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2화
“유리엔!”
그의 흰 제복에 붉은 빛이 번지는 것을 보자, 그녀의 이성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 하얀 남자가 붉게 물들던 모습.
심장이 멎는 듯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생각이나 판단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그대로 튀어나갔다.
[어, 야, 잠깐만, 진정하는 게…….]
마검이 무어라 말했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가느다란 몸은 불길 위를 새처럼 날았다. 여기저기 그슬린 드레스 자락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녀의 도약은 검은 거인의 휘둘러지는 팔에 닿았다. 그 팔뚝을 밟고, 다시 뛰어오른다. 거인의 머리가 내려다보일 높이. 보라색 눈에 새파란 분노가 깃들었다.
‘마물 따위가, 감히…….’
아메시스트의 칼날을 따라 그 분노가 옮겨 붙듯 마나가 이글거리며 흘렀다. 보랏빛 불꽃이 타오른다. 그것은 칼날을 따라 확장되며 허공을 가르는 선이 되었다.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이기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디가 핵인지 알았다. 창처럼 길게 뻗은 마나가 검은 거인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거인은 소리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허물어져 내렸다.
에키는 무너지는 거인을 지켜보지 않았다. 구두 끝이 불꽃들을 피해 바닥을 디디기도 전에 그녀는 유리엔이 있는 쪽부터 확인했다.
불안감이 극도로 치솟아 손끝과 발끝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다친 거지, 큰 부상만은, 제발, 아, 맞아, 샤이가, 샤이가 있으니까, 치료를 부탁하면, 그래, 그러면 돼. 난 당신이 두 번 죽는 걸 볼 자신은 없어. 그러니 제발.
“유…….”
[……야, 주인아, 난 분명히 진정하라고 했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진 하늘색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유리엔은 멀쩡히 서서,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에키가 천천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피가 나긴 했다. 팔뚝을 길게 긁혀서 흰 제복에 피가 번져났다. 그러나 극히 경미한 부상이었다. 피부가 길게 찢어진 수준에 불과했다.
상처의 길이 탓에 피가 많이 나긴 했지만 워낙 깊이가 얕았다. 사실 부상이라 하기에도 뭣한 상처였다.
비로소 이성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조금 전까지 유리엔은 쉽사리 검은 거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검은 거인이 재생형 마물이고, 핵을 찾기 어려운 탓에 시간이 걸렸을 뿐.
그 사실을 깨달은 에키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했지?’
그녀의 뒤에서 우르릉, 소리를 내며 검은 거인의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그 서슬에 일어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바람에 불길이 누웠다가 다시 섰다.
검은 거인의 잔해 가운데에 주동자였던 마을 주민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유리엔이나 에키나 그쪽을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어, 뭐, 음, 주인아, 그래도 날 꺼내진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죽여서 증거 인멸하자. 죽은 놈은 말을 못 해!]
마검이 위로인지 부채질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에키는 조금 전과 다른 이유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침묵이 길었다. 그사이 두세 마리 남은 진흙 거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에키는 그것들이 덤벼들든 말든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유리엔이 움직였다. 그는 랑기오사로 남은 거인들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나서, 에키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도자기 인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불길이 타닥거리는 소리만 사방에서 들렸다.
에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검까지 들키진 않았다 해도, 바라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제 손으로 보여줘 버렸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해결하는 게 가능이나 할지,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유리엔은 남은 거인을 처리하면서 진정이 되었는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약간 망설이며 그녀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에키네시아.”
그 부름에 에키는 벼락을 맞은 듯이 떨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무언가 위기가 생겼을 때 그녀는 회피하기보다 돌진하는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랬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그저 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맞설 수 없는 대상이었으므로.
“에키네시아? 괜찮은가?”
유리엔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에키의 얼굴은 희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서 달아나려 했다.
“잠깐……!”
유리엔이 황급히 돌아서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에키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했다. 커다랗게 떠진 보라색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에키는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대련할 때 그는 물러나는 에키를 보고 멈춰 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양어깨를 잡았다.
에키가 빠져나가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리엔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결절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끌어 안겼을 때조차, 그녀가 밀어내자 힘없이 밀려났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이 단단했다.
마나를 쓰면 쳐낼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조금 전에 그 난리를 쳐서 들켰는데 그가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마나를 쓸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마나를 쓰지 않으면 그녀의 몸은 단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약한 아가씨일 뿐이다. 기사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이성이 남아 있어 요령을 발휘한다면 모를까, 지금 그녀는 그저 공포에 질려 바르작거리고만 있었다.
유리엔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가 호흡을 고르더니 못을 박듯 말했다.
“알고 있었다.”
