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1화
“저번에 흰 까마귀 협곡에서 결절을 경험하고 나서, 조금 찾아본 것이 있어서요. 결절에는 시작점이라는 게…….”
바라하 때처럼 그녀는 책에서 본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유리엔은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저, 로드?”
“……알겠다. 그 시작점이라는 건 저 안에 있겠군. 시험해 볼 만한 가설이다.”
느릿하게 답한 그가 몸을 돌려 곧장 쉼터 안으로 향했다. 에키가 그를 뒤따랐다.
[쟤 왜 저렇게 화를 내?]
마검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를 내는 그가 신기하기도 하고, 그녀가 다친 것을 걱정하는 건가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그녀는 쉼터의 문을 부수는 유리엔의 등을 가만 바라보다가 물었다.
“로드. 제게 화가 나셨나요?”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의 물음에 그의 등이 멈칫 굳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잠시 멈춰 있다가, 낮게 대답했다.
“그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미안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과였다. 그는 그녀가 더 물을 틈을 주지 않고 문을 완전히 들어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쉼터 안쪽, 샤이가 웅크려 있던 모퉁이에 확실하게 흠 같은 것이 나 있었다.
“저것인가?”
“예, 아마도요.”
에키의 대답에 유리엔이 랑기오사를 들어올렸다. 그가 시작점을 향해 랑기오사를 겨누는 것을 보며 그녀는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너무 쉬웠다. 결절이 이렇게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는 거였나?
갑자기 유리엔을 말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랑기오사는 시작점을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하얀 칼끝이 허공에 있는 흠을 꿰뚫었다. 동시에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에키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저번에, 흰 까마귀 협곡의 결절에서 처음 시작점을 찔렀을 때, 모든 마물이 울부짖으며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와 비슷한 직감.
그녀는 본능적으로 유리엔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에키가 그의 팔뚝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유리엔 역시 무언가를 감지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한 발짝 물러선 곳에 쾅 소리를 내며 지붕을 뚫고 기둥 같은 것이 처박혔다.
에키와 유리엔은 서로 뭐라 대화할 틈조차 없이 쉼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그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은 휘휘 저어지며 쉼터를 완전히 박살냈다.
밖은 불바다였다. 불꽃 나뭇잎들이 모조리 떨어져 하늘이 훤히 드러났다. 기름이 있던 곳은 전부 시뻘건 불이 혀를 날름거렸다. 발 디딜 곳은 그다지 없었다. 매캐하고 텁텁한 공기가 사방을 메웠다.
에키는 고개를 돌려 쉼터를 내리찍은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세상에.”
[무지막지하게 크네. 저게 대장 같은 건가?]
팔 하나가 나무 기둥만큼이나 큰 엄청난 크기의 거인이었다. 그 몸뚱이는 진흙이 아니라 주위의 나무들처럼 검은 쇳덩이 비슷한 재질이었다.
쉼터를 완전히 박살 낸 검은 거인이 머리를 돌려 그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휑하니 뚫린 눈구멍이 섬뜩했다.
거인은 다른 손에 거대한 밧줄 올가미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채찍을 내리치듯 올가미를 그들을 향해 내리쳤다.
에키가 반응하기 전에 유리엔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들이 있던 곳에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의 밧줄이 내리쳐지며 땅이 파이고 불꽃이 튀었다.
유리엔은 물러서자마자 그녀를 내려놓고 떨어졌다.
“에키네시아, 저쪽을 부탁하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유리엔이 한 쪽을 가리켰다. 에키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불길 너머로 진흙 거인 수십이 몰려들고 있었다. 거인들은 시작점을 건드린 유리엔을 노리고 몰려오는 듯했지만, 오는 길에 부상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누워 있는 장소가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몇 마리 되지 않는다. 상처를 내어보고 피가 나면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면 된다. 주민은 총 열 명 남짓이고, 내가 구조한 게 네 명이었다.”
