔 네게 그 기억들을 보여준 게 후회가 된다. 보여주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속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결과는 같았을 거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포기가…… 되질 않으니까. 알면서도 미련이 남아서. 계속 떠오르고 잊지도 못하니, 늦든 빠르든 결국 이리 되었겠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랑기오사가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제발 비뚤어지지만 말아라.]

“노력하지.”

[그게 노력까지 해야 되는 일이냐? 내겐 주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더니.]

“……조금 전엔 내가 자제를 못 할 것 같으냐고 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다.”

그의 감각에 에키네시아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리엔은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여자아이를 안아 올린 그녀가 불길을 피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 노인 하나가 겁에 질려 뒤따랐다.

에키네시아를 보는 유리엔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서……내가 어떻게 될지, 나 역시 모르겠으니.”

신력 1629년 6월 1일, 엘기오사 오너, 즉 성녀의 등장이 공표되었다.

성녀는 솔 족 출신의 12세 소녀로, 같은 솔 족이자 점술가인 어머니와 함께 제국 동부의 고트 마을에 머물렀었다.

그 무렵 마을에 역병이 돌아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성녀의 어머니 역시 병에 걸렸으나, 마을 사람들은 역병을 몰고 온 원인으로 그들을 지목하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성녀는 어머니의 부적이었던 단검을 물려받게 된다. 그 단검이 행방불명이었던 엘기오사였다.

성녀는 엘기오사의 오너가 되자마자 역병을 앓던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치료 과정의 특이한 모습과, 이전에는 침묵하다 뒤늦게 치료한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성녀를 역병을 뿌려 그들을 홀리려 드는 마녀로 여기고 화형에 처하려 했다.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그의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성녀를 화형 직전에 구출했다.

이후 성녀는 아젠카의 대신전에 머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오사와 시작점 개념을 이용한 결절 파훼법이 창천기사단을 통해 마탑 측에 전해졌으며, 마탑은 결절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정보의 대가를 창천에 지불했다고 한다.

서막 II

성검 랑기오사에는 대대로 오너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첫째, 랑기오사는 언제나 각성 상태이다.

둘째, 랑기오사의 오너는 정안(正眼)이라 불리는 능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 눈을 통해 상대방의 본질, 영혼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랑기오사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만이 오너가 될 수 있으며, 랑기오사의 오너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즉시 자격을 잃었다.

대부분의 기오사들은 오너의 조건과 각성 조건이 별개였지만, 랑기오사의 경우 그 둘이 일치했다. 그로 인해 랑기오사는 신검을 제외한 기오사들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깨어 있었던 검이 되었다.

[주인이 하려는 행동이 정의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를 알려주어야 하니까. 내 주인들이 타인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서고.]

유리엔이 처음 랑기오사를 쥐었을 때, 그것은 자신이 늘 깨어 있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뭐, 악행 한 번만 저질러도 오너 자격을 잃게 되는데, 모르고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억울하지 않겠나. 최소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경고는 해줘야지. 그러니 내가 조언하고, 조언 외에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안을 제공하는 거다. 여러모로 공정한 능력이지.]

성검은 익숙한 태도로 제 힘과 능력을 새로운 주인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내 자아가 깨어 있는 것, 그리고 정안. 지금까지 내 주인들은 모두 이 두 가지를 비밀로 지켰다. 반려나 제 스콰이어 정도에게만 알려주었지. 너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군.]

왜 그것이 비밀이 되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랑기오사의 오너가 되면서 얻게 된 정안은 모든 타인의 본질을 보여 주었다. 이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 좋지 않은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아니면 악한 일을 하면서도 사실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지. 그것은 영혼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성검의 주인이 상대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를 몹시 경계하게 될 것이다. 특히 위선적인 자들은 성검의 주인 앞에 제 모습을 아예 드러내지 않으려 들 터였다.

성검은 엘기오사처럼 자비롭기만 한 검이 아니었다. 랑기오사는 인간의 사명감과 정의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정의란 악에 대한 처벌과 심판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심판을 위해서는 늘 악을 대면해야 한다. 악이 숨거나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랑기오사의 오너들은 정안에 대한 비밀을 지켜왔다.

새로이 성검의 주인이 된 유리엔 역시 그 비밀을 지키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