에키는 반항을 멈췄다. 귀에 들려온 말이 느리게 이해되었다. 그녀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쨍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재차 말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뭐, 뭐를요?”
“그대가 마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쥐어짜내듯 나온 그녀의 반문에 그가 조용히 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그럼 왜 모른 척했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지?
물음표들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다. 에키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더듬더듬 물었다.
“알, 알고 있었……. 어떻게…….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알 만한 기회가 있었던가. 들킬 짓을 했던가. 아니면, 역시, 회귀 이전의 기억을 토대로, 그녀가 마검의 악마임을 알아차린 걸까.
이리저리 헤매던 생각이 그 지점에 닿자 전신의 피가 얼음조각이 되어 내부를 헤집는 듯했다.
‘악마인 걸, 알아 버렸으면, 나는, 이제…….’
마검의 주인으로 낙인찍히면 마탑과 창천기사단에 쫓기고 각국의 경계를 받으며 가족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 평온한 삶은 완전히 부서져 버릴 터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먼저, 유리엔이 그녀를 증오하는 눈으로 보는 게 상상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당연한 일인데도.
에키는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에게 양어깨를 붙들려 빠져나갈 수 없으니 얼굴을 숨겼다.
체온은 곤두박질치는데 눈가만 뜨겁게 달아올랐다. 탈 듯이 뜨거운 눈물이 고여 흘러넘치려 했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서 있기가 힘들었다. 발아래의 무저갱으로 푹 꺼져 다시는 햇빛에 닿지 못할 것만 같은 공포가 차올랐다.
비틀거리는 몸을 유리엔의 손이 받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쥔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가린 손 틈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려 애쓰다가, 제 손아귀 안에서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리엔이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손 안에 얼굴을 숨긴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결심하듯 다물렸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그녀와 시선이 맞도록 몸을 낮추었다.
“에키네시아, 나를 봐다오.”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에키는 여전히 손아래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쫓기듯 가빴다.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숨겨주겠다. 원한다면 나 역시 잊어버리도록 노력하마. 그러니 나를 봐라.”
딱딱한 말투였음에도 그것은 애원처럼 들렸다. 그 말의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스터인 걸 숨겨주겠다니. 잊어버리도록 노력해 보겠다니. 대체 왜.
손을 떼어 보았다. 눈물이 고여 흐려진 너머로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고인 눈물을 본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흐트러지려는 낯을 수습하며 차근차근 말했다.
“그대가 마스터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대와 대련을 하길 원했었다. 대련을 하고 나면 답하겠다고 했었던 것들을 지금 말하겠다.”
유리엔은 달아나버릴 것 같은 그녀를 붙잡은 채,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예전에, 그대를 탄신 연회에서 보고 기억했다고 했었지. 그때 그대에게 있는 재능을 알아봤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관심을 가졌고, 그대가 사관생도가 되자마자 스콰이어로 받아 들인 것이다.”
“재능을…… 알아봤다니요, 어떻게?”
탄신 연회 때의 그녀는 검을 쥐어 보지 않은 흔한 귀족영애였다. 에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묻자 그는 잠시 망설였다.
“……마스터임을 알았다는 건 아니다. 그대가 검을 쥐면 누구보다도 뛰어나리라는 것을 알았을 뿐. 그 점을 알아본 건, 내가 성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랑기오사에 그런 능력이 있었나요?”
오너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에키는 랑기오사를 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 개의 기오사를 모두 모았던 그녀도 랑기오사의 능력 중 널리 알려진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유리엔은 찰나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말을 넘겼다.
“그대가 마스터인지 의심하기 시작한 건 분수대에서 그대와 만났을 때, 확신하게 된 건 신입생 순위전 때였다.”
“분수대라면…….”
“그대의 손은 검을 즐기는 손이 아니었지. 선발 시험 때 그대를 지켜 보았었다. 그 정도 기술을 쓰면서 몸에는 단련한 흔적이 거의 없다니, 마나에 익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의심을 가졌고, 신입생 순위전 때 지켜보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신입생 순위전 때, 계셨었어요?”
“공식적으로는 없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즉 몰래 지켜봤단 소리다. 에키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가 한 말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짜맞춰졌다.
그러니까 탄신 연회 때부터 내가 천재인 걸 알았고, 그래서 기억해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사관학교에 입학하니 얼른 스콰이어로 삼았다는 거지? 재능이 탐이 나서?
그러고 나서 단련 안 된 몸이랑 어울리지 않게 뛰어난 기술을 보면서 마스터인 걸 눈치챘고, 계속 대련하고 싶어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거지.
[저거 머릿속에 검만 든 거 아냐?]
마검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황당해지자 화끈거리던 눈가가 가라앉았다. 이미 고여 있던 눈물만 한 방울 툭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