이전에 주민들을 구조하며 파악을 끝냈었는지 그가 빠르게 설명했다. 에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메시스트를 쥐었다.
유리엔은 그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더니 랑기오사를 들고 그녀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검은 거인이 그를 노리고 주먹을 내리쳤다. 그는 깔끔한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하며 랑기오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거기까지 본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뽑고 몰려오는 진흙 거인들 쪽으로 달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기 전에 사태의 해결이 우선이었다.
사방이 불길이라 자칫 잘못하면 풍성한 옷자락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휘어잡고 치솟는 불 사이를 가로질렀다.
첫 번째 거인에 도달하자마자 허리를 적당히 베었다. 피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는 주먹을 피하며 그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회전하며 다시 벤다. 이번에는 더 깊게, 대각선으로 베어 올려 명치를 꿰뚫도록. 검날에 돌멩이처럼 단단한 게 걸렸다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다수의 재생형 마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핵이었다.
에키는 진흙 거인이 허물어지는 것을 한 걸음 움직여 피했다. 유리엔의 말대로 그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주민 수에 비해 거인 수가 많구나. 사람이 변한 마물보다 그냥 마물이 더 많겠어.’
구별 방법은 유리엔이 알려줬으니 거칠 게 없었다. 에키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불길 사이를 날아다니듯 누비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튄 불티가 드레스 자락에 옮겨 붙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심심해. 나도 싸우고 싶어. 나도오!]
거인을 베기 전에는 반드시 허리부분을 얕게 베어보았다. 이번에는 피가 흘렀다. 에키는 거인의 허벅지를 밟고 뛰어올라 어깨를 딛고 뒤로 넘어갔다. 아래로 떨어지며 등줄기를 가르듯 길게 베었다.
[치, 아메시스튼지 뭔지 뚝 부러졌으면 좋겠다. 부러져라! 부러져!]
아메시스트는 견고하고 날카로웠다.
갈라진 진흙의 틈으로 사람의 목덜미가 언뜻 보였다. 그녀는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그 목덜미를 쥐고 힘주어 인간을 끌어냈다. 진흙이 분수처럼 튀었다.
[귀찮게, 그냥 죽이지. 손 안 아파?]
끌어낸 인간은 다른 주민들이 있는 쪽으로 내던졌다. 짓눌린 왼손의 화상이 심하게 쓰라렸지만 그 정도 통증은 참을 만했다. 인간을 빼내자 허물어지는 거인을 피하며 그녀는 다음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실수인 척 그냥 죽이면 살의도 풀리고 좋을 텐데. 주인아, 나 써주면 안 돼? 전에 하나 죽였다지만 아직 살의 해소도 덜 됐잖아!]
열기가 가득한 불꽃 사이로 거인들을 베고 다니자 땀이 뚝뚝 흘렀다. 에키는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제 상태를 흘끔 확인했다.
보통이라면 화상투성이가 되었겠지만 은근슬쩍 마나를 이용해 피부를 보호한 탓에 옷만 여기저기 그슬렸다.
화장은 안 지워진 거 같으니 얼굴은 괜찮겠지. 유리엔에게 돌아가기 전에 몰래 거울로 확인해야겠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지막이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발.”
[심심해 죽겠는데 말도 하지 말라고?]
“바쁘니까 좀…….”
말하다 말고 에키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거인들이 들고 있던 올가미가 그녀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휘둘러졌다. 사방에 있던 불길이 옮겨 붙어 올가미는 불타는 밧줄이 되어 있었다. 에키는 그대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좀 조용히 하라고.”
[이게 뭐가 바빠, 핵 없는 재생형 마물 수백쯤이면 몰라도.]
“중간에 사람이 섞여 있는데다, 검기를 쓸 수가 없잖아. 유리엔이 저 쪽에 있는걸.”
