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3화
유리엔의 시선이 뺨을 타고 흐르는 그 한 방울을 따라 움직였다. 에키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미 알고 계셨으면, 아까는 왜 그렇게 놀라셨어요?”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확 무너졌다. 대답하려다 말고 그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자신이 그녀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자각한 것 같은 태도였다.
그녀로부터 떨어진 유리엔이 두어 걸음 거리를 두었다.
에키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그대로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서두를 열어놓고 뒷말이 나오질 않는다. 그가 어물거리는 동안 그녀는 차츰 진정했다.
마검의 악마인 걸 알아본 게 아니라,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재능에 관심을 뒀던 거였다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현재 상황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마스터가 된 경위에 대해 어떻게든 변명해야겠지만 마검을 들킨 것보단 나았다.
이미 마스터인 걸 짐작하고 있었다니 변명하기도 쉬울 듯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그녀의 과거사를 다 파헤칠 테니 의심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유리엔 하나라면 옛날부터 검을 잡았고 그러다 마스터가 됐다는 식으로 과거를 적당히 꾸며 낼 수 있었다.
설마 그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조사하고 다니진 않을 거고, 숨겨 주겠다고 해놓고 퍼뜨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예전부터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니까 알려지지 않은 마스터라는 사실을 마검의 악마와 연결 짓지도 않을 것 같고.
생각할수록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남은 눈물자국을 지웠다.
유리엔은 그제야 대답했다. 무척 작은 목소리였다.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들어서.”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이름을 불린 것 때문에 그렇게 놀랐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마음이 급해서 평소 생각하던 대로 그의 이름을 대놓고 외쳤었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귀가 불그레한 것을 보았다.
저게 뭐야. 왜 빨개지는 건데. 스콰이어가 로드의 이름을 멋대로 불렀는데 무례를 야단치기는커녕 기쁜 것 같잖아. 에키는 멍청히 그것을 보다가 퍼뜩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아까 제가 마스터인 걸 숨기고 싶어 하면 숨겨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로드께선 왜 제가 그것을 숨기려 하는지 아세요?”
“……그대가 알려준다면.”
알려준다면 알게 된다는 건, 지금은 모른다는 뜻이잖아. 그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에키는 그에게 조금 다가섰다. 그는 움찔 놀랐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녀는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왜 숨기려 하는지도 모르면서, 제가 원한다면 숨겨 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
“게다가, 알려주기 전엔 그 이유도 묻지 않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
“……왜 저를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세요?”
“…….”
그녀가 캐묻고 그가 침묵하는 동안 그의 귀에 있던 붉음이 점점 퍼져나가 눈가를 달구고 뺨을 상기시켰다.
유리엔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니 연상되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오간 말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그 가설을 뒷받침했다.
망토, 생강차, 불편해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 무방비했던 미소, 결절에서 나왔을 때 그의 반응, 임명식에서 뜬금없이 던졌던 질문, 이 임무를 떠나기 전에 나눈 대화, 아메시스트, 그녀가 말을 거는 것에 들떴다던 그의 말.
내내 보았던 그의 모습들. 조심스럽고, 붉어지고, 그녀 앞에서 긴장하고, 그녀의 사소한 말에 웃고, 그녀를 주의 깊게 살피는.
그저 그녀에게 있는 재능에만 관심을 둬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들이었다.
물론 대체 왜, 대체 언제부터, 라는 의문은 짙게 남아 있었지만.
“로드……. 혹시.”
안 돼, 미쳤니, 지금 뭘 물으려는 거야. 무슨 망상이야, 이게. 중구난방으로 떠오르는 상념들에 말을 한 번 멈춰봤지만, 그녀는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물음을 붙잡지 못했다.
“절 좋아하세요?”
에키가 던진 말은 수면에 던져진 돌이었다. 파문이 일었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녀는 자신이 꺼낸 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자신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기억이 있는 유리엔’과 ‘마검의 악마’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에키네시아 로아즈’ 사이에서는 확률이 낮을지언정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까마득한 창천기사단장과 평범한 백작 영애 사이에는 접점 따윈 없었으나, 그녀가 아젠카로 온 이후 접점이 생겼고, 이어 로드와 스콰이어라는 긴밀한 관계가 되었으니까. 여전히 이해는 잘 되지 않아도.
유리엔은 곧바로 대답하진 못했다. 얼굴이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벌게졌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에서 푸른 눈동자가 이리저리 헤매다가 간신히 에키 쪽을 향했다.
“그…….”
겨우 한 글자를 뱉어놓고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눈이 내리깔렸다가 그녀를 보았다가 허공을 더듬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대답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끝내는 눈에 약간 습기가 어리기까지 했다.
