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9화
진흙으로 빚은 거인 같은 것이 손에 쥔 올가미에 샤이를 걸어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저래서 소리를 못 냈구나. 목이 졸린 아이의 팔다리가 힘없이 버둥거렸다. 아직 살아 있었다.
에키는 앞뒤 잴 것 없이 곧바로 달려들어 거인의 팔을 베어냈다. 떨어진 팔은 철퍽 하고 진흙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거인은 그리 느린 편이 아니었지만 에키가 워낙 빨랐던 탓에, 그녀가 올가미째로 샤이를 받아낸 후에야 제 팔이 잘린 것을 알아차렸다.
에키는 우선 샤이의 목에 걸려 있는 올가미를 잘라냈다. 목이 자유로 워진 소녀가 눈물 고인 눈으로 컥컥 숨을 들이쉬었다.
“켁, 케헥.”
“괜찮아? 잠깐만 기다려.”
에키는 샤이를 등 뒤로 숨기고 성큼 성큼 다가오는 진흙 거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잘랐던 오른팔이 어느새 복구되어 있었다. 거인이 그녀의 머리만 한 주먹을 뻗었다. 바람이 일어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거센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느렸다. 에키는 간단하게 그것을 피하고 품에 안기듯 거인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재생하는 걸 보니 슬라임인가? 골렘? 어느 쪽이든 핵을 부수면 되겠지?]
마검이 한가하게 종알거렸다. 에키도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 보는 마물이지만, 언제는 결절에서 익숙한 마물이 나오던가. 그래도 기본 형태라는 게 있으니 저런 식으로 재생하는 놈은 핵을 찾아 부수면 될 터였다.
마나의 흐름으로 핵을 찾아낼 수도 있으나, 에키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살육에 특화된 마검은 주인이 상대를 죽이기에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저곳, 가슴과 배 사이 명치.’
그녀는 그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곳을 향해 검을 찌르기만 하면 되었다. 마나를 실을 필요도 없었다. 진흙을 부드럽게 가르며 푹하고 칼날이 박혀 들어갔다. 그리고 진흙 속 무언가에 닿았다.
‘응?’
칼끝에 걸리는 감촉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살과 뼈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는 감촉,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와 별개로 몸은 능숙하게 검을 비틀며 잡아 뺐다. 그녀가 낸 상처에서 시뻘건 핏물이 솟구치며 진흙 거인이 허물어졌다.
에키는 쏟아지는 피와 진흙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쓰러진 거인의 몸에서 진흙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그녀가 찌른 ‘핵’ 부분만이 남았다.
“……돌겠네.”
[우와, 이게 웬 떡이야. 죽겠지? 죽였다!]
마검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핵은 인간 남자였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의 등에서 피가 콸콸 솟아났다. 에키가 찔렀던 그 자리였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쪼그려 앉아 노인을 살폈다. 즉사는 아니었지만 곧 죽을 것이다. 의학을 배운 적은 없어도 워낙 많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상 금방 알아차렸다.
이 인간은 누구지? 결절에 함께 삼켜진 사람? 대체 왜 마물 안에 사람이 있는 거야?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건가? 또?
구역질이 났다. 검을 들고 있는 손에서 묻지도 않은 끈적끈적한 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내던지고 입가를 감싸 쥐었다.
“어……. 메리네 할아버지…….”
그녀의 등 뒤에서 샤이가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소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튀어나와 피범벅인 노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다, 다, 다쳤…….”
에키는 멍하니 허둥거리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샤이는 상처를 확인하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낫게 해도 돼요?”
“……뭐?”
“저, 저, 사실, 상처를 낫게 할 수 있어요. 병도 없어져요, 더 이상 안 아프게 할 수 있어요. 이상하죠? 언니가 보기에도, 마녀 같겠죠? 역시 전 마녀인가요?”
저게 뭔 소리야. 상처를 치료하는 게 무슨 마녀야? 에키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곧바로 대꾸하질 못했다. 그사이 샤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럼에도 결심한 듯 손을 뻗었다.
“기, 기분 나빠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픈 건 싫어요. 누구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니, 미안해요, 저, 전, 낫게 하고 싶어요 .”
샤이의 누더기 같은 옷 가슴팍에서 희미하게 빛이 났다. 에키는 소녀의 옷깃 사이 지저분한 피부 위에 뚜렷한 문양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연둣빛 나무 무늬. 그 무늬에서 작은 단검이 튀어나왔다.
빨간 열매가 달린 연두색 넝쿨로 휘감긴 은빛 단검, 대장장이가 인간의 자비로 칼날을 만들고, 인간의 사랑으로 칼날을 감싼 검. 검술의 자질을 전혀 따지지 않고 오너를 선택하는 기오사. 치유검(治癒劍) 엘기오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샤이는 단검을 쥐었다. 엘기오사는 조그만 단검이었지만 샤이도 원체 작았기에 그녀는 양손으로 단검을 쥐어야 했다. 소녀는 벌벌 떠는 손으로 그것을 상처에 박아 넣었다.
엘기오사에 대해 아는 에키도 그 광경엔 흠칫 놀랐다. 저게 보통 검이라면 노인은 즉사했을 테니까.
그러나 자애로 만들어진 검은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검이 박힌 자리에서부터 희미하게 빛나는 연두색 넝쿨이 퍼져나갔다. 상처 부위를 휘감은 넝쿨은 하얀 꽃을 피우고 이어 붉은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맙소사…….”
