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60화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진정한 샤이가 눈치를 보며 에키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치맛자락에 숨은 에키의 왼손을 가리켰다.
“저기, 언니, 그 손……. 다쳤죠? 제가 낫게 할 수 있어요.”
“아, 이거. 괜찮아,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낫게 하는 거, 기분 나쁘세요?”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
에키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샤이의 어깨를 가리켰다. 가는 어깨는 눈에 띄게 들썩이고 있었다. 지친 것처럼.
“그 힘은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지금도 지쳤고.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는 거지?”
“어……. 오래 달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에요.”
“그것 봐. 샤이, 체력을 아끼도록 해. 나중에 치료해 주렴.”
오른손도 아니고 왼손이고, 급한 부상도 아니었다. 지쳐 있는 샤이를 더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샤이가 좀 체력을 회복하고 나면 그때 부탁해도 늦지 않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아까 내던졌던 아메시스트를 찾아 검집에 집어넣었다.
샤이는 못내 미련이 남은 눈으로 에키의 왼손을 바라보았지만 더 고집을 부리진 못했다.
에키는 검을 챙기며 흘깃 기절한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샤이를 마녀로 몰아붙였던 마을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다지 챙겨줄 마음이 들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결절 안에서 죽든 말든 그냥 버리고 싶은데, 그렇다고 진짜 버리고 가면 저 착해빠진 아이가 울겠지. 진흙 거인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죽을 게 뻔했다.
에키는 한숨을 쉬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별로 잘 대해줄 기분이 아니라서 가차 없이 발로 찼다.
“힉.”
샤이가 그 기세에 놀라 딸꾹질을 했다. 에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이 깨어날 때까지 몇 차례 더 구두 굽으로 밟아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녀는 그가 눈을 뜨는 걸 확인하고 발을 내렸다.
“일어나서 걸어요.”
“으……? 뭐, 뭐야!”
“살고 싶으면 걸어서 따라와요. 샤이한테 감사하고.”
노인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에키는 할 말만 남기고 샤이의 손을 잡았다.
“가자, 샤이. 우선 그 쉼터를 찾아야 해.”
“어, 아, 네!”
샤이는 노인을 흘긋거리며 에키에게 이끌려 걸었다. 에키는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안 따라와요? 따라오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주위의 기괴한 모습에 넋을 놓았던 노인이 그 말에 채찍을 맞은 것처럼 일어났다. 그가 엉거주춤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에키는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미로의 갈림길에 도달할 때마다 나무 기둥에 표시를 남기며 이동했다.
‘유리엔이라면 이 안에서 위험할 일은 없어.’
그를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그의 실력을 안다. 사실 그녀 자신을 제외하면 그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다시피 하다. 괜히 창천기사단장이고 기오사 오너인 게 아니다. 진흙 거인이나 불의 미로 정도로 그가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럼, 차라리 그와 마주치지 않고 결절을 부숴버리는 게 낫지.’
검술에 문외한인 샤이나 마을 사람 앞에서는 적당히 실력을 드러내면서도 마스터임을 숨길 수 있었다. 지금, 갈림길에 도달할 때마다 검에 마나를 살짝 실어서 기둥에 표시를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리엔과 합류하면 그럴 수 없었다.
‘시작점을 찾자. 그리고 샤이에게 부탁해서 엘기오사로 결절을 부수면, 유리엔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까.’
결심을 굳혔다. 에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점을 발견했다. 샤이의 체력이었다.
“괘, 괜찮아요…….”
샤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어댔다. 얼굴이 발갛고 온 몸에 땀이 범벅이었다. 눈에 힘이 풀렸다. 뒤따라오던 노인도 혀를 빼물고 헉헉거리고 있었다.
노인과 어린아이의 체력으로는 미로를 계속해서 헤매는 것이 무리였다. 불꽃 나뭇잎과 곳곳의 불로 인해 열기가 가득해서 더 쉽게 지쳤다.
[아오, 다 귀찮아. 그냥 죽이고 나가면 안 돼?]
마검이 툴툴거렸다. 에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샤이를 두고 그녀가 혼자 시작점을 찾아보는 게 나을 듯했다. 어디 잠시라도 안전할 만한 곳이 없나.
진흙 거인이 나타나더라도 안전 장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미로에는 그럴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면 만드는 수밖에.
“잠깐 뒤로 물러나.”
에키는 샤이와 노인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가서 몰래 검기를 써서 나무를 베어냈다. 아까 샤이를 찾으며 나무를 벨 때 짐작한 게 있었다.
그녀는 베어낸 나무의 단면에 이미 화상을 입은 왼손을 살짝 대어보았다.
“역시, 베고 나면 열기가 사라지는 구나.”