에키는 그 일련의 반응을 헛것을 보는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괴롭히는 느낌이 들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보고 있자니 점점 볼이 화끈화끈한 느낌이 드는 게, 그녀의 얼굴도 그를 따라 붉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에키는 우왕좌왕하며 입을 열었다.
“로, 로드, 제가 무례한 질문을…….”
“좋아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툭 끊으며 그가 말했다. 에키는 황망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엔은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살짝 젖은 눈동자로, 목소리를 떨면서, 그럼에도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저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대를 사모하고 있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시야마저 하얗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전신에 열기가 돌았다. 간질간질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몸 안을 돌아다니며 입안을 달게 물들였다.
좋아한다고, 나를. 그가. 말도 안 돼.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공포가 차올랐다. 검고 붉고 끈적끈적한 것들.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들이.
‘그는 모르고 있잖아. 내가 그를 파멸시켰던 악마라는 걸.’
그가 좋아한다고 한 건, 로아즈 백작가에서 태어난 탁월한 재능의 에키네시아 로아즈겠지. 드레스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괴짜 사관생도. 마스터라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 그의 스콰이어.
그가 회귀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녀는 그의 마음을 기뻐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를 죽이고 그의 이름을 망가뜨렸던 기억을 가지고서 그저 좋아하기만 할 정도로 그녀는 뻔뻔하지 않았다. 그 진실을 영원히 모른 척하고 사랑만을 볼 정도로 무도하진 못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녀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끝내 그녀마저 죽였던 자가, 전부 되살렸으니까 이제 없던 일이 된 게 아니냐며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분노하다 못해 죽이고 싶어지겠지.’
그것이 그녀와 유리엔 사이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리엔이 그 사실을 몰라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울 판에, 그는 기억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가 뒤늦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자신이 사모한다 고백했던 여자가 자신을 죽였던 악마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 가정을 하자 잠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기만이야, 이건.’
그 사실을 숨긴 채 그를 받아들이는 건 기만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고백하라고? 마검의 주인이라는 게 알려지는 후폭풍을 무시하고 오직 유리엔만 고려해도,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대련을 시도할 때 느꼈다. 그녀는 그를 향해 검을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그녀를 증오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복수하겠다고 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될까. 그에게 죽어주고 싶어질까. 그 순간에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만약 이성을 잃어버리면, 바르데르기오사에 누적되고 있는 살의는? 또 다시 살의에 물들어 미쳐 날뛰게 될지도 모른다.
카이로스기오사는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안 돼……. 받아들일 수 없어. 그에게도 기만이고, 나도…… 견디지 못해.’
얼어붙은 쇠에 맨살이 달라붙는 것처럼, 서늘하고 고통스러운 자각. 달아올랐던 몸이 식었다. 첫사랑에 취해 있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파랗게 질렸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대로.
유리엔은 에키네시아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창백해진 그녀가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것까지 똑똑히 보았다.
그는 열기를 내리눌렀다. 물러나는 그녀를 붙잡는 대신, 그대로 돌아섰다. 몇 차례 호흡을 고르고, 숨을 들이켜고, 떨리는 입술을 다잡은 후에, 그는 담담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에키네시아. 그저 내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뿐이니.”
유리엔은 그 말을 남긴 채 랑기오사를 쥐고 검은 거인의 잔해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를 잡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닿았다간 망가질 미래가 두려워서 손을 뻗지를 못했다.
일렁이는 불길이 그와 그녀 사이에 번져갔다.
에키는 망연히 선 채 그의 뒷모습을 보기만 했다. 늘어뜨린 그의 팔뚝을 따라 붉은 피가 번져 뚝뚝 흘렀다. 아까 입었던 부상. 정신이 없어서 그도 그녀도 그것을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처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얼어붙어 있던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에키는 불을 건너뛰고 그에게로 다가가 팔을 잡았다. 유리엔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팔, 다치셨잖아요. 지혈도 안 하시고.”
에키는 그의 팔을 들게 해놓고 아메시스트를 뽑았다. 망설임 없이 드레스 속의 패티코트를 잘라냈다. 그러곤 길게 찢어낸 천으로 그의 상처를 압박하여 꽉 묶었다.
그녀가 임시 붕대를 만들어 그의 팔을 감싸는 내내 위에서 유리엔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샤이……. 그러니까, 엘기오사의 오너와 마을 사람을 다른 곳에 두고 왔어요. 데리고 오겠습니다.”
매듭을 지으며 에키가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대로 꾸벅 숙인 다음 자리를 떠나 샤이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반 정도는 도망치는 심정이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잠시간 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녀가 매어놓은 매듭을 더듬었다.
에키는 패티코트 자락을 가지고도 꽤나 능숙하게 상처를 압박해 놓았다. 그러나 능숙한 손놀림과 다르게 그것을 묶는 동안 그녀의 손은 계속 떨었다. 목소리도 떨렸다.
늘어진 분홍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내리깐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