황홀한 광경이었다. 에키는 감탄을 흘렸다. 샤이가 엘기오사를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검이 찔렀던 자리에는 상처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에키가 찔렀던 상처마저 사라졌다. 깨끗하게 모든 부상이 나았다. 노인은 이제 죽지 않을 것이다.
[쳇, 아깝네.]
마검이 툴툴거렸다. 에키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의도치 않은 살인을 또 저지르게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노인은 살아났다. 저 아이 덕분에. 깊게 퍼져나가는 안도감. 손끝에 온기가 돌았다.
샤이가 회색 눈에 눈물을 가득 안고 바들바들 떨며 에키를 돌아보았다. 소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에키는 다가가서 아이를 끌어안았다. 자그만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진심으로 속삭였다.
“고마워, 샤이. 정말 고마워…….”
“어, 언니?”
샤이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펼쳐지며 소녀의 몸을 감쌌다. 샤이는 프릴 사이에 파묻혔다. 에키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꽃향기 같은 것.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조심 에키의 옷깃을 쥐었다. 손에 잡히는 실크 자락이 녹을 듯이 부드러웠다. 자신을 감싸 안은 품도 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샤이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 기분 나쁘지 않아요? 이런 거? 마을 사람들이 다들, 갑자기 낫다니 이상하다고, 역병도 네가 퍼뜨린 거 아니냐면서, 마녀가 틀림없다고…….”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 오히려 고마운 걸. 그리고 샤이, 너는 마녀가 아니야.”
에키는 샤이의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고 소녀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너는 기오사 오너야, 샤이.”
“기오사…… 오너?”
“여기서 탈출하고 나면, 누구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고, 너를 마녀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너는 아젠카의 성녀가 될 테니까.”
“서, 서, 성……. 네? 뭐라고요?”
샤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금방 이해하긴 어렵겠지. 나중에 차근차근 알려주면 된다. 결절을 나가 아젠카로 돌아가면 에키보다 더 잘 설명해 줄 사람이 잔뜩 있을 것이다.
“제가, 그런, 그런 엄청난 사람일 리가 없어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걱정할 것 없어, 샤이. 내가 보증할게. 넌 이미 성녀야.”
“그, 그럴 리가…….”
휘둥그레진 채 떠는 소녀가 귀엽고 안쓰러웠다. 에키는 충동적으로 아이의 동그란 이마에 뽀뽀를 했다. 샤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가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우선은 여길 나가자.”
그녀는 샤이를 한 번 더 꽉 안았다가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쩡한 상태로 기절해 있는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진흙 거인 안에 사람이라니…….’
에키는 노인을 이리저리 살폈다. 별 이상은 없었다. 결절이 삼킨 사람을 마물화하는 건 처음 보았다. 다만 그런 경우가 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은 있었다.
결절은 생긴 장소의 영향을 받고, 그 장소에 있는 강한 사념이 투사된다.
올가미를 든 진흙 거인은 샤이의 시점에서 자신을 태워 죽이려 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샤이, 이 사람을 안다고 했었지? 누구라고?”
“고트 마을에 사는, 메, 메리네 할아버지예요.”
더듬더듬 답하는 샤이의 시선은 에키의 왼손에 닿아 있었다. 천으로 둘둘 감겨 있는 손. 에키는 슬쩍 손을 치맛자락에 감추며 재차 물었다.
“그럼, 널 끌고 왔던 사람들 중 하나야?”
“아, 네.”
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에키는 미간을 짚었다. 어린애를 마녀로 몰아 태워 죽이려던 마을 사람이었다니. 아까 실수로 죽여 버렸다고 해도 딱히 후회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골짜기 근처를 지나가던 무고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고 놀랐더니만.
“……샤이. 넌 저 할아버지가 밉지 않았어?”
“미워요? 왜요?”
“저 사람은 널…….”
태워 죽이려고 했잖아, 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다. 에키는 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샤이는 눈치껏 알아챈 모양이었다. 샤이가 손가락을 꼼 지락거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다들 슬픈 일이 있었어요. 너무 슬퍼서, 힘들었을 테니까……. 무서웠지만, 미워하지는 않아요.”
“슬픈 일이라니, 어떤?”
“병이 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엄마도……. 엄마가 죽고 나서야 이 이상한 단검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걸 진작 얻었으면 엄마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단검을 늦게 얻은 제가 미워지는 거예요. 난 왜 이제야 이걸 찾아낸 걸까, 하고.”
샤이는 주먹 쥔 손으로 그렁그렁한 눈가를 문질렀다. 소녀는 눈을 가린 채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너무 슬프니까 아무라도 미워하고 싶어진 걸 거예요.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나쁜 건 병이에요, 그 사람들이 아니라.”
에키는 멍하니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저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태워 죽이려 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그 사람들 탓이 아니라고?
[와, 뭐야, 나 쟤 무서워. 인간이 저런 마음으로 사는 게 가능해? 날 못 쓰는 인간은 드문데, 쟤 나 못 쓰겠다.]
마검이 질겁한 음성으로 말했다.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가 되려면 악의나 살의를 품어본 적이 있어야 했다. 살면서 악의 어린 생각 한 번 안 해보는 인간이 드무니 대부분의 인간은 마검을 쓸 수 있었다. 오너가 되자마자 조종당하는 게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샤이는 마검을 쥐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선해서. 자신을 죽이려 하던 사람을 살려내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니. 저 정도면 평범하게 살아가기 힘들 수준이 아닌가.
에키는 드물게 마검의 심정에 약간 공감했다.