그녀는 바닥에서 몇 차례 발을 구르다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뒤에서 노인이 질겁해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진흙 거인이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높이에 도달한 그녀가 가로로 아메시스트를 길게 휘둘렀다. 동시에 두 그루의 나무가 베이며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극도로 마나를 압축한 덕에 검기의 특징인 희미한 빛은 거의 나지 않았다.
에키는 사뿐히 착지했다. 드레스 자락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린 노인을 무시하고 넋이 나간 샤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위에 올려줄 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양옆의 나무에는 절대 닿지 말고. 굉장히 뜨겁거든.”
“네, 네에…….”
그녀는 샤이를 안아 잘라낸 나무 위에 올려준 다음, 노인의 뒷덜미를 잡아 나무 위에 던져놓았다. 노인을 내려놓으며 에키는 경고를 남겼다.
“제가 없다고 샤이 건드리는 건 아니겠죠? 그 정도로 멍청하시진 않을 거라 믿어요.”
그녀의 도약과 철기둥 같은 나무를 베어내는 검을 목격한 노인은 퍼렇게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아무리 봐도 마나가 없이는 불가능한 짓이었지만 이 정도는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다. 목격자가 무지한 노인과 어린아이니 과장해서 말하는 거라고 우기면 될 터였다.
“다녀올게.”
에키는 걱정스럽게 보는 샤이에게 웃어주고 미로 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없으니 그녀의 속도는 무척 빨라졌다. 기둥에 표식을 남긴 덕분에 헤매는 범위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중간 중간 진흙 거인을 마주쳤지만 상대하지 않고 지나쳤다.
‘결절이 무너지면 멀쩡하게 돌아올 텐데 뭐.’
저게 다 샤이를 죽이려 든 마을 사람이라 생각하니 딱히 챙겨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 죽이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그녀는 거인들을 따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결절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지만, 허기진 정도로 보아서 반나절은 훌쩍 넘긴 기분이었다.
꽤 긴 시간을 헤맨 끝에 에키는 겨우 쉼터를 발견했다. 쉼터의 주위에는 불붙은 기름이 둥글게 흘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은 경계선이었다.
게다가 그 안에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마을 주민들 두엇이 쓰러져 있었다.
‘저 사람들은…… 설마.’
에키는 불길의 벽을 뛰어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기절한 상태였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응급처지가 되어 있는 부상은 딱 봐도 칼에 베인 자국이었다.
‘유리엔이구나.’
진흙 거인과 마주친 유리엔은 아마 그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거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다 사람들을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에키는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엔이 정신을 잃은 청년을 걸머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에키를 발견한 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찰나 멈추는 호흡, 흐트러지는 표정. 이어 그의 걸음이 달리듯 빨라졌다. 에키는 달아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불길을 넘어 쉼터 앞으로 온 유리엔이 걸머진 청년을 급하게 내려놓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를 슬쩍 훑었다. 역시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걱정하고 있었던지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반면 그녀를 살핀 유리엔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천으로 대충 감아놓은 왼손에 그의 눈길이 닿아 있었다.
에키는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좀 무리하더라도 샤이한테 치료해 달라고 할 걸.
그녀의 기준에서는 정말로 별 부상이 아니라서, 나중에 안전해진 다음 고쳐달라고 하려고 내버려둔 거였다.
유리엔이 보면 걱정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스콰이어니까 그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데도.
정확히는, 그녀는 전투를 치르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며 몸을 사려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언제나 그녀 자신의 상태보다 사태의 해결이나 기오사를 얻는다는 목표가 우선이었으므로.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있었으나 걱정할 만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도 컸다.
손을 뒤로 빼려는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천에 묻어난 진물을 본 그의 눈가가 떨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다시 손을 잡아 뺐다. 옷자락 사이로 손을 감추고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로드.”
“……그대는, 대체, 왜 항상!”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놀란 에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유리엔이 울컥 솟구치는 걸 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튀어나오던 말끝을 삼켰다. 그가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호흡을 고르고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묻는다.
“그대는 왜 결절에 들어왔지?”
“네?”
“왜, 결절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말투가 딱딱했다. 그녀를 향하는 그의 표정도 딱딱했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에키는 그가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녀가 시체의 산 앞에서 그를 맞이했을 때조차 그는 화를 내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어물어물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와 샤이가 걱정되어 일부러 들어왔다.
물론 사실대로 대답할 순 없었다. 한갓 사관생도일 뿐인 스콰이어가 마스터인 로드를 걱정하여 결절에 일부러 들어오다니, 그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유리엔은 새파란 눈동자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것으로 끓어오른 감정을 달랬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쯤 담담해졌다.
그녀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말했다.
“로드, 엘기오사의 오너를 찾았어요. 안전한 곳에 잠시 두고 왔습니다. 결절을 빠져나갈 방법으로 짐작 가는 게 있어서…….”
유리엔은 말이 없었다. 에키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