그녀는 어깨에 올라탄 채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뛰어내리며 거인을 반토막으로 갈랐다. 진흙이 물처럼 쏟아졌다.
[알 게 뭐야. 에이, 심심해.]
또 하나의 거인을 잡고 그 안에 있던 사람을 빼내어 던졌다. 수십의 거인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정도로 줄어들자 그녀를 적으로 인식한 건지 거인들이 그녀에게 우선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놈들을 잡아 베는 것보다 그게 더 편했다. 달려드는 족족 처리하면 되니까.
여유가 생긴 에키는 홀깃 불길 너머를 보았다. 유리엔은 검은 거인과 싸우고 있었다.
거인이 워낙 거대해서 유리엔은 그것의 손바닥만하게 보였다. 저 정도 체격 차이면 마스터라 해도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울 텐데, 하얀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거인의 몸에 길게 상처가 나고 있었다.
랑기오사가 마나를 증폭시켜 유리엔이 뽑아내는 검기가 대검 수준으로 커진 덕분이었다.
몰아붙이고 있는 건 유리엔이었다. 거인에 비해 속도가 빠른 그는 힘들이지 않고 그것을 상대했다. 문제는 검은 거인의 상처가 난 즉시 아문다는 점이었다. 핵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였다.
아까 에키의 감지 범위가 좁아졌듯, 저 거인에게서는 마나의 흐름이 잘 감지되지 않았다. 나무 기둥과 같은 재질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마 전신을 다 일일이 찌르며 핵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유리엔은 거인의 몸을 골고루 베어대는 중이었다. 물론 마검의 능력이 있는 에키는 바로 핵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지만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궁했다.
[야, 뒤, 뒤!]
“알아.”
에키는 몸을 돌리면서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하게 그녀를 내리치려던 거인의 양팔을 날려버렸다.
상처를 내고, 피를 확인하고, 피가 나지 않으면 명치를 꿰뚫는다. 반복적인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결절에 대해 생각했다.
‘저번 흰 까마귀 협곡 때랑, 방금 전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결절 내부를 깨끗이 정리한 후에 시작점을 건드려야 하나 보네.’
이번에 나가면 결절에 대해서 좀 더 알아 봐야겠다. 그녀나 유리엔이 지워진 시간과 다르게 현재를 변화시키려 하는 이상, 결절과 또 마주치게 될 게 틀림없으니까.
‘그 개고생을 해서 시간을 돌렸는데, 뭐 하나 바꾸려 하면 결절이라니.’
울컥 짜증이 나서 검이 거칠어졌다. 운 없이 걸린 거인이 거의 토막 난 상태로 쓰러졌다.
에키는 진흙 덩어리를 피하며 다음 놈으로 향하다 불현듯 의문을 느꼈다.
단순히 큰 변화가 생기려 할 때, 카이로스기오사에 대한 라키아기오사의 반동으로 결절이 발생한다면, 왜 원래 일어나야 할 학살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는 결절이 생기지 않은 거지? 로아즈 저택의 학살처럼 그녀가 마검의 악마로서 저질렀던 학살들 말이다.
‘뭔가 규칙이 있는 걸까, 아니면 라키아기오사가 제멋대로 구는 걸까.’
같은 신검인 카이로스기오사가 자아가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자아가 있는 라키아기오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과거와 다른 행동을 할 때, 결절이 생길지 생기지 않을지를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그렇게 편하게 일이 돌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
‘나가면 조사해 봐야겠다. 니콜 언니는 마법사니까, 뭔가 알려나.’
그렇게 한가롭게 몇 남지 않은 거인들을 베어나가며, 에키는 유리엔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순간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뱀의 혀처럼 흔들리는 불꽃들 너머로, 피가 튀는 것이 보였다. 모든 광경이 아주 느리게 눈에 들어왔다. 후려쳐지는 검은 거인의 손, 그 손의 궤적을 따라 튀는 붉은 피, 그 피의 주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